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제국 남부의 유니스 영지.
하스카토르 제국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전통 있는 백작가 유니스 가문은 남부 전역에 걸쳐 수많은 방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팰리시티에서는 지명도가 낮지만 각 지역에 토착해 번성한 세력은 어지간한 후작가보다도 훨씬 크다고 여겨졌다.
그에 걸맞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성은 이른 아침부터 소집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정말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지 모르겠군.”
제국 수도에서 날아온 소식으로 유니스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유니스 가문의 수장 슈겔 유니스백작의 탄식을 시작으로 회의장을 가득 메운 방계 귀족들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실종된 에이드리언이 황녀 전하께 붙잡혀 있었다니… 그분은 제국의 천사라 일컬어지는 분이 아닙니까?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황가를 제소하다니. 이건 무슨 말입니까?”
“참, 이리 오래 살았지만, 전혀 들어 본 적도 없는 일일세.”
수도로부터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유니스 영지에는 불꽃을 통해 전해 온 간략한 사실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덕택에 유니스 가문 귀족들은 부족한 정보로 현명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고심하느라 머리털이 홀랑 빠질 지경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황제폐하께서 당장 제소를 취하하라며 압력을 넣고 계시는데.”
“에이드리언이 수도에서 한 일을 남부에서 대체 어찌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젊은 귀족이 조급한 말투로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는 칼라브리아 백작이 자신을 구했다고 증언했다지요. 그런데 그 백작은 현재 황녀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황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어쨌다는 건가?”
“혹시 에이드리언이 그 백작에 동조해서 황실을 음해하는 게 아닙니까?”
“아니, 에이드리언이 그래야 할 이유가 뭐가 있지?”
“뭔가 달콤한 약속을 받았겠지요.
황실에서 에이드리언을 납치해야 할 이유야말로 없지 않습니까?”
그럴싸한 논리였다.
좌중의 분위기가 젊은 귀족에게 설득당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대세를 거스르고 나섰다.
음성의 주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뜩이나 거친 인상을 더욱 살벌하게 바꾸었다.
“칼라브리아 백작은 결코 그런 치졸한 음모를 꾸밀 인물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을 스스로 거짓으로 영웅화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는 리안에 의해 바젤의 정식 시장이 된 오타르주 유니스였다.
하크메르시아 토벌 당시 리안에게 깊이 감화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며 리안이 받는 오해를 풀려 애썼다.
“그는 정말로 업적을 남기는 것에 관심이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저를 믿으셔도 좋습니다.”
가문 내에서 오타주르의 평판이 좋았으므로 서서히 기울었던 대세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견이 반박당해 불쾌해진 젊은 귀족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한들 고작 손목 하나일 뿐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닌데 수도로 올라가 에이드리언을 뜯어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오타주르가 쿵 소리가 나도록 책상을 내려쳤다.
인상이 살벌한 그가 눈을 부라리자 젊은 귀족은 찔끔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이건 부상의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황가에서 봉신을 멋대로 가두고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것도 우리 가문을 이끌 차기 후계자를 말입니다!”
에이드리언은 정통성 있고 사랑받는 후계자였다.
워낙 평화에 젖은 데다가 에이드리 언이 다친 것을 직접 보지 못해 현실감이 떨어져 막말을 뱉었을 뿐 실제로 봤다면 다들 분노해서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냥 넘어가면 추후 같은 일이 벌어져도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싸워야 할 때 싸워야 하는 겁니다.”
강하게 주장하자 곧 회의장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백작님께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결국, 수많은 가솔을 거느린 유니 스 가문의 가주 유니스 백작에게 결정권이 돌아갔다.
그는 한참을 숙고한 뒤 천천히 명령을 내렸다.
“황가에는 직접 수도로 올라가 해결하겠노라고 기별해 시간을 끌도록 하게.”
“정말 수도로 사람을 보내실 생각입니까?”
유니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인 뒤 오타주르를 보았다.
“바젤은 하크메르시아가 사라져 안정세에 접어들었으니 직접 다녀오게자네에게 가문의 결정을 일임하겠네.”
“명령 받들겠습니다.”
오타주르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
칼라브리아 공작은 천천히 거대한 문 안으로 들어섰다.
곧 돔형 지붕 아래로 붉게 장식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빼곡히 들어선 좌석과 천장을 가득 메운 연금술사의 조명. 그리고 높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드리워진 비로드커튼.
바로 샨카른 호텔이 번영하던 한때 오페라가 열리곤 하던 극장이었다.
공작은 주변을 슥 훑어본 뒤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텅 빈 객석 저 너머 무대 위.
이곳을 누볐던 그 어떤 배우보다 유려한 실루엣의 남자가 서 있었다.
“어째서 결투입니까?”
무대에 선 리안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은 질문이었다.
“아버님께서 저를 단죄하려 하시면 그저 가장 거대한 말들과 공성 무기를 끌고 와 멀리서 이 저택을 통째로 부수는 게 가장 이득일 겁니다.”
“이곳은 팰리시티 한복판이다. 그런 짓을 하면 주변이 초토화되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 돼.”
