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클로드 로우앤 공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입안이 썼지만, 곁에 준비된 음료를 마시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불쾌했다.
그것은 지금 그의 앞에 서서 헛소리를 떠들어 대는 이델체 백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철저한 조사 결과 지하감옥에는 누구도 갇혀 있지 않았다.
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철저한 조사라니.
클로드는 법을 수호하는 것을 사명이자 천직으로 여겼고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가끔 몹시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저렇게 뻔뻔한 소리를 하는 녀석들의 머리통을 날려 주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황녀 전하의 결백을 전하께 무척이나 충성스러운 이델체 백작이 조사했으니 결과는 참으로 공정할 거라고 믿소.”
클로드의 비꼬는 말에 이델체 백작은 마시고 있던 찻잔에서 벌레를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된 지하 감옥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니.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할 말없소?”
“그, 그것은 근면한 기사들이 청소를 마다하지 않고 관리했기 때문입니다.”
회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아무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공정해야 할 재판관께서는 그 부분을 명확히 해 주시오!”
이델체 백작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주장했다.
사실 공작들은 지하 감옥 조사에 대해 별다른 기대가 없었으므로 그가 뭔가 더 헛소리를 떠들어 대기 전에 클로드는 빠르게 상황을 진행했다.
“조사 결과 보고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다음 증인은 앞으로 나오시오.”
엘레노어의 시어머니였던 도나테마리체가 꼿꼿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며칠 전 공작 부인이 망신을 줘서 쫓아 보냈다던데.”
바로 곁에 앉아 있던 미나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층 더 이를 갈고 있겠군.”
뭐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그녀가 할 일은 같았을 테지만 말이다.
황녀가 자신의 마지막 변론으로 선택한 전략은 철저한 인신공격이었다.
주요 증인들인 에이드리언, 비앙카스타, 엘레노어와 블레인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각종 악랄한 증언들이 이어졌다.
원래 평판이 바닥인 비앙카스타는 증인들로부터 거짓말쟁이에 범죄자라는 폭격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고, 에이드리언은 어린 시절 그의 장난에 시달리던 가정 교사가 등장해 폭언을 늘어놓았다.
또한, 황궁 관계자들에 의해 두 사람의 밀월 관계가 추잡스럽게 묘사되었으며 블레인 역시 낙하산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게 끔찍한 건, 보통 너무나도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거지.’
공개 재판이었으므로 배심원들은 여론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미리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해서 대책을 세워 두긴 했지만, 당장 오늘 귀가 썩어 버릴 것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성격이 비뚤어져 있었어요.
우리가 엘레노어 때문에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는지 모를 거예요.”
도나테 마리체는 엘레노어를 처음 보던 순간부터 시작해서 장장 수 시간에 걸쳐서 악담과 험담을 쏟아 내었다.
지나치게 길어서 청중들이 기진맥진해진 탓에 그녀의 차례가 끝나고 나자 잠시 휴정이 선언될 정도였다.
“헛소리를 듣느라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군. 이 끔찍한 재판이 어서 끝났으면 좋겠어.”
“가장 끔찍한 순서가 남아 있지만 말입니다.”
클로드의 말에 미나즈는 질색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감 속에서 곧 재판이 재개되었다.
“다음 증인은 마리체 영지에서 온 서포트 조합 회원들입니다.”
마리체 영지의 서포트 조합.
그것은 엘레노어가 마리체 남작의 피해자들을 후원하기 위해 만든 조합이었다.
그 조합의 회원이라는 것은 자연히 남작의 피해자라는 뜻이었다.
많게 봐도 이제 갓 스무 살 남짓이 되었을 어린 여인들이 증인석에 올라와 앉았다.
황녀 측 변호인인 모로델 자작에 의해 질문이 시작되었다.
“당신들은 마리체 영지에서 온 사람들이죠.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현재 평민으로 강등된 엘레노어, 전 엘레노어 마리체는 마리체 영지를 다스리던 마리체 남작의 부인이었죠. 그 마리체 남작의 인품에 대해 모두의 앞에서 증언하십시오.”
증언대에 선 여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곧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재판정에 울리기 시작했다.
“마리체 남작은 무척 나쁜 인물이었습니다. 영지에서 수도 없는 백성들을 추행했고, 또 폭력을 일삼거나 가혹한 세금을 물렸습니다. 우리가 성으로 끌려간 것은 일곱 살 때였습니다….”
이후로 차마 듣기 힘들 정도의 참 혹한 피해 증언이 이어졌다.
여인은 간신히 묻어 둔 기억을 헤집느라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황녀 쪽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증언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엘레노어는 왜 남작 부인이 됐습니까?”
“우리 영지에서 가장 예쁜 소녀였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자신이 남작에게 팔린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여인은 눈을 한 번 도로록 굴린 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은 가장 비싼 값에 팔려 왔고, 그래서 그냥 끌려온 우리들과는 다르다고 했어요. 남작 부인이 되면 모든 고생이 끝날 거라고도 했죠.”
*
멀리 탑 위에서 이 장면을 보고 듣던 엘레노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최악이군.
그녀에겐 빙의 전 엘레노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원작에서 전혀 언급이 없었고, 그녀가 빙의했을 때는 원래의 엘레노어를 아는 사람이 없는 환경으로 옮겨 온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으니 정말 마리체 남작에게 시집가는 걸 좋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도 또 내가 감당해야 하는 건가.’
