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 이게 무슨, 무슨 불경한…….”
체펠린이 무척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다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황제 폐하의 서신을 찢다니.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공작 전하라도 선을 넘은 행동입니다!”
늘 온화한 궁정백의 분노에도 미나 즈의 얼굴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와 네 개 공작가는 황제 폐하를 각 공작령의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했을 텐데.”
“폐하의 출입을 요청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공작령에서 내가 무엇을 할지는 누구도 참견할 수 없어. 그리고 나는 폐하의 손이 닿은 무엇도 통과 시키지 않기로 정했네.”
무섭도록 오만한 말이었으나 미나 즈의 당당함에 겹치자 묘한 설득력이 생겼다.
“그러나 말했듯이 이야기는 들어 주지. 할 말이 있다면 해 보게.”
“이곳에서 말입니까?”
“그렇네.”
체펠린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경계 안을 둘러싼 라인 오브 에이 브로트의 가드들.
그리고 그 너머를 빽빽이 채운 황실 근위대.
무거운 입이 기사의 미덕이라지만, 이 정도로 인원이 많으면 한두 사람쯤 미덕을 저버리지 말란 법이 없었다.
“오래 시간을 끌지는 않겠습니다.
잠시만 안에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내 허락 없이 감히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의 경계를 넘지 말게.”
미나즈는 턱 끝을 올린 채 단호하게 말했다.
“공작 전하. 하오나……….
체펠린이 그녀를 설득하려 경계 앞으로 발을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미나즈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검을 뽑아 들었다.
“넘지 말라 했네.”
미나즈는 체펠린이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긴 시간 황제의 오른팔로서 실권을 쥐고 흔들면서도 사욕을 부리지 않는 그를 높이 사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라도 자신의 주인에게 충성하는 면 또한 역시 싫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개인적인 호불호가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플로이드 공작 부인과 달라.
넘어온 곳은 그 즉시 잘라 없앨 것이야.”
노 백작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언제 어떤 협잡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야. 이곳에 있는 황실 근위대, 그리고 나의 자랑스러운 수호 기사. 그 모두에게 들려 주지 못할 내용이라면 입 밖에 내지도 말게.”
곁눈질하지 않아도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는 게 또렷이 느껴졌다.
기사들이 명백히 술렁이고 있었다.
그 속에 선 체펠린의 표정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싫다면 돌아가. 나는 아쉬울 것이 없네.”
미나즈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예상대로 체펠린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공작 전하!”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이제는 흙빛으로 변한 노 백작의 얼굴이 보였다.
필사적인 체펠린의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내일의 재판을… 멈춰 주지 않겠습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였으나 주변에 미친 파장은 적지 않았다.
기사들은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고 이야기를 더 잘 듣기 위해 망루에서 몸을 슬쩍 내미는 모습까지 보였다.
클로드는 미간을 좁혔고 미나즈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재판을 멈추다니? 그러면 황녀 전하께서 저지른 과오는 어찌 파헤칠 셈이지?”
과오’ 라는 민감한 단어에 체펠린의 미간이 꿈틀했다.
“이번 일로 황녀 전하께서도 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한동안 수도를 떠나 요양하실 겁니다.”
요양이라고?
미나즈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또한, 폐하께서는 이번 공작 전하의 단체 행동에 대해 아무 책임도 묻지 않고 용서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용서?”
체펠린의 말에 미나즈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체면을 중시하며 굽히고 들어오길 바라고 있다니.
이제는 분노가 솟는 것을 넘어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체펠린 궁정백.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을 한 적이 없네.”
미나즈는 턱 끝을 올리며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가 아는 법의 처벌은 나와 사뭇 다른 모양이군. 나로서는 죄의 대가로 요양을 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으니 말이야.”
비꼬는 말에 체펠린은 고개를 떨어뜨렸으나 간청을 멈추지 않았다.
“내전에 신음하게 될 백성을 생각해서라도 내미는 손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히 어디서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건가. 우리를 공작령 안에 몰아넣고 원치 않는 내전으로 몰아간 것은 폐하께서 하신 일임을 천하가 다 알고 있는데!”
체펠린의 의도가 그런 게 아님을 알면서도 미나즈는 오히려 일부러 소리를 높였다.
황실 근위대가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명분도 없는 황제의 세력 과시에 동원되어 이런 벌판에서 몇 날 며칠 주둔하고 있음을 알려 동요 시킬 생각이었다.
“체펠린 궁정백. 내게 있어 용서에 무조건이란 없네.”
미나즈의 또렷한 목소리가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에 울렸다.
“용서는 죄의 대가를 치렀을 때만 있는 것. 잘못이 있다면 낱낱이 드러내고 그 모든 것을 책임진 후에나 거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주변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모두 꼼짝도 하지 않고 미나즈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나는 나의 정의가 이루어지길 바라네. 따라서 재판은 예정대로 진행될 거야.”
