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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94화 (94/120)

제94화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공작 부인은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말투로 물었다.

“아, 네. 일이 있어서…….”

엘레노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등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내가 대체 왜 숨으라고 했지?’

그냥 얘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 나쁜 짓을 하던 것도 아닌데.

이래서야 들키면 더욱 수상해지고 만다.

‘으. 이제 와서 나오라고 할 수도 없고.’

갑자기 책상 밑에서 나오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고 해 봤자 신빙성이 없겠지.

“무슨 일이세요?”

“복도를 지나다 네가 아직 깨어 있는 거 같아서 노크해 봤다.”

다음에 밤늦게까지 안 잘 때는 문틈을 가리든가 해야겠다.

“많이 바쁜가 보구나. 이런 시간까지 일하다니.”

“아뇨, 하하. 그냥 중간 중간 한눈을 팔다 보니 늘어진걸요.”

“이제 잘 거니?”

“네, 일 좀 마무리하고 바로 자려고요.”

엘레노어를 바라보는 공작 부인의 눈빛에는 대견함이 가득 묻어났다.

마음은 감사했지만, 지금은 빨리 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엘레노어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을 더 할 거라면 잠시 이야기 좀 할까?”

“네?”

엘레노어는 놀라 토끼 눈을 떴으나 공작 부인은 안으로 들어섰다.

“방해하지 않으마. 그냥 여기 앉아서 지켜보겠다.”

영민하고 시원스러운 공작 부인과의 대화는 엘레노어의 즐거움 중 하나.

언제나 환영이었지만, 오늘만은 달갑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이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엘레노어는 하마터면 놀란 목소리를 낼 뻔했다.

아래에 있는 리안이 굽히고 있던 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자세를 바꾸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기사라도 몸이 대충 구겨진 자세로 오래 버티기는 힘들 테니 이해는 가지만…….

‘아, 간지러워.’

소리 내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는 건 좋은데 그 탓에 발목 부근에 있던 리안의 입술이 무릎으로 이동하는 궤적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풍성한 스커트 자락이 그의 넓은 어깨에 밀려 무릎까지 올라갔다.

드러난 피부에 직접 닿은 건 아니지만,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결에 몸을 떨 뻔했다.

“왜 그러니, 엘레노어?”

다가온 공작 부인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 엘레노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오,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무척 저리네요.”

“이런, 너무 무리하는구나.”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하, 하하.”

공작 부인은 엘레노어를 배려하듯 늘 앉는 소파 대신 책상 맞은편의 스툴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에 잔뜩 놓인 전표를 집어 이런저런 조언을 시작했다.

“이건 콜첸 상회에서 온 거로구나.

내가 거래하는 루트가 따로 있는데 중재해 줄까?”

“네? 그래 주시면 감… 사하..

죠.”

“이쪽 지역으로 책을 유통하려면 한셀 가문보다는 미르타 가문이 나을 거야.”

언제나 그렇듯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 이어졌다.

그러나 엘레노어는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대체 아래에서 어떻게 얽혀 있는 거야.’

힘겹게 오므리고 있는 무릎은 살짝만 움직여도 리안의 뺨이 닿았다.

한쪽 발은 반쯤 허공에 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뭔가에 부대낀 상태였다.

그대로 좀 더 버티면 정말 쥐가 날 것 같아 엘레노어는 발을 빼내려고 힘을 주었다.

“읏.”

엘레노어는 순간 들린 리안의 낮은 목소리에 흠칫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공작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얼핏 들은 모양이었다.

“크흠, 으흠 으흠. 목에 뭔가가 걸렸네요.”

황급히 헛기침하며 얼버무린 뒤 찻잔의 식어 빠진 차를 원샷했다.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내가… 어딜 누른 거지.’

팔과 몸 사이에 끼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발은 리안의 허벅지에 끼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거기서 발을 앞으로

앞으로 움직였으니…..

엘레노어는 생각을 멈추었다. 여기서 얼굴까지 빨개지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으아아. 어떻게 해….’

문제는 아직도 발이 대단히 난감한 곳에 있다는 거였다.

당장이라도 빼내고 싶었으나 리안은 호리호리한 겉보기와 달리 전신의 근육이 탄탄히 잡혀 있었다.

탄탄한 허벅지 근육에 물러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살짝 움직이자 리안이 움찔하더니 이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

아, 안 그래도 간지러워 죽겠는데.

긴 호흡에 민감한 무릎에 야릇한 감각이 번졌다.

몸이 떨리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숨소리를 무마하기 위해 다시 찻잔을 채웠다.

그러나 손이 덜덜거려 영 쉽지 않았다.

“내가 해 줄까?”

“앗, 아뇨.”

사양했지만, 공작 부인은 찻주전자를 넘겨받아 손수 따라 주었다.

최고의 집안 출신답게 다도를 배운 듯 무척 우아한 손놀림이었다.

“사실은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를 해 둬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는데.”

“네, 말씀하세요.”

“전에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리안과 둘만의 분위기에 빠지는 건 자중 하라고 했던 거 기억하느냐?”

공작 부인이 리안을 언급하자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발을 까딱 움직여버렸다.

이제 리안의 몸에서 대놓고 변화가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당황한 엘레노어가 발을 움츠리자 리안이 얼굴을 다리에 기댔다.

끔찍할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에 온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네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나는… 딱히 너희 사이를 방해 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말을 하는 거 같은데 하반신의 급박한 상황 때문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리안이 그녀의 발목을 쥐었기 때문이다.

‘헉!’

그는 엘레노어가 지금의 자세를 무척 불편해한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아니, 불편한 건 본인이 더 심할 것이다.