“그보다 작은 피해로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만한 말이었으나 비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알고 적을 알면 절대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자신을 알려는 노력을 멈춘 적 없는 아들이었다.
허세나 오만이 아니라 순수한 궁금함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나는 네게 잿더미가 된 제국의 패권을 안기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인 게 아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팰리시티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잘못 맺은 서약 때문에 거대한 무력이 전쟁을 원하는 이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칼라브리아 공작은 다른 방법으로 충성을 보여야만 했다.
“어떤 형태의 패권이든 저는 원한 적이 없습니다.”
진심이 전해진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건조한 말투였다.
“너와 입씨름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이미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음은 알고 있지 않으냐.”
공작은 쌀쌀한 말투로 대화를 일축해 버렸다.
“결투의 룰이나 정하도록 하지.”
제국의 결투는 무기의 종류나 사용할 무술의 종류를 세세하게 제한하는 게 보통이었다.
무기가 검이라면 레이피어인지, 롱소드인지, 브로드소드인지까지 합의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리안이 대화를 일축했다.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고?”
공작이 수염이 드리워진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뭐가 됐든 이길 수 있다는 거냐?”
공작의 호통을 리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자고로 결투의 승자는 하늘이 정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승리의 기회가 이쪽에도 있다는 뜻일 텐데.”
“제가 옳으므로 반드시 제가 이깁니다. 검이든, 활이든, 승마든, 그도 아니면 트럼프 게임이나 동전 던지기 같은 운에 맡기는 게임까지도.
저는 모두 이겨 증명할 겁니다.
얼핏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논리의 근거가 빈약했다.
그럼에도 이토록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은 그 말을 하는 상대가 리안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껏 고르십시오. 전부 상대하겠습니다.”
흰 얼굴은 자신을 향한 믿음으로 흔들림이 없고, 보랏빛 눈동자는 곧고 맑았다.
자신이 그런 표정을 마지막으로 지은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토록 자신 있다면 약속하거라.
내게 지면 전적으로 내 뜻에 따르겠다고.”
“좋습니다.”
청량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깔끔한 답변이었다.
“대신 아버님께서도 지면 제 뜻을 따르시는 겁니다.”
칼라브리아 공작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의 뜻을 따르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내가 이기면 네 곁에서 떠나보내야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제가 이기면 아버님께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
뭔가 마음에 걸리는 말이었다.
“책임져야만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곧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 하게 되겠지요.”
리안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다.
의아했지만, 공작은 이내 생각을 떨쳐 내고 검에 집중했다.
‘어차피 짧게 끝날 테지..’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칼라브리아 공작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챙!
커다란 소리와 함께 검이 맞부딪쳤다.
그것만으로 손목이 저려 더는 검을 쥐고 있을 수 없었으나 리안은 벌써 두 번째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공작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미리 작정한 대로 검 앞으로 몸을 던졌다.
섬광이 몸을 꿰뚫는 느낌.
그리고 다음 순간.
공작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결국… 뜻을 굽혀야 하는 건가.”
쯤, 엘레노어는 식당에서 식사 중이었다.
메뉴는 나쁘지 않았지만,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공작부인의 시선 때문이었다.
‘으.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하신 건가.’
최선을 다해 해명했지만, 공작 부인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하룻밤의 일탈을 벌였다.
는 건 제국 전체에 공인된 사실.
공작 부인은 칼라브리아 공작이 일발필중이었다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내세우며 리안 역시 그것을 물려받았을 것이라 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오해를 풀 수 있지.’
엘레노어는 임신하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려 노력했으나 애초에 임신해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임신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지 알수 없었다.
오히려 의식하는 탓에 행동거지가 부자연스러워져 역효과만 나는 듯했다.
그런 엘레노어를 가시방석에서 구원한 것은 일라이였다.
“공작 부인.”
일라이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식당에 들어와 보고했다.
“식사 중 죄송합니다만, 저택으로 잠입하려다 잡힌 자가 있습니다. 본관 안에 은신한 것을 포착했습니다.”
“본관까지 들어왔다고?”
제국 최정예 기사단인 비하인드 나이츠가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는 저택은 황궁보다도 보안이 철저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사이를 뚫고 본관까지 접근했다니.
대단한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리안은? 뭐라고 하던가?”
“단장님께서는… 현재 중요한 볼일로 자리를 비우신 상태입니다.”
일라이가 그답지 않게 다소 얼버무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일단 돌아올 때까지 가둬 두었다가 나중에 상의하도록 하지.”
공작 부인은 그렇게 말했으나 일라 이는 나가는 대신 엘레노어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 생각에는 당신이 이유를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제가요?”
난데없이 지목당한 엘레노어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을 호위할 때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남자의 심복입니다.”
‘그 남자’라고 말하는 일라이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머리를 굴릴 것도 없이 엘레노어는 바로 누군지 깨달았다.
“페이드라 공작님의 심복이라고요?”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묘한 모습으로 행방을 감춘 스카이가 신경 쓰이던 차였다.
그런데 심복의 침입이라니.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 만나게 해 주세요!”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엘레노어는 곧장 일어서 일라이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