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광장의 함성이 칼라브리아 백작 저까지 뒤흔들고 있었다.
잘 벼려진 칼날을 불빛에 비춰 보고 있던 리안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싸울 생각인가 보네.”
블레인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달리 심각한 표정이었다.
리안은 대답 대신 능숙한 손놀림으로 검을 허리에 찬 검집에 꽂았다.
그런 그의 앞에 붉은 봉투가 날아와 떨어졌다.
“그 안에 든 이름을 제대로 본 거 맞는 거야?”
리안의 시선이 무심하게 벌어진 봉투사이로 비어져 나온 카드에 떨어졌다.
묵직한 글씨체로 적힌 이름은 그가 아침에 봤을 때와 단 한 글자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앤필립 마로가 칼라브리아]
리안의 아버지 칼라브리아 공작이었다.
“부자가 결투라니. 네가 엘레노어에게 청혼한다는 말을 처음 들은 날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때처럼 또 반대할 생각인가?”
리안의 물음에 블레인이 한숨을 푹내쉬었다.
“난 네가 없는 사이 계속 엘레노어와 함께 있었다고, 저택에서 무모한 파티 계획을 세울 때부터 지하에 떨어질 때까지 계속 말이야.”
그의 말대로 오히려 블레인이 리안보다 엘레노어와 함께한 시간이 훨씬 길었다.
“공작 부인의 무리한 요구를 성공시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암울한 지하에서 보인 모습은 더했어. 그 화려한 사교계 여왕이 세탁도 청소도 마다하지 않고 환자를 돌보고, 그 와중에 마녀와 거래하고 탈출 계획을 짜면서 눈을 빛냈지.”
블레인은 평소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서 사람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였다.
“평민이 됐다지만 엘레노어는 내가 본 귀족 여인 중 가장 대단해. 나라면 그녀를 놓치지 않겠어.”
진심 어린 블레인의 말에 리안은 미소 지었다.
“일시는 오늘인가?”
“내일이야.”
“재판이 끝난 후가 되겠군.”
그들은 오늘 재판에 나가지 않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어차피 첫날이니 단순히 사건 개요를 설명하고 배심원을 확인할 뿐이었다.
“시간이 될 때까지 줄곧 검을 휘두를 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리안에게 블레인 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자. 엘레노어가 이걸 전해 달라고 했어.”
그의 손바닥 위의 물건을 본 리안이 보라색 눈을 찌푸렸다.
“그녀에게 결투 상대가 누구인지 말했나?”
“아니. 말하지 않았어.”
블레인은 고개를 저은 뒤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누가 됐든 황녀와 연루됐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가져가 보라고 하더군.”
리안은 입술을 깨물었으나 곧 그것을 받아들었다.
“엘레노어에게 말하지 않고 나갈 생각이야?”
“걱정할 테니까.”
리안의 대답에 블레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고가. 행운의 부적이 될지도 모르니까.”
“응.”
블레인은 천천히 다가가 리안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떻게 되는 후회하지 않을 결과를 만들고 와.”
지지 않는 싸움인 건 분명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이기느냐다.
리안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손에 낀 글러브의 끈을 다시 조였다.
*
“잘했어, 클로드!”
방으로 들어서던 클로드는 활달한 목소리를 듣고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또 술입니까.”
“이번에는 축하주라고! 자, 받아, 받아!”
미나즈는 아침보다 한층 독한 와인을 들고 있었다.
손에 반 강제로 잔을 쥐여 준 뒤 콸콸 따르기 시작하는 미나즈에게 클로드가 불평했다.
“대체 뭘 축하하는 겁니까. 딱히 좋은 결과가 나온 것도 없는데.”
짧았던 첫 번째 공판은 기울어짐없이 팽팽하게 끝났다.
에이드리언의 호소는 효과적으로 먹혀 들어갔으나 황녀의 창백한 모습은 제국민의 동정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배심원단은 황제의 입김이 강한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희망적인 요소가 없는데도 미나즈는 막무가내였다.
