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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98화 (98/120)

98화

팰리시티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여관은 아침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좋은 자리에서 재판을 관전하기 위해 모여든 청중들은 식사를 위해, 혹은 아예 이곳에서 볼 생각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타주르 유니스는 어젯밤 팰리시티에 도착한 뒤 이 여관에 숙박했다.

그 덕에 손님들을 제치고 먼저 창가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그는 아침이라기에는 다소 과한 기름진 고기 조각을 잘 드는 나이프로 썰며 창밖을 응시했다.

거리는 아연할 정도로 사람이 가득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굉장하군.’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임도 구경꾼들의 호기심을 막지 못한 모양이다.

여관 바로 앞에서 커다란 목소리의 남자 몇몇이 마구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황가를 음해하는 이들을 모두 처단하라!”

“제국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공작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자!”

그들은 벌써 몇 시간이나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간혹 동조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뭐냐는 눈빛으로 본 뒤 지나쳤다.

누가 듣건 말건 상관없는 태도로 볼 때 자발적으로 나왔다기보다는 누군가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심어둔 이들처럼 보였다.

‘저래도 대세에는 그다지 지장이 없는 것 같지만.’

보수적인 이들은 여전히 황가의 시야에서 공작들의 단체 행동을 맹비난했고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은 공작측을 지지하고 있었다.

황가 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장에 모여든 이들은 명백히 공작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실제 대세를 대표하는 양상은 아닐 터.

젊고 행동력 있는 이들이 나섰기에 많아 보일 뿐이다.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지방영지나 외곽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황가의 편에 설 테니 전체 인원에서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일까.’

오타주르 유니스는 남부 유니스 가문을 대표해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처지였다.

마음의 결론은 정해진 것 같으면서도 실시간으로 계속 흔들리기만 했다.

고심하는 그의 시야에 인파를 가르며 다가오는 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

아무런 문장도 없는 평범한 마차였으나 오타주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그의 예상대로 여관 앞에 멈춰 섰다.

곧 문이 열리고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기색조차 없이 곧장 오타주르에게 다가왔다.

“오타주르 유니스 경.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함께 가시지요.”

이미 접시는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오타주르는 망설임 없이 곁에 놓아둔 간소한 짐을 짊어진 채 일어섰다.

남자를 따라 마차에 올라타자 아직 앳된 목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오타주르.”

오래 전 먼발치에서 한 번 본 게 전부인데 한눈에 알아보았다.

유니스 가문의 특징인 주근깨와 선명한 붉은 머리, 그리고 껑충 큰 키.

에이드리언 유니스가 후드를 내린 사이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몸은 괜찮습니까?”

한참 연하고 아직 작위도 받지 않은 청년이지만, 오타주르는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네. 견딜만 합니다.”

대답하는 에이드리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으나 소매 아래의 공허함을 보니 씁쓸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먼 길을 오셨는데 여관에서 묵으시다니. 언질을 주셨다면 한밤중에라도 모시러 갔을 텐데요.”

“아닙니다. 저는 그런 곳이 편합니다.”

유니스 백작가의 직손인 에이드리 언과 달리 오타주르는 방계 가문인데다 자신의 힘으로 얻은 작위였기 때문에 성장 과정은 평민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처지였다.

그래서 호화로운 저택보다는 서민적인 장소에 익숙했다.

물론 이곳에 묵은 것은 익숙함보다 민심을 살피려는 의도였지만.

“황가에서 오늘 당신을 주시하고 있을 텐데 이런 인파 속으로 오다니, 괜찮습니까?”

“네, 염려하실 거 없습니다.”

에이드리언은 다소 의기양양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대단한 분들과 함께 있거든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마차 안에는 에이드리언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평범한 체구에 인자하게 보이는 인상 좋은 노인이었다.

크라바트도 매지 않은 간소한 차림이었으나 고급 원단과, 성성한 백발에 비해 팽팽한 피부를 보아 귀족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쪽 분은……….”

“아, 그렇지. 실례했습니다.”

에이드리언이 다소 허둥대는 태도로 오타주르에게 노인을 소개했다.

“아서 보르미아 공작님이십니다.”

들리는 이름에 오타주르는 화들짝놀랐다.

남부 출신인 그에게는 너무 먼 황제보다도 더욱 하늘같은 존재였다.

“모, 몰라 뵈서 죄송합니다. 오타주르 유니스입니다.”

허둥지둥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오타주르에게 보르미아 공작은 그럴 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유니스 가문에서 보냈다고 들었는데. 가문에서는 어떤 결론을 내렸나.”

“우선 상황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자네에게 달렸다는 말인가?”

유니스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게 사실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을 멈추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데. 어쩔 셈이지?”

“가문에서 뭐라고 하셔도 저는 제 뜻대로 할 겁니다.”

에이드리언이 끼어들어서 못을 박았다.

이 마차에 탔고 보르미아 공작까지 만난 이상 선택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

사실 이미 팰리시티로 오는 도중 마음을 굳혔으므로 오타주르는 선선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딱히 말리러 온 게 아닙니다.

다만 확인하고 싶은 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신을 돕는 배후가 칼라브리아백작이 맞습니까?”

