99화
귀빈석에 앉은 미나즈는 단상을 올려보았다.
이전 두 번의 재판은 클로드의 옆에 앉은 채 참석했지만, 이번에는 보르미아 공작과 함께 일부러 단상아래에 앉았다.
청중 방향에서 보는 재판은 사뭇달랐다.
거리가 멀어짐으로써 당사자들이 타자화되어 더 객관적인 대신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증언을 시작하시오.”
클로드의 목소리가 무게감 있게 울렸다.
멀리서 보니 근엄한 척하며 매사 발끈하는 꼬맹이 대신 그럴듯한 법관이 되어 있었다.
제법 위엄도 있고, 수려하게 보인다. 주변에 앉은 귀족 처녀 중에는 그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이들도 꽤 있었다.
‘이제 완전히 다 컸네..’
잠시 흐뭇했으나 그 감정은 곧 수그러들었다.
증언석에 선 비앙카스타가 경련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혹하군.’
주술에 대해 대강 들었어도 실제로 보는 건 느낌이 전혀 달랐다.
기괴하게 뒤틀렸으나 뭔가 전하려고 필사적인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곧 이입을 방해하는 차가운 목소리가 청중 속에서 튀어나왔다.
“법정에서 연극은 그만해요!”
한 소녀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귀빈석에서 불평이 연이어서 터졌다.
“뭘 하나 했더니. 또 기행을 하는 건가요?”
“바이스 후작 영애는 항상 저런 식으로 아픈 척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어요. 황녀님께서 몇 번이나 감싸며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도 말이에요.”
미나즈는 소녀들의 다과회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지만, 황녀 주변의 인간관계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연 이들이 모두 하나 같이 황녀를 따라다니며 떠받드는 무리라는 걸 눈치챘다.
“여왕벌을 건드리니 벌들이 난리가 났군요.”
미나즈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보르미아 공작이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증언 중이니 모두 정숙하시오.”
“허나 저것은 증언이라 부르기 어려워 보입니다만.”
황녀를 변호하러 나온 이델체 백작이 비꼬는 목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한 늘씬한 여자가 일어서 비앙카스타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법관님. 저는 바이스 후작 영애를 보좌하기 위해 이곳에 따라온 그레이엄이라고 합니다.”
엘레노어의 조수 그레이엄이었다.
미나즈를 비롯해서 적지 않은 귀족여인들이 그녀를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엄은 침착한 말투로 클로드에게 말했다.
“바이스 후작 영애는 이 자리에 섰으나 직접 진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지?”
“그녀는 현재 침묵의 서약을 한 상태입니다.”
침묵의 서약이라는 말에 좌중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국에서 엄격히 금지된 주술일 텐데.”
“네.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책임을 물으신다면 달게 질 것입니다.”
그레이엄은 클로드의 말을 순순히 인정한 뒤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누군가 그녀에게 서약을 강요해 목소리를 강탈한 뒤 지난 몇 년간 그녀를 지배하고 악행을 유도하며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술렁임은 경악으로 변했다.
주술의 마수가 고위 귀족에 끼쳤다.
는 충격적인 사실에 귀빈석에 파장이 일어났다.
또한 비앙카스타의 악명이 워낙 높았던 만큼 일반 대중들도 웅성대고 있었다.
억지로 온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바이스 후작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물었다.
“누가 감히 내 딸에게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후작님께서도 짐작하실 겁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엘레노어에게 잘 배웠는지 그레이 엄은 아주 능숙하게 좌중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고요해진 청중들의 눈이 자신에게 완벽히 쏠린 순간.
그녀는 단상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올렸다.
“아일린 하스카토르 황녀 전하께서 바이스 후작 영애에게 침묵의 서약을 했습니다.”
사방에서 놀란 목소리와 비명이 터졌다.
지목당한 황녀는 경련하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며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마, 말도 안 돼요! 제, 제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절, 절대로.”
억울해하는 표정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곁에 있던 이델체 백작이 격분한 얼굴로 외쳤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평민 나부 랭이가 감히 황녀 전하를 음해하는 겁니까! 저 여자를 찢어 죽여야 합니다!”
소란이 격화되자 클로드가 의사봉을 휘둘러 흐름을 끊었다.
그는 그레이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증거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그레이엄이 품을 뒤적이더니 반짝이는 반지를 잘 보이게 높이 들었다.
“여기 스트링스톤이 있습니다. 피부가 닿으면 주술자와 서약자를 잇는 선이 보이게 되는 보물이지요.”
그녀는 클로드에게 다가가 반지를 내려놓았다.
그것을 잠시 내려 보던 클로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딴 걸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장 저 무례한 여자를 처단하십시오!”
이델체가 고래고래 외쳤으나 클로 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반지를 집어든 채 단상을 내려왔다.
그리고 재판정 중앙에 선 비앙카스타에게로 다가왔다.
클로드가 반지를 끼는 순간.
광장의 모두는 숨조차 멈춘 채 그를 주목했다.
오직 미나즈만이 황녀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뭔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바이스 후작 영애. 손을 내미시오.”
클로드의 말에 비앙카스타는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 클로드는 건조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붉은 선이….”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보이지 않습니다.”
“서약을 해제했군.”
칼라브리아 백작 저.
탑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카이가 입을 열었다.
“역시나 호락호락 패를 넘기지 않는데.”
일대 소란이 일어난 광장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곁에 있던 엘레노어는 심지어 그녀를 첫 증인으로 삼자고 강하게 주장한 장본인임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계획대로 됐구나.’
