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두 번째 재판일의 날이 밝았다.
재판정에 입장할 수 없는 엘레노어는 이번에도 탑 위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칼라브리아 백작 없이 둘이 있는 건 오랜만이군.”
곁에 앉은 스카이가 엘레노어를 바라보며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 역시 재판정에 나갈 수 없었으므로 엘레노어와 함께 남은 것이다.
“둘이 있는 거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요.”
엘레노어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하자 스카이가 막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아아, 잘 듣고 있습니까?”
곧 베아트릭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오늘 잘 부탁합니다.”
스카이의 목소리는 드물게 싹싹했다.
주술사여서인지 그는 베아트릭스에게 커다란 흥미를 보였다.
학살자라는 사실은 원래 도덕심자체가 높지 않은 스카이에게는 그리 거리껴지는 사실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가 있는 곳을 알자 매일 찾아가서 이것저것 질문하고 여러 가지를 배우려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신경 쓰고 잘해 주었기 때문에 베아트릭스도 그에게 제법 호의적이었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놀아나라고.]
본능적으로 리안을 두려워하는 베아트릭스는 상대적으로 스카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 재판이 얼마나 중요한데 놀아나긴 뭘 놀아나요.”
엘레노어는 새침하게 딱 자르고는 곧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거기에는 그녀를 위해 플로이드공작 부인이 공수한 장치가 있었다.
먼 곳을 거대하게 비춰 볼 수 있는 연금술사의 망원경과 음성 증폭기는 현대의 물건처럼 신비했다.
“이 동그란 손잡이를 돌리면 소리가 들리는 거리를 조절할 수 있지.”
스카이는 몇 번 사용해 본 듯 능숙하게 장치를 다뤘다.
딱히 어려울 것은 없었으므로 엘레노어 역시 금방 사용법을 익혔다.
손잡이를 돌려가며 광장 주변의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스카이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별로 놀란 기색이 없군.”
“네?”
“이 장치들은 무척 희귀하지. 보통 사람은 평생 하나도 접해 보긴커녕 존재한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들이야. 그래서 처음 사용하게 되면 엄청나게 놀라거든.”
훨씬 복잡한 장치를 사용하던 현대에서 왔기에 별생각이 없었지만, 스카이에게는 너무 태연한 기색으로 만지는 게 이질적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요즘 너무 놀랄 일이 많아서 감각이 마비된 거겠지요.”
대강 얼버무리며 엘레노어는 음성증폭기를 내려놓았다.
다행히 스카이는 별 뜻 없이 꺼낸 말이었는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자, 그럼 재판까지 뭘 하고 시간을 보낼까.”
시작까지 30분가량 시간이 남아 있었다.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올 정도의 여유는 없는 시간.
생각할 게 많아 금방 갈 거라고 여겼지만, 스카이는 이 짧은 시간도 그냥 보낼 마음이 없는 듯했다.
“좋은 거 하기 딱 좋은 시간인데.”
스카이가 잘생긴 눈매를 찡긋하자 엘레노어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대놓고 싫어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 나라도 상처를 받는다고.”
싱글거리는 표정은 상처받긴커녕 즐거워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말이 나온 김에 그의 속내를 물어보기로 했다.
“정말 왜 그런 짓을 하신 거예요.”
“그런 짓?”
스카이는 천연덕스럽게 반문했지만, 엘레노어의 질문이 종속의 서약이야기라는 건 눈치챘을 터였다.
진지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내 실패를 용납하지 못해서라고 했잖아.”
“겨우 그런 이유로 그렇게 위험한 서약을 해 버렸다고요?”
“당신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서라는 설명으로 납득할 수 없나?”
“당신을 길게 알지는 않았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서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분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엘레노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아직도 그 정도로 진심인지 믿기가 무척 어렵기도 하고요.”
장난하는 듯한 태도와 가벼운 말투 때문일까.
이미 실제로 종속의 서약까지 했는데도 그의 말을 믿기가 어려웠다.
