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체펠린은 재판을 마치고 곧장 황제와 함께 에오가이노스로 향했다.
그러나 황제가 이야기를 청한 이유를 들을 기회는 바로 오지 않았다.
트로인 회의 참석자들의 단체 방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재판을 계속 이어 가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프리차드 보르미아가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재판의 흐름은 벌써 좋지 않습니다. 로우앤 공작이 대놓고 저쪽 편을 들고 있는데 뭐 때문에 그런 장단에 맞춰 줘야 한단 말입니까.”
로우앤 공작이 저쪽 편인 건 사실이었으나 딱히 중립을 깬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일정을 위시해 지하 조사인 단을 황가가 지정한 인물들로 배정한 것은 명백한 황녀 측의 특혜였다.
그러나 황제를 둘러싼 트로인 회의 참석자들은 동조하듯 격렬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희는 황실을 능멸하는 무리를 단죄하시겠다는 지고한 뜻에 호응해 모인 것입니다. 드높은 황실의 명예가 실추되는 모습을 더는 보고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심지어 다음 재판은 간악한 에이드리언이 직접 나와 증언하고 그가 데려온 증인들이 황가를 공격할 차례입니다. 그러기 전에 치는 게 좋습니다.”
트로인 회의 구성원들은 이미 내전으로 방침을 굳힌 모양이었다.
아마 리카르도 후작과 보르미아 백작이 뒤에서 파벌을 조종해 여론을 통일시켰을 것이다.
‘이 평화로운 제국 땅에 굳이 피를 흩뿌릴 생각인가.’
체펠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암담하게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구체적인 계획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기습하는 게 옳을 듯싶습니다.”
다음 재판은 겨우 사흘 뒤.
만만한 상대도 아닌데 그사이에 모든 걸 완벽히 준비해서 기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체펠린도 입을 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팰리시티에 수많은 병력을 어떻게 잠입시킨단 말입니까? 저택에 접근하기도 전에 기습이 들통날 겁니다.”
“그러면 재판 중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집중하고 있을 때 단숨에 파고들어 일망타진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재판을 보러 모여든 수많은 민간인이 말려들게 됩니다.
칼라브리아 백작이 방심할 것 같지도 않지만, 방심하고 있다 해도 그가 보호하는 이들을 단번에 깔끔히 잡아 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소 피해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도 위험을 무릅쓰는 게 아닙니까?”
젊은 귀족 하나의 말에 체펠린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너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지만, 상관도 없는 백성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말려 죽어야만 한다는 거냐.’
그러나 다년간의 정치 경험은 체펠린이 공격적인 말을 아끼게 만들었다.
그는 대신 좀 더 우회적인 말투로 그들의 의견에 맞섰다.
“칼라브리아 백작은 아무 부상도 없이 단독으로 하크메르시아를 토벌했습니다. 제국 역사상 수많은 토벌대가 이루지 못한 일입니다. 지금 인원만으로는 그를 시가지 기습으로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인원이라면 칼라브리아 공작가에서 차출하면 될 게 아닙니까?”
포란체 리카르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집무실에 울렸다.
“아비에게 맡겨 아들의 죄를 책임지게 해야 합니다. 이런 시국에 칼라브리아 공작은 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체펠린의 말문이 멈추자 리카르도는 더욱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칼라브리아 공작가의 기사단 지휘권은 가주 부재 시에 황실로 넘어오도록 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비상시이니 마땅히 군권을 회수해 황실에서 이용해도 불평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부의 패권을 노리는 리카르도 후작은 이 기회에 칼라브리아 공작까지 실각시키는 게 목적일 터였다.
서로가 서로의 뒤통수를 치려고 눈치를 보고 있는 이들을 이끌고 내전이라니.
체펠린이 다시 응수하려는데 리카르도 후작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게다가 전쟁을 서둘러야 할 이유는 또 있지 않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황실에서는 수도에 집결시킨이 수많은 군대를 장기간 유지할 여력이 없을 텐데요.”
체펠린의 말문이 멈추고 주변 귀족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여력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 오?”
“플로이드 공작가에서 황가에 대한 대출을 더는 승인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이제 사방에서 채권에 대한 회수와 청구서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거기까지 알아낸 것인가.
체펠린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어렸다.
돈줄이 막혔다는 말에 귀족들은 크게 동요해 술렁이는 게 눈에 보일지경이었다.
“그러므로 전쟁을 서둘러야만 합니다. 속전속결로 끝내고 반역자의 가문에서 재산을 몰수하여 손해를 충당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즉시 대응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모든 화살은 황제에게로 돌아갔다.
황제는 양손을 얼굴 앞에 모은 채 무거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들의 병력을 팰리시티 주변으로 집결시켜 언제라도 진입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게.”
체펠린은 한숨을 내쉬고 리카르도 후작을 위시한 전쟁 찬성파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렇다면 바로 공격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야.”
황제의 딱 떨어지는 목소리에 체펠린은 암담히 내리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 가지 조사할 것이 있네. 그때까지 철저히 준비하며 대기하게.”
리카르도 후작과 보르미아 백작은 하지 못했나?”
