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고 철저히 치워.”
명령을 내린 후 황녀는 비단 천으로 입가를 눌렀다.
곧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어두운 지하 감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황녀가 제소당한 전대미문의 재판.
그 두 번째 공판이 다음 주로 잡혔다.
그때 들이밀 근거를 조작하기 위해 황녀는 지하 감옥의 증거를 인멸하는 중이었다.
‘뭔가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건가? 어리석은 것들.’
로우앤 공작은 기습적으로 지하 감옥을 조사하고 싶었겠지만, 지하 통로는 국가 비상시에 황족의 탈출 경로인 만큼 1급 기밀 장소다.
당연히 진입하려면 황제의 허가가 있어야 하고, 황제는 요청을 받자마자 황녀의 의사를 물었다.
조사를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황녀는 수락했다.
‘이건 오히려 나한테 기회지.’
마침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를 원하던 참이다.
나름대로 명망 있는 가문의 후계자인 에이드리언이 실제로 손목이 잘렸다.
게다가 함께 감금된 블레인, 엘레노어의 증언이 치명적이었다.
황녀는 그녀를 해칠 동기가 뚜렷했으니까.
그러니 그들이 갇힌 지하 감옥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필요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조사할지 아는 이상 결과는 마음껏 조작할 수 있었다.
‘이거로 폐하의 신임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
황제가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끝난다.
그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곳은 완전히 깨끗하게 유지되어야만 했다.
‘그나마 그 남자가 하나 남기고 간 거라도 있군.’
황녀는 순식간에 지하를 정리해 나가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그녀에게 종속된 이들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해도 아무런 불만 없이 따르는 완벽 한 병사.
이 지하의 기사들이 입을 모아 그녀의 결백을 증언해 줄 것이다.
‘그 남자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해.’
스카이 페이드라가 한 짓은 증오스러웠지만, 지금 곁에 있다면 가장 도움이 될 인물이었다.
그는 지위도 높고 태도도 매력적이며 대중들에게 인기도 높은 남자였다.
그가 황녀의 편에 서서 증언하고 엘레노어를 깎아내리면 여론은 순식간에 유리해질 것이다.
황녀는 그를 찾아내 이용할 계획까지 빼곡히 세워 두었다.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으로 해두면 동기도 부정할 수 있어.’
최근 눈에 띄게 그와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많이 보여 두었다.
리안 칼라브리아의 완벽함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차선책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으므로 마음이 변했다는데 설득력도 있었다.
‘뭐 곧 찾아낼 수 있겠지.’
황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생각했다.
스트링 스톤.
그녀가 그것을 끼우면 붉은 선이 떠올라 스카이에게로 이끌어 줄 것이다.
당장이라도 입수해 그를 찾아 나서고 싶었지만, 지금은 온갖 이목이 황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어 조심해야만 했다.
하지만 조만간 구할 수 있도록 손을 써 두었다.
지금은 몰래 황궁 밖에 나갈 수 없어 붙잡지 못했지만, 곧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주먹을 꼭 쥐었다.
*
육중한 나무 문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엄중한 경계 태세를 볼 때 침입자는 비하인드 나이츠의 골치를 꽤나 썩인 모양이었다.
엘레노어는 문에 달린 창문 너머로 묶인 채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고개를 숙인 상태였지만, 일라이의 말대로 스카이의 심복임이 분명했다.
“맞네요.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을 거예요.”
스카이가 좋지 않게 떠나긴 했지만, 암살자를 보낼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설혹 암살을 결심했다 해도 자신의 최측근을 단독으로 투입한다는 허술한 작전을 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라이는 엘레노어의 부탁대로 문을 열어 주었으나 마음을 놓진 않았는지 함께 따라 들어왔다.
“제니트…… 맞나요?”
스카이가 부르던 이름을 떠올려 내서 말을 걸었다.
남자가 고개를 들더니 보일 듯 말듯 끄덕였다.
엘레노어는 그의 앞에 앉아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이곳에 잠입한 목적이 뭐죠?”
제니트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황궁 지하에 갇혀 있던 마녀가 여기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질문은 제가 하겠어요. 목적을 말해 줘요.”
“나는 그 마녀가 필요합니다.”
베아트릭스가 목적이라 침입했다는 뜻인가?
엘레노어가 질문을 바꿔 물었다.
“당신은 그런 마녀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어요?”
“공작님께서 그런 것이 지하에 있으리라 언급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추측해 낸 걸까.
스카이의 영민함에 혀를 내두르며 엘레노어는 질문을 이어갔다.
“왜 그녀가 필요하죠?”
“그녀의 힘이 필요하니까.”
“주술 말인가요? 그거라면 페이드라 공작님이 하면 되잖아요?”
제니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일차원적인 의문이므로 직접 답을 추측 할 수 있었다.
뭔가 직접 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거겠지.
많은 것이 이유가 될 수 있겠으나 주술사가 굳이 다른 주술사를 찾으려 무리수를 둔다는 데에서 급격히 하나로 좁혀졌다.