“네. 그분만이 아닙니다만.”

대답을 듣고 나니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크메르시아 토벌 당시 그분을 보고 많은 걸 느꼈습니다. 그분이 하는 일이라면 저는 믿습니다. 저도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도울 테니 부디 오늘 뜻을 이루십시오.”

에이드리언의 얼굴에 미세하게 깃들어 있던 초조함이 녹아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에이드리언의 눈에서 의지가 반짝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하에 오래 갇혀 있었을 텐데 저렇게 의욕적이라니.

대단한 정신력이라 생각하며 오타주르는 말을 덧붙였다.

“재판 외에 가문에 전하거나 부탁할 일은 없습니까? 제가 기별해 두겠습니다.”

“아, 사실은.….”

에이드리언은 선뜻 말을 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른 기쁜 소식이 있긴 합니다만, 그건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하는 표정은 묘하게 쑥스러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여자로군..’

이런 고초 속에서도 청춘이로구나.

속으로 미소 지으며 오타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재판정으로 바로 가도록 하지.”

그대로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오타주르는 창문을 통해 마차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그를 부르러 여관에 들어온 남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인원으로 이동해도 괜찮습니까?”

“걱정할 거 없습니다.”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까.”

그야 단독으로 보내지는 않았겠지.

암행에 있어 세계 최고라는 비하인 드 나이츠가 호위하고 있는 모양이다.

같은 무인으로서 흥미가 있었으므로 창밖을 철저히 관찰했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그러는 사이 에이드리언은 시선을 마부 석으로 돌렸다.

창 너머 키 크고 호리호리한 마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를 바라보는 에이드리언의 시선에는 어째서인지 동경과 자랑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마부가 아니라 호위 기사인가?’

오타주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차 시트에 등을 기댔다.

*

클로드 로우앤 공작은 법관의 붉은 로브자락을 늘어뜨린 채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등장하자 착석하고 있던 귀족들이 모두 몸을 일으켰다.

클로드는 언제나처럼 근엄한 표정을 한 채 정면을 응시하며 그 앞을 지나쳤다.

보지 않는 척 하고 있었지만, 주변 정황이 그의 영민한 두뇌에 입력되고 있었다.

‘무장한 자들이 많군.’

귀족 대부분이 검을 차고 있었고 심지어 제복 대신 갑옷을 입은 이들도 보였다.

여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위 귀족들을 모두 훑은 클로드의 시선이 정면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참석했구나.’

황제가 와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셈을 의심했다.

그러나 황제는 재판정 중앙 옥좌에 틀림없이 앉아 있었다.

“대법관 클로드 로우앤.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예법에 따라 절을 한 뒤 그는 고개를 들어 황제를 응시했다.

병색 때문인지 창백하고 굳은 얼굴.

그의 곁에 앉은 황녀는 혈색이 좋은 얼굴로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흰 드레스를 입은 가녀린 소녀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애잔하게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 이겠지.’

클로드는 티 나지 않게 주먹을 거머쥐었다.

이쪽이 이기든 지든 황녀의 실체는 오늘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정해진 좌석에 앉은 클로드가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니스 백작가의 장남 에이드리언유니스의 제소 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각종 미사어구로 점철된 기나긴 개회사를 생략하고 곧장 개정이 선언되었다.

광장을 둘러싼 공기가 급속도로 진중하게 변하고 웅성대던 목소리가 물을 끼얹은 듯 잦아들었다.

“금일은 에이드리언 유니스 측의 증인들이 나와 증언하고 증거를 제출하겠소. 명단에 따라 첫 번째 증인을 증언대로 부르도록 하시오.”

법관의 명령에 기사들이 곧 증인을 인도해 왔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백지처럼 창백한 얼굴의 자그마한 소녀였다.

그녀는 무척 주눅이 든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였고, 황제 쪽은 감히 바라보지조차 못했다.

‘이곳에서는 항상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고개 숙인 장면을 많이 보게 되는군.’

재판을 거듭할수록 느껴지는 양상이었다.

클로드는 씁쓸한 기분을 삼키며 단상에 선 소녀를 바라보았다.

“증인은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서약한 뒤 자신의 이름을 말하시오.”

클로드의 명령에 소녀가 아주 조금 고개를 들었다.

“제국을 향한 충성과 가문의 명예를 걸고 진실만을 이야기할 것을 맹세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였으나 주변이 쥐죽은 듯 고요해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는 바이스 후작가의 비앙카스타입니다.”

그녀의 이름이 울리자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얼굴은 몰라도 악녀로 유명한 그 이름을 들어 본 이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여전히 악명이 높은 데다 불안 요소가 큰 그녀를 첫 증인으로 세우는 것에 다소의 이견이 있었으나 엘레노어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재판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서사가 필요해요. 그 시작점으로는 비앙카스타가 적임이죠.’

놀랍게도 평민 출신인 그녀의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클로드는 찬성하는 측은 아니었지만, 흥미로운 기분이었다.

과연 제국 최고의 스토리텔러가 그려 낸 극본은 어떻게 흘러갈까.

“증언을 시작하게.”

클로드는 눈을 빛내며 의사봉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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