말을 마친 미나즈는 입꼬리를 올렸다.
딱히 근거는 없지만, 기사들의 눈빛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서 그녀의 말에 동조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어깨를 두드리는 척 체펠린에게 얼굴을 기울였다.
“내전을 원치 않는다면 설득은 폐하에게 가서 해 보게.”
나지막한 속삭임 후 미나즈는 몸을 바로 들었다.
그리고 망부석처럼 굳은 체펠린은 내버려 둔 채 성으로 돌아섰다.
창가에 서 있던 황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았다.
이델체 백작이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냈어요?”
황녀의 날카로운 물음에 이델체 백작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게… 폐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말만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면 문안을 가고 병간호하는 게 딸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왜 폐하께서 저를 만나 주시지 않는 거지요?”
물론 그녀가 황제를 만나려는 건 병을 덜어 주기 위함은 아니었다.
병석에 누워 있더라도 어떻게든 부추겨 병력을 움직이게 해야만 했다.
그러나 황제가 에오가이노스의 출입을 엄금시키니 뭔가를 하려 해도 방도가 없었다.
“당장 내일이 재판인데 체펠린 궁정백도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폐하께서는 문을 걸어 잠그시다니.
모두 아일린이 어떻게 되든 상관도 하지 않는 건가요?”
답답한 마음에 황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때려 부수고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델체 백작이 아첨섞인 목소리로 은근히 말을 꺼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건 오히려 기회가 될 지도 모릅니다.”
“기회라니? 그게 무슨 말이세요?”
“폐하께서 전면에 나서지 않으신다면 내일 모든 것을 지휘하는 것은 황녀 전하가 되실 테니까요.”
황녀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제가 폐하를 만나지 못한 대신 다른 이들을 좀 만나고 왔습니다. 프리차드 백작과 리카르도 후작의 의견을 넌지시 확인하니 저희와 같았습니다.”
황녀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듣고 있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렸다.
“이미 폐하께서 수도를 둘러싸고 만반의 준비를 하라 명하셨지요. 그러니 명령만 떨어지면 됩니다.”
“하지만 황실 근위대는 폐하의 명령에만 움직여요. 제 말을 듣지 않을 텐데요.”
“그 불안한 전력을 보완할 방법도 있습니다.”
“그게 뭐죠?”
“칼라브리아 공작의 행방불명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들의 군권까지 회수해서 미리 대기시켜 뒀다가 일거에 쓸어버립시다.”
거기까지 듣자 황녀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들었다.
칼라브리아 공작이 아마 죽지는 않았겠지만, 정언의 서약을 한 이상 내일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일을 방해할 가능성은 없었다.
“재판 시작 전에 미리 치길 바라십니까?”
의기양양한 이델체 백작의 말에 황녀는 고개를 저었다.
“재판을 위해 모두 자리를 비웠을 때 칼라브리아 백작 저를 노리세요.”
“백작 저입니까?”
“그 천박한 요부를 잡아 인질로 삼은 후 재판정으로 가겠습니다.”
“역시 영민하십니다. 그것으로 칼라브리아 백작을 제어할 수 있겠군요.”
이델체 백작은 과장스러운 태도로 허리를 굽혔다.
“전하께서 황제가 되어 제국에 군림하는 날이 기다려질 뿐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폐하께서 아직 젊으신데.”
황녀는 손사래를 치며 물러섰지만, 이델체는 한순간 그녀의 눈이 빛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실례했군요. 그럼 저는 이만 준비를 하러 가 보겠습니다.”
방을 물러나오는 이델체 백작의 표정은 기세등등했다.
‘리안 칼라브리아.’ 내가 내민 손을 짝 놀란 뒤 곧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뒤척이다 해 뜰 무렵에 잠들었지만, 이미 눈을 뜬 지는 한참.
나갈 준비도 마친 상태였으나 그녀는 선뜻 방을 나서지 못했다.
‘어떤 얼굴로 봐야 하지.’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이미 리안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체온과 손길, 그리고 입술의 감촉은 여전히 온몸에 생생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같이 자게 내버려 둔 거야.’
무슨 생각을 했다기보다 그냥 상황에 휩쓸려 버린 것뿐이지만.
그와 처음으로 밤을 보냈던 날처럼 온몸이 민감해지고 화끈거렸다.
조금만 멍하니 있어도 속삭이던 리안의 목소리와 몸을 어루만지던 촉감이 되살아나 몸 안에 불길이 일었다.
‘혼자 있어도 이런 상태인데 만나면 더 심하지 않을까.’
공작 부인이 이상한 낌새를 챌지도 모른다.
이불을 마구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엘레노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중요한 날에 그런 거나 생각하고 있으면 안 되지. 정신 차리자.’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몰아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모인 자리에서 황가와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안정될 지도 모른다.
리안 쪽은 그냥 쳐다보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