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밀어내야 하는데.

혀가 굳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밀착한 리안의 탄탄한 가슴이 느릿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순적인 움직임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듯 느린 호흡, 그리고 그와 반대로 빠르게 뛰는 심장때문이었다.

필사적인 심호흡에도 심장 박동은 조금도 잦아들 기색이 없었다.

리안은 엘레노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멈췄던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읏.”

숨을 들이쉰 엘레노어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터질 거 같은데, 발로 자극하고…….”

허리를 매만지던 손이 흐르듯 내려가 아까 쥐었던 가터벨트를 매만졌다.

“이런 걸 보여 주고 참으라고 해도…….”

리안은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너무하지 않냐고 원망하는 눈치였다.

그를 아래로 밀어 넣은 것도 자신이고, 발로 그 부근을 누른 것도 자신이었으므로 할 말이 없었다.

“잘못했어요.”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눈을 깜빡였다.

이러면 누그러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하, 진짜 미치겠다.”

리안은 엘레노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평소답지 않은 말투만 봐도 그가 지금 얼마나 애끓는 심정인지 여실히 전해졌다.

“엘레노어.”

그는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가 엘레노어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 아무래도… 가기 싫습니다.”

달콤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마음이 흔들렸으나 방금 공작 부인과의 대화를 생각하면 리안을 돌려 보내야만 했다.

“돌아가셔야 해요.”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떼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리안은 싫은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야한 건 안 할 테니까…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요.”

밀어내야 하는데 아쉬운 듯 내리뜬보라색 눈동자가 미친 듯이 예뻤다.

그는 눈빛으로 엘레노어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왔다.

“어차피… 이대로 나갈 수는 없으니까.”

리안은 확인시키듯 몸을 꾹 눌렀다.

그의 몸이 터질 것 같다는 건 밀착한 신체를 통해 충분히 전해졌다.

가라앉을 때까지 나가지 못한다는 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엘레노어가 기다릴 기색을 보이자리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데 이러고 있으면 시간이 지나도 별로 소용없는 거 아냐?’

리안은 그녀의 위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마디 해 주고 싶은데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본 날부터 이 눈빛에 홀려서 그대로 휩쓸려 버렸지.’

남자와 이런 거 하고 싶은 적도 없었는데.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시각적인 자극이 너무 컸다.

음탕한 생각에 젖어 있어서인지 단정한 얼굴이 선정적으로 보였다.

리안의 붉은 입술은 진한 키스의 여파로 평소보다 촉촉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이 벌어진 사이로 방금 그녀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던 뭉클한 것이 살며시 내비쳤다.

이제 함께 있는 시간도 제법 길어졌는데 조금도 리안의 눈빛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러다 나까지 흔들리겠어.’

그녀의 몸에도 리안이 새겨 놓은 쾌락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분위기가 더 위험해지기 전에 이쪽이라도 이성을 차려야만 했다.

“가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우선…

일어나서 생각해요.”

리안은 무척 아쉬운 기색을 보였으나 그녀의 위에서 내려왔다.

둘은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사이에도 심장은 쿵쿵 뛰고 그가 앉아 있는 방향이 의식되었다.

엘레노어가 멍하니 앞을 응시하고 있는 리안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제국… 기사도 헌장.”

역시 음심을 억누르는 데에는 애국심이 최고인가.

그러나 그 강력한 방법도 지금은 효과가 없는 듯했다.

리안이 길게 숨을 내쉬며 엘레노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금 같은 머리카락에서 부드러운 향기가 풍겼다.

“전혀 가라앉을 거 같지 않은데…….”

“…그럼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가기 싫습니다.”

“하지만 백작님이 방금 소용이 없다고….”

리안은 엘레노어의 어깨에 팔을 감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아침까지 같이 있으면 안 됩니까?”

“네?”

“당신이 싫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

칼로 혀를 벗겨 내야 할 때조차 담담하게 보이던 리안의 눈에 절박함이 가득했다.

잔뜩 달아오른 스무 살 남자의 욕망이란 이렇게 강력한 건가.

아무리 간청해도 내키지 않으면 가차 없는 엘레노어였지만, 문제는 이쪽도 같이 있는 게 싫지 않다는 거다.

“그러다 공작 부인이 보시면..….”

결국, 단호하지 않은 말이 나오고 말았다.

“지금쯤 주무실 겁니다.”

“계속 불이 켜져 있으면 또 오실지도 모르고……….”

“누가 오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겠습니다.”

그거야 백작님이라면 가능하겠지.

아까 그렇게 해야 했던 건데. 그러지 못하게 한 게 잘못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함께 있어요.”

마음이 기운 듯한 엘레노어를 리안이 조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응? 나 얌전히 있을게요.”

야한 짓만 해 놓고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다니.

그러나 강하게 나오면 같이 강하고 약자에게는 같이 약해지는 엘레노어에게는 즉효였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리안은 그대로 엘레노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서재로 연결된 침실로 향했다.

엘레노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리안은 초조한 기색으로 침대에 앉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와요.”

그는 머뭇거리는 엘레노어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몇 겹으로 놓여 있는 베개도 밀어내고 자신의 팔에 머리를 베게 한 후 엘레노어의 뺨을 어루만졌다.

은은히 들어오는 달빛에 그의 수려한 얼굴이 비쳤다.

늘 무표정한 얼굴은 기분 좋은 듯 미소가 만면했다.

엘레노어를 지분대다 다시 고조된 듯 다시 품에 꼭 안았다.

“잘 자요.”

리안은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곧 다시 입술이 다가왔다.

