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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90화 (90/120)

제90화

엘레노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래를 내려 보았다.

널찍한 침대 위에는 눈을 내리 감은 중년 남자가 누워 있었다.

평소에는 늘 완벽하게 빗어 넘겼을 것 같은 색이 옅은 금발.

연령에 비해 깨끗한 피부와 유독주름이 깊이 잡힌 미간.

꽤 섬세하고 윤곽이 또렷한 얼굴이 어서 젊었을 때는 잘생겼었다는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은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현대라면 미중년 영화배우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분위기 있는 얼굴.

그러나 엘레노어는 달갑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 사람은 그간 그녀를 처리하려고 안달을 내던 상대인 것이다.

‘첫 만남이 이런 상태일 줄은 몰랐네.’

엘레노어는 칼라브리아 공작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뒤를 돌아보니 방 안의 인물들 표정은 그야말로 제각각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공작 부인과 언제나처럼 담담한 얼굴의 리안.

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는 스카이가 있었다.

“결투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군.”

공작 부인에게서 푸념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칼라브리아 공작의 결투장이 들려 있었다.

“정말 싸울 생각으로 신청한 거였나?”

공작 부인의 질문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검으로 딱 한 합을 교환한 후 검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럼 죽을 작정으로 보냈단 말이야?”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딜 다친 거지? 왜 깨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냥 기절시켰을 뿐입니다. 아마 다친 곳은 없을 겁니다.”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상대를 상처하나 없이 기절시켰다니.

어지간한 실력 차이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안의 말을 들은 공작 부인은 미간을 더욱 좁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까지 봐줬다는 걸 알면 눈을 뜨자마자 도로 감으려고 하겠군.”

낮게 푸념을 늘어놓은 공작 부인은 무거워진 리안의 표정을 보고 금방 덧붙였다.

“뭐, 잘된 셈이야. 이 사람도 자신이 틀릴 수 있고 상대보다 약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리안이 침대 곁에 서 있는 엘레노어에게 다가왔다.

“엘레노어. 잠깐 괜찮습니까?”

“네?”

“잠깐 나눈 대화에서 느껴진 뉘앙스로는 아버지께서도 원해서 결투하는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좀 확인하고 싶습니다.”

리안은 설명하며 엘레노어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가 손가락에서 스트링스톤을 뽑아 들자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공작까지 서약을……?’

그녀는 잔뜩 긴장하며 귀추를 지켜보았다.

리안은 스트링스톤을 손가락에 끼운 뒤 공작에게 다가가 뺨에 손을 얹었다.

“어떤가요?”

엘레노어의 불안한 물음에 리안이 나직하게 답했다.

“붉은 선이 나타났습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는 선을 따라가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말할 것도 없는 북쪽. 황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잠깐 실례.”

스카이가 다가와 엘레노어의 다른 손가락에서 마킹 스톤을 뽑았다.

그리고 칼라브리아 공작에게 다가가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제발 상반신에 있으면 좋겠군.”

얼굴과 목덜미 등을 살핀 뒤 셔츠단추를 풀어 내려가며 남긴 말이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다행히 스카이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여기 있군.”

스카이가 공작의 왼쪽 가슴 위 부근을 짚으며 말했다.

세 사람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정언의 서약이야.”

엘레노어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종속의 서약이 아닌 것만으로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약 내용이 뭔지는 알 수 없는 거죠?”

“응. 깨워서 물어봐야 해.”

“언제쯤 깨어날까?”

공작 부인은 바로 깨워서 물어보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스카이가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에는 이대로 재워 두는 게 나을 겁니다.”

“어째서죠, 페이드라 공작?”

“정언의 서약은 서약자의 심리가 많은 영향을 끼치는 서약입니다. 자신이 어겼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그때 서약의 제재가 시작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죠?”

스카이가 마킹 스톤을 벗어 엘레노어에게 건네주며 설명했다.

“칼라브리아 백작이 누군가를 평생 사랑하겠다고 정언의 서약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동시에 몹시 심한 가학 취향이라서 매일 상대방을 때리는 겁니다. 그런 짓을 하면 시전자는 괴롭고 사랑도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서약자가 그것을 사랑이라 믿는 이상 정언의 서약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리안은 개인감정과 견제가 들어간 듯한 스카이의 예시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서약은 아무런 효력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선 일이 일단락될 때까지는 이렇게 재워 두는 게 낫습니다. 일어나서 죄책감이라도 느끼면 골치가 아파지니까요.”

그의 설명에 공작 부인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안전하게 재워 둘 방법이 있나요?”

“제가 말하는 약재를 구해다 주십시오. 방에서 향을 피우는 것만으로 가능합니다.”

스카이는 책상으로 가서 종이에 글을 적은 뒤 공작 부인에게 건넸다.

그리고 엘레노어에게 다가오더니 가느다란 목소리를 냈다.

“아, 역시 공작님이 오시니까 너무 의지가 되네. 정말 멋져.”

꾸며낸 듯한 여자 말투가 제법 그럴 듯했다.

엘레노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뾰로 통한 어조로 물었다.

“…그게 뭐예요?”

“당신 마음속의 소리.”

하여튼 능청은.

엘레노어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으나 스카이는 의기양양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리안을 향해 말했다.

“미리 점수를 많이 따 두셨기 바랍니다. 곧 뒤집힐 거 같으니까.”

스카이의 도발 섞인 말에 리안이 딱딱하게 답했다.

“이건 점수 따기 게임이 아닙니다만.”

“지고 있는 사람이 항상 그렇게 말하더군요.”

두 사람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두 분 다 그쯤 해 두세요!”