또 한편으로는 커다란 희생을 한 그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미안했다.
그래서 스카이가 인지 부조화를 해결해 주길 바랐다.
스카이는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더니 곧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지. 나도 스스로 이해가 안 가는 참이야.”
“이해가 안 간다고요?”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나답지 않은 행동이거든.”
스카이는 기다란 속눈썹을 드리우며 눈을 내리떴다.
“아무래도 그 백작의 바보 같은 열정이 전염되는 거 같아.”
그는 작게 중얼거린 뒤 눈을 깜빡이고 있는 엘레노어에게 물었다.
“아마 당신은 칼라브리아 백작이 당신을 구하기 위해 종속의 서약을 했다고 하면 의심 없이 사랑 때문이라고 믿었을 테지?”
“그건…”
부정하기 어려웠다.
말을 흐리는 엘레노어를 보고 스카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택에 있는 사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네. 칼라브리아 백작이 당신과 사랑에 빠진 후 무엇을 했나 알게 됐지.”
그가 블레인이나 공작 부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게 기억났다.
“운명의 밤. 미래가 보장된 황녀와의 결혼을 내팽개치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당신에게 갔다지? 그리고 미래가 없다고 거절당하자마자 바로 청혼을 결심했고.”
엘레노어는 아주 오랜만에 리안이 찾아왔던 밤을 떠올렸다.
완벽하게 성장한 그가 사람들을 가르며 다가오던 모습.
쑥스러운 듯 잦아들던 고백.
그리고 라 플로이드에서 함께 보낸 밤의 체온까지도 여전히 생생했다.
“이렇게 바보 같은 크기의 저택을 사들이고, 그 후에는 황제의 인정을 받기 위해 목숨을 걸고 토벌을 떠났지. 그사이 당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도 중요할 기사단을 모두 남기고 갔네.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괴물이 사는 지하로 아무 망설임없이 뛰어들었지.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자기 혀를 버리려고 했어.”
스카이의 울림에 리안의 행적이 하나하나 그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남의 일이었으면 그냥 멍청이라며 비웃고 넘어갔을 거야. 내 말은, 대체 누가 저렇게까지 하면서 연애를 하느냐고.”
아마 그렇겠지.
엘레노어도 동감했지만, 스카이의 말은 행동과 모순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공작님은 왜 그러신 건데요?”
지당한 지적을 받자 스카이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그렇게 엄청난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버리니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당신을 위해서만 움직이니까. 그러니까 나도 뭔가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네. 정말 좋아하면 이 정도는 할 수도 있지 않나생각해 버린 거지.”
“…그런 건 안 닮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당신조차 칼라브리아 백작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뭐든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야.”
솔직히 그랬다.
지하에 갇혔을 때도 리안이 알게 되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걸고 구하러 올 것이라 믿었다.
엘레노어가 아무 말 하지 못하자 스카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남자는 아카데미 시절이나 지금이나 나를 한계까지 분발하게 만드는군.”
스카이의 중얼거림에서 리안을 의식하는 감정이 묻어났다.
과거를 회상하듯 멍해진 그에게 엘레노어가 말했다.
“나를 위해 애써 준 건 정말 고맙지만, 그래도 다음에는 부디 이런 선택을 하지 마세요.”
엘레노어는 자신을 위해 그가 더 희생하지 않길 바랐으므로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스카이의 반격이 돌아왔다.
“그렇게 말하지만, 막상 당신도 그렇잖아.”
“제가 왜요?”
“나나 백작이 여기저기서 사랑을 고백해 댄 탓에 원래라면 하지 않을 고생 중인데. 혼자 감당하겠다고 지하로 자진해서 들어가고 말이야.”
뜨끔한 기색의 그녀에게 스카이가 계속 말을 쏟아 냈다.
“부당한 모함을 받아도 그저 받아들이고, 스스로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헐뜯고 책임을 묻는 걸 본 적이 없군.”