빙의할 거라면 어디 좀 구김살 없는 부잣집 딸이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현재의 그녀는 사실 원래의 엘레노어와 완전히 딴 사람일 터였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된 인격은 물론이고, 외모마저도 그랬다.
타고난 이목구비가 본래 좋긴 했지만, 어딘지 푸석푸석하고 촌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지금의 백옥 같은 피부나 윤기가 흐르는 풍성한 머리카락, 세련된 아름다움, 그리고 뛰어난 몸매는 엘레노어가 철저히 관리해서 이루어 낸 것이었다.
문제는 남들이 보기에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신… 그런 말도 했나?”
스카이가 눈썹을 들어 올린 채 물었다.
바다색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은 비난보다는 흥미에 가까웠다.
‘내가 한 말이 아닌 것을 굳이 뒤집어쓸 필요는 없겠지.’
엘레노어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말이 아니에요.”
“그럼 저 여자는 거짓말을 하는 건가?”
“아마 그렇지도 않을 거예요.”
엘레노어는 그녀들이 거짓말을 지어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킬지 모른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웠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공작 부인, 그리고 공작들과 주변인들의 시선이 또다시 사나워진다고 생각하니 속이 갑갑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스카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런 말이 나오게 된 경위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아. 우리 중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한 것을 모르는 사람의 말에 뒤바꿀 정도로 줏대 없는 사람은 없다고.”
스카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엘레노어의 어깨를 두드렸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며 우쭐할 사람이었다면 우리 둘은 이런 탑에 앉아 있는 대신 페이드라에서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테지.”
장난 섞인 그의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스카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긴 손가락으로 확대경에 비친 공작 부인과 클로드, 미나즈의 얼굴을 가리켰다.
“저 얼굴들을 보라고. 아무 흔들림도 없으니까.”
그의 말대로 일행들은 그저 지긋지 긋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전혀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엘레노어는 이 상황의 원흉이 싫은 걸 넘어서 혐오스럽기까지했다.
“이것으로 엘레노어라는 여자가 얼마나 기회주의적이고 악랄한지 알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그런 악독한 범죄자와 기쁘게 결혼할 정도로 말이죠.”
겨우 그딴 얘기를 하기 위해 범죄피해자들을 불러 모은 건가.
엘레노어는 미간을 찌푸리며 재판정에 앉아 있는 황녀를 보았다.
그녀는 무척 안타까운 시선으로 증인석의 피해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이고 감탄했지만, 정말 대단하고도 가증스러운 연기였다.
“저런 추잡한 음해는 우리가 다음 재판에서 금방 뒤집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엘레노어는 스카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할 차례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저기… 그런데.”
증언석 구석에서 잔뜩 겁을 먹은 채 서 있기만 하던 소녀 하나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저희는 엘레노어 남작 부인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갑작스러운 말에 청중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우리가 농도 신분에서 벗어나 편하게 사는 것도, 팰리시티에 와서 교육을 받는 것도 다 남작 부인 덕이에요.”
“맞아요. 부인이 우리가 꿈을 이룰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증인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자 모로 델 자작이 표정을 휙 바꾸었다.
“그런 거야 책을 팔기 위해 이미지를 관리하던 게 아닙니까? 본보기로 몇 명에게 잘해 주는 척하면서..….”
“몇 명에게 그러는 게 아니에요.
피해를 봤다고 하면 묻지도 않고 바로 후원해 주시는걸요.”
“저도 그랬어요. 게다가 우리에게 잘해 주던 건 훨씬 전부터예요.”
“애초에 본인이 저지른 죄도 아닌데, 피해 입은 당신들이 안타까워서 뭐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말했어요.”
“헛간에 갇혀 있는 우리를 모두 풀어 주고, 본인 먹을 것도 나눠 줬어요. 저기 앉아 있는 남작 부인이 방해했는데도….”
증인들은 앞을 다투어 말을 늘어놓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도나테 마리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남작 부인 덕에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윤택하게 살고 있어요. 영지에는 워낙 피해자가 많아서 딱히 차별받고 사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도 이제 자립했으니 조합원으로서 다른 영지인들을 도울 생각이에요. 남작 부인이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게 하지 않아요.”
탑 안에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카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욕먹을 때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멀쩡하더니.…..”
그의 눈이 미소를 지은 채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칭찬하니까 울 거 같은 표정을 짓는 거야?”
그의 말대로 엘레노어는 입술을 꼭 다물고 붉게 물든 눈을 깜짝이고 있었다.
‘또 바보같이 착한 척하며 바닥에 돈을 뿌리고 있군. 그딴 짓을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지난 5년간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꿋꿋하게 피해자 지원 사업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피해자인 그녀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보답을 바란 건 아니었으나, 절대 마음이 열리지 않을 것 같던 피해자들이 진심을 알아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했다.
“눈물을 참는 여자가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스카이가 고급스러운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받아 들긴 했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빨개진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이 남의 사정 때문에 이런 자리에 불려 나와서 싫은 기억을 헤집어서는 안 돼.”
다시는 저런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황녀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한다.
엘레노어는 마음을 다시 한번 굳혔다.
*
“체펠린.”
체펠린은 조심스레 상석에 앉은 황제를 돌아보았다.
재판마다 깊은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던 그가 묘하게 멍하고 다른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네, 폐하.”
“이따 방으로 오게. 좀 상의할 것이 있네.”
체펠린은 고개를 조아린 뒤 물었다.
“황녀 전하도 모시겠습니까?”
황제는 황녀를 흘깃 본 뒤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눈동자는 드물게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