처음 비앙카스타의 주술을 확인했을 때는 베아트릭스의 존재를 몰랐으므로 간단히 해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아트릭스는 제국 역사상 최고의 주술사였기 때문에 그녀가건 주술을 타인이 해제하긴 어려웠다.
여러 가지 방법 중 가장 간편한 방법은 역시 하나였다.
‘시전자가 원하면 주술은 언제든지 해제할 수 있지.’
만인 앞에서 스트링스톤을 들이밀면 분명 황녀는 서약을 해제할 것이라 예상했다.
덕택에 비앙카스타는 살갗을 벗겨내는 고통을 겪지 않고도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까지 잘 이겨내는 건데.’
서약이 해제됐으므로 황녀를 몰아 세울 증거가 사라진 셈이다.
당연히 악녀인 비앙카스타에게 엄청난 비난이 쏟아져 일대가 아수라 장이 되었다.
사방에서 비난과 욕설이 난무하고 물건을 던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비앙카스타는 창백한 얼굴이었으나 쏟아지는 공세를 묵묵히 참아 내고 있었다.
‘황녀 덕에 비난에는 꽤 익숙해졌을 테지만.’
다소 무뎌질 수는 있어도 이 정도의 힐난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스카이가 엘레노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할 필요 없네. 의지할 곳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강한 법이야.”
스카이의 긴 손가락이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 끝에는 제소자 측에 앉아 있는 에이드리언이 있었다.
그는 수많은 말들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흔들림 없는 눈으로 비앙카스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될지는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그런 거 같네요.”
엘레노어가 수긍하자 스카이는 어깨를 두들겼던 팔을 은근히 슬쩍 감았다.
“그러니 당신도 내게 의지해 보면 어떤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크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강렬하게 울렸다.
“뻗은 손을 거두시지요, 공작 전하.”
스카이가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눈썹을 올린 블레인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도 데이트를 방해하기보다는 자기 데이트를 하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럴 상대가 있었으면 여기 앉아 있지도 않을 겁니다.”
기 싫어한다는 건 별개의 문제고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스카이에게 블레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건 어차피 공작님 자업자득 아니십니까? 왜 자꾸 리안을 긁으시는 겁니까?”
그 부분은 엘레노어도 조금 의문이었다.
굳이 리안을 놀려 대며 도발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둘이 있었을 거다.
물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진 않지만, 이 똑똑한 남자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왜 그런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스카이가 뺨을 긁적거렸다.
“아아. 잔뜩 무시당하던 아카데미시절의 분노가 남아 있는 모양이야.
백작을 보면 화나게 만들고 싶거든.”
“그런 이유라면 더욱 자업자득입니다.”
블레인이 딱 못을 박자 스카이는 양팔을 머리 뒤로 모으며 등받이에 몸을 길게 기댔다.
“뭐, 괜찮네. 불평하기보단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거든.”
“상황을 즐긴다고요?”
“그래.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옆에서 볼 수라도 있으니 좋지 않나.”
스카이의 능글능글한 말에 엘레노어가 새침하게 받아쳤다.
“순정파인 척하지 마세요. 안 속으니까.”
“너무하군. 상처받았네.”
스카이는 절대 상처받았다고 생각하기 힘든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믿어 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짐승처럼 나가 볼까.”
“그러다 리안한테 죽을 겁니다.”
“지금도 반쯤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죽음 따위를 무서워 할 것 같나.”
각인이 새겨진 하반신을 힐긋 본 뒤 스카이는 여유롭게 말했다.
“정 안 된다면 나는 타협할 생각도 있고.”
“타협?”
“그래.”
스카이가 엘레노어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셋이서 하는 것도 싫어하지는 않네.”
엘레노어는 잠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던진 말을 그대로 흘려 버리기 싫었는지 스카이는 재차 덧붙였다.
“보통은 여자가 둘이지만, 뭐 백작정도라면 괜찮을 거 같아.”
그제야 이해한 엘레노어는 얼굴을 확 붉혔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화 내지 말라고. 나도 나름대로 고통 속에 내린 결론이니까.”
“그런 가벼운 말을 자꾸 던지니까 화를 내는 거라고요!”
엘레노어가 쏘아붙이는 데도 스카이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엘레노어가 떼어 내려고 애쓰는 팔에 힘을 주며 계속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난 종속의 그러나 아주 잠시뿐으로 곧장 원래대로 여유롭게 돌아왔다.
“그거 기대되는군.”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스카이의 눈은 평소보다도 다정하게 보였다.
둘의 대화를 멀뚱히 듣고 있던 블레인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뭡니까. 셋이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나도 끼워 주십시오.”
그의 말에 엘레노어는 입을 떡 벌참 많군.”
“…정확히는 백작님 주변이겠지요.”
현재 주변에 있는 이는 모두 리안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얽히지 않았을 이들뿐이었다.
스카이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인생에서 이렇게 위기에 빠져 본건 처음이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것도 처음이라네.”
지금처럼 심각한 상황에 재미라니.
엘레노어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힘이 빠진 스카이의 팔을 획 풀어 냈다.
“이제 엉뚱한 말은 그만두고 재판에 집중하죠. 지금은 이게 가장 중요하니까.”
광장에서는 집중포화를 당한 비앙카스타가 물러나고 있었다.
“점점 중요한 국면으로 가고 있네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광장에서 클로드의 음성이 전해져 왔다.
[다음은 사건의 당사자 에이드리언유니스의 증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