엘레노어는 표정을 굳히며 어둡게 말했다.
“누군가 주술에 걸린 모양이군요.”
제니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엘레노어의 영민한 머릿속은 착실히 답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닿으려고 하니까 뒤로 물러났었지.’
슬쩍 다가서면 대담하게 안아 오던 스카이로서는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내 눈을 가렸었어.’
엘레노어는 황녀의 주술에 걸린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항시 스트링 스톤과 마킹 스톤을 끼고 있었다.
키스하기 전.
즉 피부가 닿기 전에 스카이가 가장 먼저 한 건 엘레노어의 눈을 덮는 것이었다.
온통 부자연스럽던 스카이의 행동이 하나의 조각으로 연결되었다.
“공작님은 대체 무슨 서약을 한 거 죠?”
질문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순간 최악의 생각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표정을 보니 짐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제니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제 짐작이…… 맞을 거라는 뜻인가요?”
믿고 싶지 않아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제니트는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그것을 보자마자 엘레노어는 벌떡 일어나 제니트에게 다가섰다.
“물러서십시오. 위험합니다!”
일라이가 말렸으나 엘레노어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푸른 눈으로 제니트를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물었다.
“페이드라 공작님이 황녀에게 종속의 서약을 했나요?”
그 질문에 그녀를 당기려 하던 일라이의 손길이 멈췄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의 표정이 충격을 받은 듯 딱딱히 굳어졌다.
“그렇습니다.”
제니트의 대답에 엘레노어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의 중심을 잡으며 외쳤다.
“왜, 대체 어째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예요?”
스카이는 엘레노어에게 리안의 서 약에 대해 설명해 준 장본인이었다.
그 누구보다 종속의 서약의 무서움과 잔혹함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종속될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는 걸 알 텐데 그런 것에 동의하다니.
그녀의 외침에 제니트가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스스로 짐작하지 않습니까?”
말문이 턱 막혔다.
리안이 서약을 해제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그가 쓴 방법이 이것이었던 건가.
역시 그 끔찍한 서약이 이렇게 작은 대가로 끝날 리 없었던 거다.
엘레노어는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원래 앉아 있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대체 왜…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당신이 지하에 갇힌 건 자신의 탓이라며… 휘말리게 한 책임을 지겠다더군요.”
제니트의 대답이 너무나 아프게 심장에 꽂혔다.
“공작님의 진심을 받아 달라든가 하는 비합리적인 요구를 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마음이란 게 있다면 지금의 공작님을 도와주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레노어의 입술 사이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싫어요.”
“…뭐라고요?”
제니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선을 든 엘레노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
“이런 상황이 정말 싫다고요, 나는.”
왜 리안도, 스카이도 자기 자신을 더 소중히 하지 않는 걸까.
이런 식으로 자신을 희생해서 도와주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 두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기꺼이 자기 자신의 손해를 감수했을 것이다.
“공작님은 지금 어디 계시죠?”
“그분을 돕고 싶다면 내게 마녀를 내주십시오. 내가 그녀를 데려가 공작님과 역주술을 …….”
“아니, 그런 것으로는 아무런 해결이 되지 않아요.”
엘레노어가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베아트릭스로 종속의 서약을 풀수는 없어요. 할 수 있다 해도 당신에게 내주지 않을 거예요.”
리안이 지하에서 했던 말과 각오는 그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땐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녀 역시 베아트릭스에게 힘을 돌려주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에 공감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공작님은 당신을 위해서 …..”
“나도 공작님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서약을 해제해도 곧장 다른 문제에 직면할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엘레노어는 딱 잘라 말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눈앞의 문제만 해결해서는 같은 일만 반복할 뿐이라고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뭡니까?”
“공작님을 데려와서 함께 힘을 모아 황녀를 무너뜨려야 해요. 그렇게 해야 우리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제니트는 부정하지 못했지만, 동조도 하지 못했다.
“공작님은… 그녀의 시선에 닿기만 해도 노예가 될 텐데 어떻게 대적한단 말입니까?”
“그분의 영민한 두뇌와 능력, 해박한 지식, 그리고 여러 가지 능력은 큰 도움이 돼요.”
스카이가 곁에 함께 한다면 천군만 마를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속내를 짐작하지 못해 의심했지만, 지금이라면 그는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아군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용하기 위해 공작님을 불러내라는 겁니까?”
“이건 공작님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엘레노어는 단호하게 제니트의 말을 부정했다.
“공작님이 서약했다면 황녀는 스트링 스톤을 써서 언제라도 찾아낼 수 있어요. 알고 있을 텐데요?”
제니트는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로 오면 위치를 들켜도 괜찮아요. 황녀가 공작님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도록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이곳에는 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세계 최고의 기사가 있다.
그의 보호보다 안전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면 공작님도 지는 거예요. 이미 한 배를 탔다고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떠난 공작님이 과연 이곳으로 오시려고 할지….”
머뭇거리는 제니트에게 엘레노어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을 만나게 해 주세요. 제가 책임지고 데려오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