수십 년간 사람의 발자취가 없었는데 너무나 깨끗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수상한 것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체펠린이 쓴웃음을 짓고 있자 황제가 불쑥 말했다.
“나는 황녀가 에이드리언을 잡아 손목을 잘랐다 해도 크게 탓하고 싶지 않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그 천사 같은 아이가 그랬다는 것을 믿지 못했고, 그래서 재판까지 벌였지만… 그 애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건 아마도 사실이겠지.”
그토록 황녀에게 맹목적이던 황제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인 듯했다.
드디어 황녀가 순진무구한 천사라는 믿음이 깨진 것인가.
충격적이면서도 반갑지만, 그걸 탓하지 않겠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애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보복은 당연하네.”
지하 깊숙한 곳에 지나는 이들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거는 수상한 마녀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지하의 기사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체펠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베아트릭스가 그저 변덕을 부려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봉인이 풀렸다면….”
황궁 지하에 있는 수많은 봉인들은 오직 황실의 피를 이은 이만 해제할 수 있었다.
황제가 흐린 말의 끝을 이해한 체펠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봉인을 해제하지 않고서야 안에 베아트릭스가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황제는 침중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사형을 앞둔 죄수를 두세 명 데리고 오게. 그리고 아일린이 모르도록 은밀히 지하로 내려가 감옥을 열어 보라고 한 뒤 무엇을 봤는지 확인해서 보고하도록.”
어째서 굳이 사형을 앞둔 죄수가필요한 것일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체펠린은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체펠린은 방을 나섰다.
*
늦은 저녁.
엘레노어는 방에 앉아 여러 가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확인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본업을 쉬고 있었으나 일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 표나 청구서, 그리고 정산서가 날아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인쇄소는 마리체 지방의 주요 수입원이었으므로 잠시 멈춰 둘수도 없었다.
게다가 책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연금술사의 등에 의지해 사각사각 깃펜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똑똑.
아주 희미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너무 작아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엘레노어는 일단 응답해 보았다.
“누구세요?”
“칼라브리아입니다.”
낮은 대답에 엘레노어는 심장이 쿵뛰었다.
그녀는 다소 황망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제 막 외출에서 돌아온 듯한 리안의 수려한 얼굴이 미소짓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태연하게 답하려 했는데 오래 잠잠히 있어서인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부탁하신 일이 잘 끝났다고 전하러 왔습니다.”
엘레노어는 리안에게 재판에서 증언한 마리체 남작의 피해자들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사주한 건 아니지만, 낭패를 본 황녀가 해코지할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부탁받은 리안은 그들을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로 직접 데리고 가 맡겨 두고 돌아온 것이다.
“정말 고마워요. 고생하셨네요.”
“아뇨,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리안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불이 켜져 있기에 혹시나 해서 찾아왔더니 깨어 있었군요.”
리안의 얼굴은 오히려 부탁을 받아서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말을 전한다는 핑계로 어떻게든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간단한 전언이므로 할 말이 끝났을 터지만, 리안은 머뭇거리며 돌아가지 않았다.
“저기….”
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다면, 잠시 차라도 마실까요.”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간.
차를 마시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스스로 말을 꺼내 놓고 이상한 걸 깨달은 듯 리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쩔쩔매는 기색이 귀여워서 엘레노어는 그의 고통을 덜어 주기로 했다.
“그래요. 들어오셔서 피해자들 상태는 어떤지, 에이브로트 공작님은 만나셨는지 얘기 들려주세요.”
“아, 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뭐가 고맙다는 거야.
엘레노어는 엉뚱하게 고개를 꾸벅숙이며 안으로 들어서는 리안을 보며 속으로 쿡쿡 웃었다.
“피해자들은 괜찮아 보이던가요?”
“마차에서는 의기소침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눈치더군요.”
그거야 의기소침이 아니라 당신의 마성 때문에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고 있었던 거겠지.
리안은 그녀가 오해하지 않도록 열심히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다행히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에서 떠날 때는 제게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꺄, 꺄 소리치며 다시 오라고 외치지는 않던가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멀리 떨어지면 용기가 샘솟는 법이지.
엘레노어는 쿡쿡 웃으며 다시 질문했다.
“에이브로트 공작님도 만났나요?”
“…공작님과는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딱딱한 어조를 볼 때 아무래도 또 미나즈가 리안에게 장난을 건 모양이었다.
무표정하고 알기 어려운 냉혈왕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이만큼큼속내를 읽기 쉽다니.
재미있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그리고 새벽 한 시 무렵.
“엘레노어? 아직 안 자니?”
노크 소리와 함께 들린 목소리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공작 부인이었다.
아마 문틈으로 샌 불빛을 본 듯했다.
“잠시 들어가마.”
이렇게 있다가 들키면 안 되는데.
순간 당황한 엘레노어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판단을 하고 말았다.
“백작님, 여기로 숨으세요!”
“네?”
리안은 의아한 듯했지만, 엘레노어가 끌어당기자 순순히 따라왔다.
그를 널찍한 책상 안쪽에 숨기고 엘레노어는 그 앞에 앉았다.
서두르는 바람에 드레스 자락이 거의 무릎까지 들렸다.
발목에 따뜻한 숨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방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