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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97화 (97/120)

제97화

“오늘은 늦었군.”

그냥 일상적인 말인데 스카이가 해서인지 혹은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런가요? 아직 여덟 시인데.”

“늘 이 시간에는 작업실에 있잖아.”

그런 걸 관찰하고 있었나?

흠칫했지만, 엘레노어는 태연하게 그랬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방금은 침실에서 나오더군.”

“어제 늦게까지 작업했어요. 피로 가 겹쳐 이제 일어났네요.”

다행스럽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는 것에 성공했다.

그 덕인지 그녀에게 다가선 스카이의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

“무리하지 않아요. 제 한계는 알거든요.”

두 사람은 함께 복도를 걸으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곧 식당에 도착해 엘레노어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간밤에 꽤 뜨거웠던 모양이군.”

스카이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엘레노어는 움찔했다.

“네? 뭐라고 말씀하셨죠?”

잘못 들은 척 재차 확인하자 스카

“글쎄. 호의일까.”

호의라니?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스카이의 손이 다가왔다.

그는 엘레노어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공작 부인이 모두 앞에서 남긴 말씀이 있는데 이런 모습으로 들어가는 건 좀 그렇지?”

“이런… 모습이라고요?”

스카이는 긴 손가락으로 엘레노어의 가느다란 목을 타고 내려가다가한 지점에 멈췄다.

쇄골 위를 꾹 누르며 그가 수려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무슨….”

“이런 흔적을 남기고 들어가면 모른 척하기 곤란하잖아.”

스카이의 말에 엘레노어의 입술이 벌어졌다.

‘흔적이라니. 설마, 백작님이?’

그녀는 무척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스카이가 짚었던 부분을 손으로 감싸 쥐고 물러서려 했다.

그러자 스카이가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정말이었나 보군.”

그는 바다색 눈동자를 찌푸리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냥 느낌이 와서 넘겨짚은 건데.”

“뭐야, 그럼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 평소대로 티 하나 없고 새하얘서 흥분되는군.”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이런 허술한 유도신문에 넘어가다니.’

분해서 입술을 깨문 엘레노어에게 스카이가 다시 물었다.

“거기에 칼라브리아 백작이 뭔가 흔적이 남을 만한 일을 했나?”

“이상한 질문하지 마세요.”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기도 뭣해서 냉담하게 받아치자 스카이가 입술을 내밀었다.

“치사하네. 이쪽은 자중하고 있는데.”

“당신이 자중한 적이 있다고요?”

“너무 말꼬리 잡지 말고.”

스카이가 엘레노어의 어깨를 감싸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럴 거라면 공평하게 나도 한 번하게….”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스카이의 말을 자르는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놀라 바라보니 복도 끝에 리안이 서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엘레노어는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그 표정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눈치채겠는걸.”

스카이의 말을 듣고서야 엘레노어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제 보니 주변은 식사를 준비하는 메이드가 제법 여럿 통행하고 있었다.

잘 훈련된 고용인답게 모두 태연한 기색이었으나 은근히 이쪽을 의식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여유가 없었나.’

그렇다면 눈치 빠른 스카이에게 들키는 게 당연했다.

엘레노어가 속을 끓이는 사이 리안은 그들에게 다가왔다.

딱히 빨리 걷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어느새 바로 앞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페이드라 공작.”

리안은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말했다.

원래 무표정하지만, 유독 냉담한 태도였다.

“그렇게 하지요. 아침 식사도 하기 전에 죽는 취미는 없으니까.”

스카이는 유들유들 대답한 뒤 식당으로 먼저 들어섰다.

“잘 주무셨습니까?”

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또 이유 없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어색해서 엘레노어는 뭔가 더 말을 걸고 싶은 듯한 리안을 둔 채 다소 서두르는 태도로 식당 문을 열었다.

안에는 스카이가 홀로 앉아 있었다.

“공작 부인은 안 계시나요?”

“매를 돌보며 바깥에서 드시겠다고 합니다.”

집사가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에이드리언과 비앙카스타 역시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한 긴장 때문인지 식사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하게 보일까 봐 나왔는데. 이 럴 거면 나도 그냥 방에 남을 걸 그랬네.’

후회했지만, 이미 나와 버렸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엘레노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식당을 둘러보았다.

4미터가 넘는 긴 식탁에 겨우 세사람.

그중 두 사람이 각각 맞은편 끝에 앉아 있었다.

“엘레노어, 이쪽에 앉으십시오.”

“여기 앉아, 엘레노어.”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전, 그냥 문에 가까운 쪽에 앉을 게요.”