얼굴에 꼼꼼히 입을 맞추다가 다시 고조된 듯 엘레노어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이제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리안의 흥분이 전혀 가라앉지 않은 게 느껴졌다.

“자꾸 이러면 또 묶을 거예요.”

엘레노어의 말에 리안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입술을 겹치는 건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이러는 거 싫습니까?”

얼굴에 새털같이 닿는 입술은 부드럽고, 그때마다 찌릿한 느낌을 주었다.

심장이 뛰어 죽을 지경이었다. 엘레노어의 몸속에서도 겹쳐진 다리 사이에서도 뜨거운 불길이 일고 있었다.

“다 끝날 때까지는 안 돼요.”

에둘러 대답하자 리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위로는 아래로는 전진하고 싶은 손으로 하염없이 허리만 매만지며 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냥 다 때려 부수고 끝내고 싶다.”

뭔가 대단히 위험한 속마음이 들린 거 같은데.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남자라 그냥 들어 넘길 수 없었다.

“백작님?”

엘레노어가 다시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잘못 들었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이리 힘든 줄 그때 알았으면 그냥 그대로 들쳐 안고 도망쳤을 겁니다.”

리안의 말에 엘레노어는 쿡쿡 웃었다.

진짜 그게 차라리 더 쉬운 일처럼 느껴질 줄이야.

“이제 자요.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엘레노어는 먼저 눈을 감았다.

늦은 시간이고 누우면 바로 잠드는 체질인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은 세 번째 재판이 있는 날.

그렇게 중요한 일을 앞두고도 옆에 누운 남자만큼 마음을 뒤흔드는 게 없었다.

‘그땐 잘 잤는데.’

라 플로이드에서는 아무 경계심 없이 자 버렸는데.

묶지 않아서일까.

맞닿은 체온의 따뜻함이, 단단한 가슴의 감촉이 무척 신경 쓰였다.

잠들지 못하는데도 마음은 편안했다.

설렘을 즐기는 사이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리안은 그대로 그녀를 머금은 채 아주 살짝살짝 음미하며 떨어지지 않았다.

슬쩍슬쩍 아슬한 곳을 건드리고, 안타까운 듯 숨을 내쉬고, 다시 또 입술을 겹치는 리안의 행동을 모두 알았지만, 엘레노어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손길은 해 뜰 무렵 엘레노어가 옅은 잠에 들 때까지 이어졌다.

*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의 심야 역시 분주했다.

정확히는 한 사람만 그랬지만.

미나즈는 와인 잔을 든 채 안락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클로드에게 말을 걸었다.

“그거 오늘 다 읽고 잘 거야?”

두툼한 서류 뒤편에 앉아 있던 클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매일 읽어 놓고 아직도 파악할 게 남았어?”

“내일이 마지막이니까 한 번 더 확인할 생각입니다.”

하여튼 성실하기는.

미나즈가 쿡쿡 웃자 클로드가 눈썹을 들었다.

“왜 웃는 겁니까?”

“그냥. 어릴 때랑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싶어서.”

수도에서 클로드가 아카데미를 다닐 무렵 미나즈는 이제 막 가문을 이은 시기였다.

클로드는 로우앤 공작의 고명 아들이었는데 부친이 연로해 멀리서 학업을 수행하는 아들을 돌보기에는 너무나 쇠약했다.

두 가문의 친분이 깊었기 때문에 미나즈가 간간이 찾아가 그를 살피곤 했다.

“당신이야 말로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아, 미모가 여전하단 뜻인가?”

“…남이 일하는 옆에서 술 먹으며 놀려 대는 태평한 면이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가라고 쫓아내지 않는 점도 여전했다.

클로드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떨어뜨리려는데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에이브로트 공작님. 체펠린 궁정백이 찾아왔습니다.”

“체펠린이? 왜?”

“중요한 서신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심각해졌다.

체펠린이 직접 전달할 서신이라면 발신인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황제.’

이 중요한 재판 전날 황제가 대체무슨 일일까.

“왠지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데요.”

“동감이야. 자기들이 불리하니까 찾아오는 건가.”

두 번째 재판에서의 헛발질로 황녀측은 이쪽을 몰아세우는데 실패했다.

그래도 황가라는 위엄이 있어 아직 여론은 반반이지만, 내일은 이쪽이 공격할 차례.

그들은 모든 게 조작이었던 황녀측과 달리 근거도 증인도 충분했으므로 헛발질을 할 일이 없었다.

‘응해 줄 이유가 없지만..….

뭔가 또 협작을 부리려는 수작일 것이다.

미나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 볼 생각입니까?”

“그래. 속셈은 파악해 봐야지.”

클로드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일어서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의 거대한 성문 앞에 횃불이 대낮처럼 환히 밝혀져 있었다.

미나즈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 위에선 채로 체펠린을 맞았다.

“우리에게 오는 서신은 모두 막힌 줄 알았는데.”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체펠린의 말에 미나즈의 미간이 꿈 틀했다.

“미안하지만, 라인 오브 에이브로 트에 오는 우편을 검토할지 말지는 폐하의 허락 여부와 상관이 없네.”

미나즈는 말하면서 천천히 문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대로 체펠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체펠린은 공손히 그녀의 손으로 서신을 넘기며 고개를 조아렸다.

“검토하신 뒤 긴히 말씀드릴 일이…….”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미나즈가 받아 든 서신을 가로세로로 찢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건 이곳의 주인인 내가 정하는 거지.”

그녀는 갈기갈기 찢어진 황제의 친서를 흩뿌리며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직접해 보게, 체펠린 궁정백.”

종잇조각이 창백한 체펠린의 곁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