“뭐 어때. 무사히 끝냈잖아.”
“뭡니까, 그게. 겨우 기대치가 그것 밖에 없었던 겁니까?”
“그럴 리가. 난 정말 오늘 제법 잘했다고 생각해. 어른스러운 태도로 나와서 멋있었단 말이지.”
미나즈의 칭찬에 클로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하. 뭘 쑥스러워하는 거냐. 숙맥아니랄까 봐.”
미나즈는 호탕하게 웃으며 클로드의 등을 팡 소리 나게 후려쳤다.
“그런 반응을 보이면 나쁜 누님들의 노리개가 된다고. 너 아직 경험도 없지?”
“대체 무슨 망측한 질문을 하는 겁니까?”
“에이, 같이 목욕도 한 사이에 뭐가 어때서 그래. 넌 법전 좀 그만 보고 나가서 즐길 필요가 있어. 사람도 좀 만나고.”
너무나도 거침없는 미나즈의 말을 맨 정신으로 듣기 힘들어 클로드는 술잔을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입가를 슥 문질러 닦으며 툭 쏘아붙이는 말투로 물었다.
“내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왜 결혼하지 않는 겁니까?”
“뭐야. 노처녀라고 까는 거냐?”
“했던 말을 돌려주었을 뿐입니다.”
10대 때 결혼하는 경우가 많은 제국의 풍토를 볼 때 미나즈는 굉장히 늦은 편이었다.
그간 무척 궁금하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긴장 때문에 심장이 콩닥거렸으나 로우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
어느 정도 예상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유가 뭡니까?”
“작위는 부계 위주잖아. 결혼하면 나는 에이브로트 공작이 아니라 에이브로트 공작 부인이 되겠지. 내가 정당한 계승자인데 그런 건 싫다고.”
“그거라면….”
클로드는 말을 흐리며 와인을 조금 더 홀짝 들이켰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런 의도도 없이 들리기를 바라며 지나가는 어조를 가장해 말했다.
“공작끼리 결혼하면 작위와 가주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플로이드공작 부인처럼 말입니다.
“그 호칭 자체가 싫다고. 게다가 이번 싸움에서 이기면 제일 먼저 금지 해야 할 게 공작과 공작의 결혼이야.”
마시던 와인이 하마터면 목에 걸릴 뻔했다.
“왜 금지합니까?”
“지나치게 세력이 커지면 혼란을 부른다고, 공작 간의 결혼을 막는 법령을 만들어야 해.”
“제국의 법률로는 누구나 원하는 상대와 결혼할 수 있습니다. 공작의 자유를 제한하다니요.”
“제한해서 생기는 실보다 득이 훨씬 많다고. 애초에 굳이 몇 명 되지도 않는 공작들끼리 결혼할 필요가 뭐가 있어?”
미나즈가 논리적으로 반박하자 클로드는 말문이 막혔다.
“어쨌든 난 그건 찬성할 수 없습니다.”
“대체 왜 반대하는 거야?”
“내 마음입니다. 아무튼, 반대입니다.”
평소답지 않게 억지를 부리자 미나 즈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수상한 낌새를 차린 게 분명했다.
“난 다음 재판을 준비해야 하니 술주정은 적당히 부리십시오!”
클로드는 버럭 화를 낸 뒤 방을 훌쩍 나가 버렸다.
“뭐야, 저 녀석. 술주정은 자기가 부려 놓고.”
미나즈는 불만스레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잔에 또다시 와인을 가득 채웠다.
*
엘레노어는 플로이드 공작 부인과 함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로우앤과 미나즈가 황녀를 법정에서 공박하는 사이 두 사람은 다른 쪽으로 황제를 압박할 계획을 세웠다.
“양식이 필요하신가요?”
엘레노어의 말에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건 눈감고도 쓸 수 있어.”
엘레노어가 파악한 플로이드 공작부인의 재산 규모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제국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지고 있었고, 유통망과 소금 무역을 반 이상 독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대 규모의 은행가이기까지 했다.
