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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89화 (89/120)

제89화

스카이는 보통 노동자들이 입고 다니는 잿빛 셔츠를 입고 그 위에 후드를 감은 모습이었다.

완전히 서민적인 복장에 얼굴까지 반쯤 가린 상태였지만, 홀 안의 몇 명 되지 않는 여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매끄러운 흑발과 선명한 바다색 눈동자의 깊은 눈매.

넓은 어깨와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탄탄한 팔.

그것만으로도 여자들의 마음을 녹이기 충분한 모양이었다.

원래부터 주목받고 있던 엘레노어 앞에 그가 앉자 홀 안 모두가 이곳을 의식하고 있는 눈치였다.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엘레노어는 스카이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네. 남자를 찾으러 왔어요.”

그녀의 대답에 순간 주변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먼저 말을 걸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기색이었으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스카이를 흘깃 보고는 곧 하나같이 패배한 표정으로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그러면 같이 내 방으로 올라갈까?”

스카이는 한술 더 떠서 가벼운 어조로 권유했다.

어쩐지 얄미웠지만,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 터였다.

바 앞으로 간 제니트 쪽을 흘깃확인하니 그는 이미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휙 사라졌다.

“좋아요. 데려가 줘요.”

남자들 몇 명이 맥주를 뿜는 모습이 보였다.

스카이는 멋진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엘레노어에게 팔을 내밀었다.

둘은 서로 팔짱을 낀 채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스카이는 걸을 때마다 끼익 소리가 나는 나무 복도를 지나 구석방으로 엘레노어를 데려갔다. 묘하게 아늑했던 홀처럼 제법 고풍스러운 방이었다.

제니트는 이미 올라와 창가에 서 있었다.

“뭐예요, 그 오해 사는 말투는.”

문이 닫히자마자 엘레노어가 투덜거렸다.

“홀에서 제일 멋진 여자와 걸어 나오는 기분이 어떤 건지 궁금해서.”

수도 없이 해 봤을 거면서.

엘레노어는 능청을 떠는 스카이를 살짝 밀어내고 방 안의 긴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내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았는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묻고 싶지만…

시간 낭비겠지.”

갑작스러운 방문임에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는 여유로운 태도를 보면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 같았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후드를 벗어 의자에 걸치며 물었다.

“제니트가 전부 말했나?”

“그래요.”

“그럼 여기 온 목적은…….”

“당신을 데리러 왔어요.”

스카이가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나를 데리고 나가려면 맨입으로는 안 되는데, 홀에서 가장 멋진 남자는 엉덩이가 무겁거든.”

“이 상황에 몸값 협상을 하는 건가요?”

“나는 당장 죽을 상황에도 어떻게 하면 시체를 비싸게 팔지 고민할 거야.”

“…원하는 게 뭔데요?”

일부러 말을 끄는 듯한 스카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글쎄. 우선 키스 정도로 해 둘까.”

스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하기가 무섭게 방 안에 검은 그림자가 휙 나타났다.

“이런.”

한 발짝 물러선 스카이는 엘레노어와의 사이를 가로막고 선 남자의 유려한 얼굴을 보고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일행이 있었나, 아가씨.”

짐짓 태연하게 답했으나 드물게 놀란 기색이었다.

그조차도 다른 누군가가 방 안에 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다.

하긴 리안이 은신하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이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엘레노어조차도 나타나는 순간 흠칫했을 정도였으니까.

“적당히 해 두시죠.”

리안의 목소리는 엘레노어가 아닌 사람을 대할 때 늘 그렇듯 건조했다.

그걸 들은 스카이가 미간을 좁혔다.

“음?”

그는 리안이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도 놀란 기색이었다.

“어떻게 말을 하는 거지? 혀에 각인이 있었던 거 아니었나?”

그의 혼잣말을 들은 엘레노어가 차분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스카이에게서 반쯤 장난스럽던 태도가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만이 남았다.

“살갗을 도려내야 한다고 들었는데 단지 피부만 벗겨도 되는 거였다니.”

흥미를 느낀 듯 그의 바다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는 무표정하게 서 있는 리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느 정도 벗겼습니까? 아니, 직접 보는 게 낫겠군.”

자문자답한 뒤 스카이는 대뜸 리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잠깐 실례.”

그는 리안을 연금술사의 등이 붙어 있는 벽에 기대게 한 뒤 손가락으로 입술을 조금 벌리고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리안은 싫은 표정이었으나 서약의 해제를 위한 연구라 여겼는지 가만히 있었다.

“음. 거의 상하지 않았나.”

“약을 발라서 마니 나은 곰미다.”

스카이의 손가락 때문에 리안이 잠시 그때의 발음으로 돌아갔다.

“그렇다 해도 거의 표면만 벗겨진 수준이로군요. 아주 흥미롭습니다.”

아무래도 서약에서 벗어날 생각보다 주술사로서의 순수한 연구심이 샘솟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호기심을 충족하는 사이 엘레노어는 뒤에 멀뚱히 앉은 채 두 사람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뭔가 묘한 장면이네.’

잘생긴 남자가 잘생긴 남자를 벽에 밀어붙여 밀착한 뒤 입술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혀를 살피고 있다니.

보라색 눈동자를 난감한 듯 돌린채 미간을 찌푸린 리안과 닿을 듯 말 듯 아슬한 곳까지 얼굴을 가져간 스카이의 투샷은 저게 대체 뭐냐 싶으면서도 묘하게 눈이 호강하는 듯했다.