엘레노어가 한 소리를 던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아침에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로 떠났던 헤르혼이었다.

“에이브로트 공작 전하와 로우앤공작 전하가 도착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일라이는 가는 도중 엇갈린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환기될 계기를 찾은 엘레노어가 곧장 말했다.

“그럼 일단 다 같이 얘기하도록 하죠.”

그렇게 네 사람은 응접실로 이동을 시작했다.

리안과 스카이가 앞장서고 엘레노어는 공작 부인과 조금 뒤처져 걸었다.

“많이 걱정되세요?

엘레노어는 평소보다 표정이 어두운 공작 부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 저 양반과 결혼하고 나서 내게 남은 거라곤 할머니와의 연회뿐이었는데.”

공작 부인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한 뒤 앞쪽을 눈짓했다.

“나와 달리 그대는 남자 복이 많은 것 같군.”

앞서 걸어가는 두 남자의 넓은 어깨를 바라보며 공작 부인이 중얼거렸다.

저 두 사람과 얽히면서 시작된 인생의 수난을 생각하면 복잡한 심정이었으나 엘레노어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뭐 그럴지도요.”

*

“엘레노어!”

응접실에 들어서자 곧 미나즈의 활달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엘레노어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지요. 오시는데 문제는 없었나요?”

“뭐 몰래 온 거니까 그다지… 어?

페이드라 공작?”

스카이를 발견한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갑습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여기 있어요?”

“좀 같이 일하게 됐습니다.”

클로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미나즈의 관심은 즉시 옮겨가 버렸다.

“아, 칼라브리아 백작이다.”

미나즈는 히죽히죽 웃으며 물었다.

“아픈 덴 갠차나여? 다 나아떠여?”

리안의 잘생긴 얼굴이 움찔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

스카이를 의식한 듯 근엄한 목소리였지만, 미나즈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듯했다.

“에이, 아쉽다. 혀 짧은 발음일 때가 귀여웠는데.”

아쉬워하는 그녀의 말에 스카이가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호오. 뭔가 혀 짧은 소리도 내셨나 봅니다.”

“..…부상이 심했을 뿐입니다.”

리안은 낮게 말한 뒤 화제를 자신에게서 돌리려 했다.

“슬슬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라써여, 시작해여.”

미나즈가 리안을 마지막까지 한 번 더 긁고 나서 모두 테이블로 향했다.

“이 면면이 모여서 함께 일하는 건가.”

원탁에 둘러앉자 미나즈는 좌중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캬, 하나같이 쟁쟁하고 눈이 부시군. 엘레노어의 표현에 따르면 K5인가.”

미나즈가 자신의 작품 ‘꽃보다 기사님’에 나오는 표현을 언급하자 엘레노어는 흠칫했다.

올해 나온 신작인데 공작님까지 읽었나?

당황한 그녀를 보고 미나즈가 웃으며 말했다.

“아아, 안에 갇혀 있느라 꽤 한가 했거든. 공작 부인이 강력 추천하시기에.”

공작 부인은 ‘내가 그랬지.‘하는 표정으로 뿌듯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우린 공작이니 DS로 하지.”

공작 부인마저 근엄한 목소리로 동조하자 미나즈는 몹시 즐거운 기색이었다.

“꽤 재밌던데. 클로드까지 푹 빠져서 읽었다고.”

“시간을 때우기 좋았을 뿐입니다.”

화살이 돌아오자 클로드는 딱딱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리고 우린 여섯 명이니까 D6입니다.”

“아냐. 엘레노어는 주인공이라고.

여자 주인공.”

“…이제 됐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자고요!”

또다시 삼천포로 흘러간 화제를 엘레노어가 힘겹게 잡아 돌렸다.

그렇게 제국 역사상 가장 가벼운 분위기에서 반역 모의가 시작되었다.

“우선적으로 논의해야 할 건 모레있을 재판 이야기겠지.”

공작 부인이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말대로 현재 황녀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판에 이기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간단히 개요만 읊고 넘기지 않을 테니 준비에 대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처음에 논의했던 부분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서로 영역을 나눠 분담했으므로 그들은 현재 진척 상황에 대해서 정보 교환을 시작했다.

“스트링스톤 수급은 어떻게 됐지?”

“순조로워요. 내일 모레까지는 원하던 개수를 채울 수 있을 거예요.”

엘레노어의 대답에 미나즈가 혀를 내둘렀다.

“그 비싼 걸 대량으로 구하다니.

정말 플로이드 공작가의 유통망은 믿을 수가 없네.”

“당일에 참석할 귀빈들에게 배포하는 건 보르미아 공작 전하께서 맡아 주시기로 했어요.”

“좋은 방법입니다. 그분은 신뢰를 얻고 있으니까요.”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카이가 입을 열었다.

“잠시 질문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가장 어른인 공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질문을 던졌다.

“그 스트링스톤은 무슨 용도로 배포하는 겁니까?”

“우리가 지하에 갇혀 있을 때 감시하던 기사들은 모두 종속의 서약을 당한 자들이었어요. 황녀가 그들 중 몇 명을 대동하고 나타날 거고 사람들이 그들에게 나타난 붉은 선을 보게 만들 계획이에요.”

금지된 주술을 마구 남발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황녀의 실체를 보여 줄 수 있는 비장의 한 수였다.

“…이 타이밍에 이곳에 오다니. 정말 하늘이 도왔군.”

스카이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은 스케일의 작전이지만, 그건 불가능해.”

“네? 어째서죠?”

“그 붉은 선들은 황녀에게 향하지 않을 테니까.”

재판 이틀 전,

모두의 준비를 뒤엎는 스카이의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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