제국에서 그녀에게 돈을 빌리지 않은 귀족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말 많이 써 보신 솜씨시군요.”
공작 부인이 일필휘지로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은 곧 만기가 다가오는 채권을 상환해 달라는 독촉장이었다.
이자 납부에 차질이 없는 우량한 채권은 만기가 돼도 기간을 연장하는 게 보통이었으므로 일반적이지 않은 독촉장인 셈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동그라미가 대체 몇 개인 거야.’
처음 들었을 때도 놀랐지만, 정말 막대한 금액이다.
게다가 가장 놀라운 것은 그것을 받는 수신인이 하스카토르 제국의 황제라는 것이다.
“제국 역사상 황제가 빚 독촉을 받은 적이 있었나요?”
“몇 번 있지. 그때마다 나서서 대신 상환하는 게 우리 가문의 역할이었고.”
그것이 플로이드 공작가의 권력을 공고히 해 온 것이다.
“이거로 효과가 있을까?”
“물론이죠. 돈을 이기는 군대는 없으니까요.”
공작 부인이야말로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빙긋 웃었다.
“아, 그리고 제가 재판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생각해 봤는데요. 이걸 저희가 준비하면 어떨까요?”
“음. 가능한지 알아보도록 하지.”
공작 부인이 엘레노어가 건넨 쪽지를 챙겨 넣었다.
“자, 독촉장은 썼으니 이제 남은 일들을 처리해 볼까.”
챙겨야 할 가문과 기사단이 늘어나면서 보급을 담당하는 공작 부인의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게다가 일을 진행하는 중간에 뭔가가 필요할 때마다 공작 부인에게 마련해 줄 것을 부탁했으므로 공작 부인은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익숙한 일은 아니었지만, 엘레노어 역시 최선을 다해서 도왔다.
몇 시간이나 책상에 앉아 각종 숫자를 확인하고 있으려니 몸이 무척 뻐근했다.
“허리가 아픈가?”
“아, 네. 자세가 불편하네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엘레노어는 편한 자세를 강구하다가 쿠션을 몸과 책상 사이에 끼웠다.
불평할 수는 없지만, 무겁기까지한 가슴을 살짝 걸치자 어깨가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가 그 자세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남작 부인!”
커다란 목소리에 엘레노어가 반갑게 고개를 돌렸다.
업무를 부탁하기 위해 불러들인 그레이엄이었다.
지하에 있는 동안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무척 오랜만이었다.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부인이야말로요. 제가 얼마나 걱정을….”
밝은 목소리로 외치며 들어서던 그레이엄이 그녀를 보고 흠칫했다.
“왜 그래?”
“아, 어, 어,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이 있었죠! 까, 깜빡 잊고 있었네요!”
그레이엄은 엘레노어와 공작 부인을 번갈아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나…! 축하… 해도 되는거 맞나요?”
“뭐? 무슨 말이야.”
“어쨌든 저는 기뻐요, 남작 부인!”
너무 횡설수설이라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리둥절해 하는 엘레노어를 꽉 끌어안은 뒤 그레이엄이 팔을 잡아끌었다.
“이제 제가 왔으니 일은 맡기고 들어가서 좀 쉬세요?”
“이렇게 바쁜데 쉬다니. 다 같이 해야지”
“아니에요! 전에 월경이 늦어진다고 하셨을 때부터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그녀의 말에 엘레노어는 그제야 오해를 깨닫고 입을 떡 벌렸다.
지금 보니 배에 끼우고 있던 쿠션이 하필 옷과 똑같은 색이라 배가 나온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공작 부인도 계시는데 큰일 날 소리를!’
황급히 오해를 풀려 했으나 공작부인이 눈치채는 게 더 빨랐다.
“엘레노어. 너 임신한 거니?”
그렇게 공작 부인이 큰 소리로 외친 순간.
하필 열린 문틈 사이로 이쪽을 바라보는 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백작님!”
엘레노어는 너무 당황해서 리안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입술을 깨물더니 돌아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