스카이는 한참 동안 몇몇 마니아들이 열광할 듯한 장면을 연출하고 나서야 리안에게서 물러섰다.

“후. 이런 정도라면 그때 내 각인도 벗겨 낼 수 있었겠군. 아쉽게 됐어.”

스카이의 중얼거림에 엘레노어가 물었다.

“그럴 기회가 있었나요?”

“황녀를 잠재웠을 때… 하지만 내 것은 제거하기에 좀 더 위험한 부위에 있어서.”

리안을 안에 들여보내던 밤 이미 스카이도 종속의 서약을 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그때가 함께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엘레노어가 아쉬움에 물었다.

“왜 위험한 곳에 각인을 새기셨어요.”

“불가항력이었다고. 위치는 상대가지정하는 거야.”

그렇다면 황녀의 인품을 볼 때 여간해서는 지우기 어려울 곳에 새겼을 것이다.

리안은 아주 어렸을 때 서약한 게 다행이었다.

“어디에 있는데요? 보여 줘요.”

“보고 싶나?”

어디 있는지 알아야 대책을 세우기 쉬울 것이다.

마킹 스톤도 끼고 있었으므로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스카이의 얼굴에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관객이 조금 많군.”

“뭐 어때요. 감출 거 있나요?”

“속옷을 내려야 해서 말이지.”

속옷을 내려야 한다고?

엘레노어는 얼굴을 좀 붉히며 입을 떡 벌렸다.

“나는 남자들 앞에서 속옷을 벗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느물거리는 스카이에게 엘레노어가 반쯤 외치듯 물었다.

“그럼 설마 거기에 새긴 거예요?”

너무나도 노골적인 질문에 스카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다행히 그런 신세는 면했지.

그 부근을 줄곧 힐긋거려서 무척 긴장했지만, 마지막에 약간 빗겨서 가리키더군.”

아무래도 황녀는 순수한 소녀 이미지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위선이 모처럼 좋은 쪽으로 작용한 셈이었다.

“하지만 아주 아슬아슬한 곳에 있어. 꽤 섹시한 느낌인데, 보겠나?”

엘레노어가 쏘아붙이기도 전에 낮게 깔린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쯤 하지 않으면 즉시 도려내 버리겠습니다.”

리안이 조금만 더 집적대면 각인뿐만 아니라 중요 부위까지 몽땅 도려 낼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는 방 안에 제법 많은 의자를 두고 굳이 엘레노어가 앉아 있는 의자로 다가와서 스카이를 가로막듯 앉았다.

스카이는 그런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데 왜 그렇게 태평한 거예요.”

“음, 글쎄. 당신을 보고 있으니 뭐든 잘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혹시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한 건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

워낙 뭐든 꿰뚫어 보는 듯한 그였기에 던진 질문이었으나 스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그땐 제법 절박했다고.”

짐짓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간 겪은 고뇌가 다소 묻어나는 말투였다.

‘그때’라는 말에 일순 그가 마지막에 했던 키스를 떠올린 엘레노어는 왠지 뜨끔했다.

“우선 이곳에서 시간을 끌지 말고 안전한 곳으로 가요. 거기서 다시 대책을 강구하도록 해요.”

“나를 데려가면 금방 황녀에게 드러날 텐데.”

스카이도 스트링스톤으로 황녀에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우리가 지금 황녀와 돈독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엘레노어의 말에 스카이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는 바다색 눈을 들어 슬쩍 제니 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부디 그렇게 해 주십시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제니트가 입을 열었다.

잘 모르는 사이인 엘레노어조차 움찔할 정도로 절절한 음성이었다.

스카이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또 가출하지 않게 하려면 주인 노릇을 좀 해야겠군.”

의미 불명이었지만, 수락인 것처럼 들렸다.

엘레노어는 지체 없이 일어서며 모두를 재촉했다.

“그럼 바로 가요. 바깥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어요.”

“마차라니. 황송한 에스코트로군.”

만에 하나 황녀의 시선이 닿을까봐 준비한 거란 걸 알면서 스카이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주 간단한 짐만을 챙긴 채 네 사람은 ‘수선공의 집을 나섰다.

건물 뒤에 세워진 마차의 창문은 빈틈 하나 없이 가려져 있었다.

“절륜함을 선보이기에 적절한 형태네.”

먼저 올라탄 스카이가 엘레노어가 탈 수 있도록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손색이 없거든.”

일부러 리안을 도발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제국 최고의 기사는 이쪽 방면으로는 면역이 낮았다.

“당신이 마차를 모십시오.”

리안은 즉시 제니트에게 고삐를 넘기고 마차에 올라탔다.

엘레노어의 곁에 수호 석상처럼 지키고 앉은 채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리안을 보며 스카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일이 잘 해결돼도 다른 이유로 죽을 수도 있겠군.”

*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에 이 쪽지를 전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리안은 일라 이에게 명했다.

황실 근위대에게 눈치 채이지 않고 침입할 수 있는 최정예 기사가 생긴 후로 매를 이용할 때보다 교신이 훨씬 원활해졌다.

보통 좀 더 베테랑인 헤르혼이 교신 담당이었으나 아침에 보낸 탓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일라이는 머리를 숙여 보인 뒤 곧 사라져 버렸다.

“우선 들어가서 공작님을 방으로 안내하고 티룸에서 모일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무 일 없이 마차에서 내렸지만, 리안은 견제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세 사람의 결정은 홀로 들어서자마자 방해를 받았다.

“네 아버지와 칼부림을 벌였다는 얘기를 내게 언제쯤 하려고 했지?”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리안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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