그녀의 발을 조심스레 때어 낸 뒤 팔로 받쳐 이동시키려 했지만, 다리를 둘 공간 따윈 없었다.

난처해하다가 그가 그녀의 다리를 어깨에 걸쳤다.

리안이 앉을 공간도 넓어지고, 자세는 엄청 편해졌지만, 엘레노어의 머릿속은 더욱 하얘졌다.

‘이 자세는 더 아닌 거 같은데.…!’

그녀의 무릎은 리안의 어깨에 걸쳐진 상태.

거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다른 쪽 다리와의 사이에 리안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리를 올리는 바람에 스커도 더욱 올라가 버렸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가로막은 데다 무척 어두워 뭔가 보이진 않겠지만, 이 자세는 너무 민망했다.

“네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지.”

현재 일어난 대참사를 모르는 공작부인의 눈빛은 아련하게 변했다.

“나는 리안이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까지만 함께 살았고, 그 후로는 정말 아주 가끔 만났을 뿐이야. 아직도 어린 모습이 생생한데 어느덧 이렇게 여인까지 데려오다니…….”

공작 부인의 감성에 젖은 눈을 보자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이런저런 마니악한 플레이를 해 버린 셈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그 소중한 아들을 결박하고, 책상 아래에 꿇어앉혀 발로 희롱했어요.

엘레노어는 속으로 공작 부인에게 마구 사과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리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치맛자락을 거머쥔 긴 손가락이 보였다.

묘하게 에로틱한 광경에 엘레노어는 뜨거워지려는 얼굴을 원위치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지나가야 할 산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내 기우인지 모르지만, 지금 자중해서 나쁠일은 없을 거야.”

“네, 맞는 말씀이세요.”

엘레노어는 동조하며 속으로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애원을 했다.

‘아, 이제 제발 더는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그러나 그 마음은 역시나 전해지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킨 듯 다리에 닿은 목울대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곧 그녀의 발목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리를 타고 스커트 자락이 만든 경계선까지 올라와 엘레노어의 허벅지 부근에 멈췄다.

가터벨트가 손가락에 걸린 것이다.

편안히 일하기 위해 불편한 스타킹은 벗어 버렸지만, 허리와 연결된 가터벨트는 자기 전에 풀려고 내버려 두었다.

리안이 그것을 손끝으로 쓸자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그저 내가 아닌 모두에게 인정받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면 좋겠구나.”

“네… 저는, 다 이해해요.”

그런데 아드님은 이해하지 않고 계신 거 같아요.

엘레노어는 손을 내려 리안의 머리에 얹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으려 했으나 머리카락을 파고든 손가락이 도리어 그를 자극한 듯했다.

“아.”

촉촉한 것이 허벅지에 닿았다.

부드럽게 머금는 감각에 감전된 것처럼 몸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참지 못하고 새어나온 소리에 공작부인이 눈썹을 들었다.

“왜 그러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실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지 않지만!

마음속에서 고함이 울렸으나 참는 수밖에 없었다.

리안의 입술이 조금 옆으로 움직이며 더욱 야릇하고 뭉클한 느낌이 번졌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니?”

“네. 괜찮아요. 그냥 조금 졸려서….”

엘레노어의 말에 공작 부인은 눈을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그렇군. 많이 늦었으니 이만 자야겠구나.”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 공작 부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방해되는 것 같으니 이만 가 보마. 무리하지 말고 자거라.”

공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레노어 역시 리안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드레스 자락이 쏟아져 드러나 있던 다리를 덮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공작 부인.”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공작 부인을 배웅한 뒤 엘레노어는 문을 닫자마자 즉시 걸어 잠갔다.

리안이 책상 아래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들킬 뻔했잖아요!”

엘레노어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책망했다.

굳이 책상 아래로 밀어 넣은 데다 자극한 책임이 있었으므로 강력하게 탓할 수는 없었다.

리안은 아무 변명도 없이 엘레노어에게로 다가왔다.

“들키기 전에 어서 방으로 돌아…

앗!”

엘레노어는 말을 맺을 수 없었다.

리안이 엘레노어를 가볍게 안아 들고 긴 의자에 눕혔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오랜만에 맞닿은 리안의 입술은 무척 뜨겁고 여느 때보다 훨씬 노골적이었다.

반쯤 내리뜬 보라색 눈은 이미 이성이 반쯤 날아가 버렸는지 흐릿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밀어내려 했으나 방금의 접촉으로 달아오른 것은 그 혼자만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뜨거워진 몸에 거친 키스는 지나치게 자극이 컸다.

힘이 빠진 손을 그의 어깨에 얹은 채 엘레노어는 그의 입술을 얼마간 받아들였다.

열띤 소리가 방 안에 울리고 몸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한참이 지나도 열기가 식기는커녕 도리어 손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소 아슬아슬한 곳까지 나아가자비로소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위험의 경종이 울렸다.

“백작님, 그만.”

힘껏 밀어내자 촉, 소리가 나며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이, 이러면 안 되잖아요. 방금 공작 부인이 하신 말씀 못 들으셨어요?”

“아무것도 안 들렸습니다.”

책상에 방음이 되는 것도 아닌데 바로 앞에서 한 말이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아마 들을 여유 같은 게 없었다는 뜻이겠지.

그의 눈빛이 여전히 위험해 보여 엘레노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작 부인과 약속했잖아요.”

“그래서… 정말 많이 참은 겁니다.”

리안이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알면 얼마나 참은 건지 알 겁니다.”

낮은 목소리에 숨이 막힐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그는 몸을 떼어 내지 않고 양팔로 책상 위를 짚은 채 엘레노어를 응시했다.

“엘레노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보라색 눈동자 가득, 이대로 그만 두기 싫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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