한쪽으로만 가서 앉을 리가 없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며 앉자 스카이가 곧장 일어서 엘레노어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가 채 앉기도 전에 리안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미안하지만, 제가 먼저 앉았습니다. 당신은 맞은편에 앉으시지요.”

밥상 앞에서 이게 대체 무슨 신경전이야.

엘레노어가 리안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가까이 두기 싫습니다. 저 남자는 너무 쉽게 당신을 만지거나 하니까.”

역시 아까 복도에서의 장면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냥 장난이었어요.”

“장난이라 해도 다른 남자와 닿으면 안 됩니다.”

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러다 마음이 생기면 큰일이니까.”

“네?”

“살을 비비면 마음이 생긴다고 했으니까요.”

리안은 살을 비비면 마음이 생긴다는 설을 여전히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라 받아치려는데 스카이가 말하는 게 더 빨랐다.

“살을 비비면 마음이 생깁니까?”

그간 꽤 많은 여자와 살을 비볐을 거면서 모르는 척 말하는 모습이 얄미웠다.

“그렇습니다. 엘레노어가 내게 가르쳐 준 겁니다.”

리안의 대답에 스카이가 눈썹을 슬며시 올렸다.

왠지 뭔가 심술궂은 장난을 할 거 같아서 침을 꿀꺽 삼켰을 때였다.

스카이가 갑자기 리안을 휙 끌어안았다.

“이런, 안 생겼습니까?”

“사포와 살을 비벼도 당신보다는 마음이 생길 겁니다.”

리안의 목소리는 무척 딱딱했다.

그러나 스카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으로 받아쳤다.

“재미있는 시도를 해 본 건데. 그렇게 유머 감각이 없으면 여자들에게 미움받습니다.”

리안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엘레노어도 여자라는 건 알고 있겠지요.”

스카이는 내리뜬 눈을 엘레노어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유머 감각이 있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야… 좋죠.”

그냥 솔직히 대답하자 스카이가 그것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유머 감각 정도는 있습니다.”

리안의 대답에 엘레노어와 스카이를 비롯해 테이블에 음식을 날라 오던 고용인들까지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모두 속으로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뭐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해보시죠.”

스카이의 도발에 기대에 찬 시선들이 리안에게 꽂혔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에 준비해 오겠습니다.”

농담을 준비해 오는 시점에서 이미 틀린 것 같지만, 스카이는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았다.

“기대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다음에도 공격할 소재로 써먹을 표정이었다.

“됐으니까 두 분 다 적당히 앉으세요. 빨리 식사나 해요.”

무의미한 신경전이 길어지지 않게 엘레노어는 둘을 의자에 앉혔다.

열 개가 넘는 좌석에 굳이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음식을 먹으려니 입으로 넘어가는 건지 코로 넘어가 채 계속 공방을 이어 나갔다.

“뭐 아직 소년이나 다름없는 백작께서는 그런 것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스카이가 으스대는 말투로 긁어 대자 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또다시 칼을 붙잡는 사태를 막기 위해 엘레노어는 황급히 끼어들었다.

“내 명예를 위해 밝혀 두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없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으로도 핑퐁은 멈추지 않았다.

“오호. 그럼 숨어 들고도 별일 없이 나온 건가? 하반신에 문제라도?”

“엘레노어의 뜻을 존중했을 뿐입니다.”

리안은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분한 기색이었다.

잠시 묵묵히 포크로 감자를 쿡쿡찌르다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당신에게는 그럴 기회도 없을 테지요.”

오래 생각한 끝에 떠올린 반격인 듯했다.

그러나 느물거리는 데에는 따를 자가 없는 스카이가 그 정도 공격에 당황할 리 없었다.

“글쎄요. 오늘 나는 엘레노어와 단둘이 탑에 있을 텐데.”

리안은 오늘 이루어질 세 번째 재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로 한 터였다.

공작 부인을 비롯해 모든 이가 참석하게 될 재판이라 스카이의 말대로 성에 남는 주요 인물은 두 사람 뿐이었다.

“그사이 꽤 많은 일이 있을 수 있겠지요. 알다시피 나는 손이 꽤 빨라서….”

“그쯤 해 두세요!”

도저히 듣고 있을 수 없어 엘레노어가 끼어들었을 때였다.

리안이 엘레노어를 당겨 품에 끌어 안았다.

무척 짧은 키스였지만, 간밤의 기억 때문인지 엘레노어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미 내 거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저래서야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걱정 속에 엘레노어가 식당을 나서 자 문 앞에 서 있던 메이드들의 얼굴이 그녀를 따라왔다.

그 시선들에는 부러움이 뚝뚝 넘쳐 흘렀다.

엘레노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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