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떠나기 전 제니트가 묶여 있던 팔다리를 회복하고 가볍게 식사를 하는 사이 엘레노어는 별관을 나와 본관 홀에 들어섰다.
중요한 사안이니 이야기를 전달하고 나가야만 했다.
빠른 속도로 복도를 가로지르던 그녀는 목적지에 가기도 전에 만나고자 하던 사람을 발견했다.
리안은 비하인드 나이츠의 또다른 부관인 헤르혼과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전하고 오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마침 대화가 끝난 듯 헤르혼이 물러갔으므로 엘레노어가 커다란 목소리로 리안을 불렀다.
“칼라브리아 백작님!”
엘레노어의 목소리를 들은 리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그렇긴 했지만, 수려한 얼굴에 유독 환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찾고 있었어요.”
“저도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리안이 곧장 뭔가 말하려 했으나 엘레노어가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중요한 일이니 제 얘기를 먼저 들어 주세요.”
리안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이 내 뭔가 깨달은 것처럼 잘생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난 준비돼 있으니 무슨 말이든 해보십시오.”
어쩐지 비장한 태도였다.
의아했으나 일단 접어 두고 엘레노어는 스카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종속의 서약을 했다는 말을 들은 리안은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
“알겠습니다. 그의 신세를 졌으니 보답해야겠지요.”
리안은 복잡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망설임 없이 선뜻 그렇게 말했다.
“네. 그러니 바로 다녀올게요.”
“직접 가는 겁니까?”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안이 바로 반대했다.
“혼자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럼 같이 가자는 건가?
엘레노어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리안이랑 스카이랑 셋이서 동시에 만난 적이 있던가?
잘 기억을 되짚어 보았으나 그런 적은 없는 듯했다.
어쩐지 어색할 것 같아 껄끄러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뭐 괜찮겠지.’
스카이는 리안의 서약을 해제해 주었고, 리안도 그의 제안을 수락했으니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마주칠지 모르니 강한 리안과 함께 가는 건 큰 힘이 된다.
“그럼 함께 가요.”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리안의 검을 가지러 2층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리안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발길을 멈췄다.
“아뇨. 생각해 보니 제가 혼자 다녀오는 게 좋겠습니다.”
“네? 어째서요?”
“지금 당신은 쉬어야 하니까.”
엘레노어는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런 비상시국에 혼자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으라니?
“아직도 저를 모르시네요.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할 일을 떠넘기고 가만히 기다리는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전혀 아닙니다만, 지금은 조심해야 하니까요.”
“조심이요?”
엘레노어는 눈을 깜빡였다.
‘황녀가 노리고 있어서 그러는 걸까?’
그런 거라면 백작님과 함께 가면 안전할 텐데.
“처음이니 잘 모르지만, 무척 조심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가 또 처음이라는 거야.
“아, 그리고 아까 일은 사과하겠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런 일을 하러 가면서 그때의 당신에게 말을 거는 게 위선처럼 느껴져서….”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빨리 가야만 하는데 리안에게서 계속 의미 모를 말들이 흘러나왔다.
엘레노어의 얼굴 옆으로 물음표가 잔뜩 떠올랐으나 리안은 보지 못하는 듯했다.
“갑작스럽고 조금 빠른 감이 있지만, 나는 무척 기쁩니다. 엘레노어.”
그의 뺨은 다소 상기되어 있고 보라색 눈동자는 정말 기쁨으로 가득했다.
들뜬 그의 얼굴은 황홀할 정도로 예뻤지만,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부족하지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 말에 엘레노어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제야 제니트의 등장과 스카이의 서약으로 인해 머릿속에서 날아갔던 임신 소동이 떠올랐다.
“나는 검술을 가르치고 싶지만,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곳은 너무 번화가니까 외곽에 또 다른 저택을 사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이미 리안은 학군을 위해 이사 갈준비까지 마친 듯했다.
엘레노어는 더 삼천포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에요. 백작님.”
너무 급히 부정하느라 말조차도 꼬여서 흘러나왔다.
“미안하지만, 틀렸어요. 백작님은 아버지가 되지 않는다고요.”
그 말을 듣자 환했던 리안이 멈칫했다.
“뭐라고요?”
그의 표정이 굳더니 서서히 어둡게 변했다.
눈에 가득하던 생기가 흑화하듯 사라지는 걸 보면서 엘레노어는 당황했다.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나? 이렇게 크게 실망을 하다니.
엄청나게 상심한 것처럼 보이는 리안에게 할 말을 조심스레 고르는 때였다.
“그러면… 내 아이가 아닌 겁니까?”
아니,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가!
“설마 페이드라 공작의 아이입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 어디선가 꺅소리가 들렸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복도 구석구석과 기둥 뒤에 메이드들이 모여들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런 데서 임신 같은 민감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엘레노어는 일단 리안의 손목을 잡고 대충 눈앞에 있는 아무 방문이나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리안은 무척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힘도 없이 끌려 들어왔다.
“물론 당신과 내가 아무 사이도 아닐 때였고 당신이 뭘 하든 내게 참 견할 권리 따윈 없습니다만….”
리안의 보라색 눈동자가 평정을 잃고 흔들렸다.
엘레노어가 문을 닫고 오는 사이 그의 상념은 또다시 멀리 흘러갔다.
“솔직히 지금은 도저히…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당신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이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이해하려는 걸까.
과부에게 청혼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정말 그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구나.