그렇게 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고 느꼈을 뿐이다.
“당신이 그런 여자니까 더 마음이 가게 되는 거야. 나도, 칼라브리아백작도.”
처음으로 스카이가 하는 말에서 진지한 감정이 느껴졌다.
바다색 눈동자에 담긴 열기에 심장이 쿵쿵 뛰어 엘레노어는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스카이는 속내를 내보인 게 어색한 듯 공연히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는 원래의 장난스런 말투로 돌아왔다.
“자, 이제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 모처럼 둘이 있는 설렘이나 즐기자고.”
“설렘이요?”
“그래. 나는 둘이 있어서 상당히 설레는 중이라네.”
믿으려고 해도 유들유들 웃는 얼굴을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여유가 넘치시는데요.”
“얼굴은 이래도 다른 곳은 상당히 여유가 없는데.”
다른 곳?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면 알 텐데, 제국이라 아쉽군.”
“제국이라 아쉽다고요?”
스카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엘레노어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페이드라에서는 내키는 대로 보여 줘도 불법이 아니거든.”
은근한 목소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런 말, 다른 남자가 했다면 확한 대 때려 줬을 텐데.
웃음이 나오는 자신이 놀라웠다.
‘얼굴을 너무 능숙하게 사용하네.”
미소 짓는 수려한 얼굴이 얄미워서 엘레노어는 한층 새침한 반응을 보였다.
“페이드라에 가지 않길 잘했다고 한결 더 생각하게 됐어요.”
“왜. 솔직하고 열정적이라 좋지 않나?”
“내가 원치 않는 소시지 페스티벌같은 건 사양할게요.”
엘레노어의 답변에 스카이가 드물게 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핫. 당신은 정말… 못 말리겠군.”
즐거워하는 얼굴은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입과 다르게 무척 해맑았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페이드라의 소시지는 아주 유명하니까.”
말하고 나서 스카이는 어쩐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끝내야 할 떡밥이지만, 엘레노어는 한 번 더 받아 보기로 했다.
“뭐가 유명한데요?”
“제국 것보다 훨씬 굵고 길고 먹음직스럽게 윤기가 흐르고, 한입 가득 물었을 때 탄력이 있지.”
그러니까 뭐냐고, 그 의기양양한 표정은.
엘레노어는 예쁜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내밀었다.
“제국 거로도 충분해요. 더 크면 먹다 죽겠어요.”
그냥 소시지 얘기를 하는 건데 스카이는 어깨를 떨어 가며 웃었다.
“최소한 작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쳇. 불공평하군.”
스카이의 중얼거림에 엘레노어도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꾹 눌러 참으며 그녀는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잡담을 하는 사이 시간이 제법 지나 재판정에 귀족 배심원들이 하나둘씩 착석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시작하려나 봐요.”
“그렇네. 그러면 어디 한번 발악을 볼까.”
스카이는 가볍게 말했지만, 엘레노어는 긴장해서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은 두 번째 재판.
제국의 방식에 따르면 제소당한 가해자가 스스로를 공개 변론하는 날이었다.
가해자 측의 증인, 그리고 가해자 측의 호소만 나오므로 오늘은 황녀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
싫은 하루가 되겠지만, 철저히 봐두어야 최종 재판에서 뒤집을 수 있을 터였다.
황녀는 많은 준비를 했는지 증인 석에 상당히 많은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사람을 보고 스카이가 입을 둥글게 모았다.
“오. 낯익은 게스트가 등장했군.”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등장한 것은 도나테 마리체였다.
“아무래도 당신을 인신공격해서 신빙성을 떨어뜨릴 속셈이로군.”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다면 메신 저를 공격하라.
저열하지만 이런 배심원제 재판에서는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분명 엘레노어뿐만 아니라 에이드리언, 그리고 블레인 등도 깎아내려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였다.
그러나….
“아니, 저 사람들은 대체 왜……!”
이어서 등장한 이들을 본 엘레노어의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