엘레노어는 리안이 더 떠내려가기 전에 입을 열었다.
“휴. 그런 게 아니라, 전 원래 임신하지 않았어요.”
리안이 모양 좋은 눈을 한 번 크게 깜빡였다.
“처음부터 임신한 적 없어요. 제 조수랑 공작 부인이 오해하신 거예요.”
리안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잠시 멈춰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멀리 가서 돌아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엘레노어는 잠시 망설이다가 살며시 덧붙였다.
“그리고… 그분은 아버지가 될 수도 없다고요.”
쑥스러워서 목소리가 잦아들었지만, 이왕 시작한 말이니 끝까지 해버리기로 했다.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는걸.”
그 말이 떨어지자 리안은 마치 마법에서 풀려난 왕자처럼 멈춰 있던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하…….”
그는 헛웃음을 짓더니 커다란 손으로 반듯한 이마를 꾹 눌렀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지만….”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엘레노어에게로 몸을 굽히며 귓가에 속삭였다.
“질투로 미쳐 버릴 뻔했습니다.”
그의 호흡이 닿은 곳부터 따뜻한 기운이 번져 나가 온 얼굴을 뒤덮었다.
붉어진 엘레노어를 리안이 살며시 품으로 끌어당겼다.
“잠시만 안고 있겠습니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만.”
시간 여유가 별로 없었지만, 리안의 손이 정말로 떨리고 있었으므로 엘레노어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안고 있으려니 마음은 가라앉는데 다른 부분이 슬며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닿은 부분으로부터 근질근질 묘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엘레노어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대화를 시도했다.
“정말 아이가 생겨도 괜찮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리안은 잠시 텀을 둔 뒤에 진중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 놀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쁨이 밀려오더군요.”
아까 보인 리안의 시선은 분명 진심이었다.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들어 괜히 입술을 깨물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리안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아이를 좋아합니까?”
원래 좋아했기 때문에 엘레노어는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리안은 눈을 살며시 굴리더니 곧 가늘게 뜨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원하면 언제든지 시도할 수 있으니, 얘기해 주십시오.”
“네?”
반문하는 엘레노어를 보며 리안이 붉은 입꼬리를 은근하게 올렸다.
“자주, 많이, 언제나, 어디서든 난 좋습니다.”
허리가 저리도록 낮은 저음을 듣자 몸 안에 불길이 일어나는 것처럼 뜨거웠다.
“무슨 소리예요. 당장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다고요.”
눈을 가늘게 뜨며 단호하게 딱 자르자 리안이 고개를 옆으로 조금 기울였다.
“음, 그럼 천천히 가져도 좋습니다.”
“뭐예요, 그게. 이랬다, 저랬다.”
엘레노어는 새침하게 받아친 뒤 리안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냈다.
“여유 생기신 거 같으니 준비하고 나오세요. 전 제니트 씨에게 가서 기다릴 테니.”
두 사람은 함께 방을 나왔다.
층계에서 헤어지기 직전 리안이 마침 생각난 것처럼 말을 꺼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는 말했는데 당신에게 말하는 걸 잊었군요.”
“뭘요?”
리안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호색한입니다.”
저런 잘생긴 얼굴로 뭘 커밍아웃하는 거야, 대체!
엘레노어는 씩 웃고 곧 2층으로 사라져 버리는 리안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황량한 바람이 몰아쳐 낡은 나무 간판을 흔들었다.
‘수선공의 집’이라 쓰인 간판은 그 자리에 매달려 있은 지 적어도 50년은 된 것처럼 삐걱대고 있었다.
그 아래 격자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가자 간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실내가 드러났다.
수선공도 바늘도 실타래도 없이 술꾼들과 테이블마다 가득 차려진 음식, 그리고 술통들만 가득했다.
뜻밖에도 아늑한 붉은 융단이 깔린 바닥을 밟고 엘레노어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페이드라 공작님이 이런 곳에?’
태어났을 때부터 금 탯줄을 다이아몬드 가위로 잘랐을 것 같은 스카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서민적인 장소였다.
그러니까 그 철저한 남자가 안전한 은신처로 선택한 거겠지.
엘레노어는 그렇게 생각하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마스터에게 이야기를 좀 하고 오겠습니다.”
제니트는 카운터 너머 척 보기에도 사연 많아 보이는 아저씨를 가리킨 뒤 걸어가 버렸다.
통로에 서 있기도 뭐해서 엘레노어는 적당히 기둥 부근의 후미진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러자 곧장 급사가 다가와 맥주가 가득 든 쟁반을 내밀었다.
‘마시라는 건가?’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보내면 귀찮아질 것 같아 술을 한 잔 들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처럼 동전을 내려놓았다.
그대로 맥주를 적당히 홀짝거리고 있으려니 온 가게의 시선이 온통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커다란 후드가 달린 망토를 착용하긴 했지만, 이질적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불편한 기색을 보여 좋을 게 없으니 엘레노어는 신경 쓰지 않는 척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반쯤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예쁜 아가씨가 혼자 이런 위험한 가게에 오면 곤란한데.”
건들거리는 말투. 하지만 목소리는 친숙했다.
반색하며 뒤로 휙 돌았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리번거리다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다시 천천히 테이블로 몸을 돌린 엘레노어는 흠칫했다.
“여기는 남자를 찾으러 왔나?”
후드를 걸친 스카이가 맞은편에 앉은 채 씩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