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편지에는 도나테가 말한 대로 엘레노어의 작위가 환수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보르미아 공작이 휴식 중이라 인가 청 업무가 반쯤 마비된 상황에서 이런 별로 중요치도 않은 내용이 빨리 날아왔다는 건 일부러 보냈다는 의미였다.
“이제 공식적으로 평민이 되었으니 원래 이름을 등록해야만 한대요. 여기 적어서 반송하라는군요.”
이로써 제국 최고의 신분을 가진 리안과의 거리는 한층 더 멀어진 셈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입맛이 썼다.
그것을 감추려고 엘레노어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볍게 말했다.
“이거 난처하네요. 저는 원래 성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말이죠.”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엑스트라인데다 가족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므로 엘레노어는 결혼 전의 성을 들은 적도 없었다.
어쩌면 제국의 평민들 대부분이 그렇듯 성이 없이 그저 이름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 메르빌.”
엘레노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게 제 성인가요?”
“그렇습니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당신에게 반한 뒤 어디의 누구인지 찾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몰래 알아본 게 쑥스러운 듯한 기색이었지만, 그의 덕에 잊힐뻔한 이름을 찾은 셈이었다.
“엘레노어 메르빌…….”
엘레노어는 소리 내어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원래 이름이라지만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성을 바꿔서 등록하면 어떻습니까?”
선뜻 적어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엘레노어에게 리안이 은근히 말했다.
“바꿔요? 어떻게?”
“글쎄요.”
리안은 짐짓 말을 끌더니 잘생긴 입꼬리를 슥 올렸다.
“엘레노어 칼라브리아라면 어떻습니까?”
순간 심장이 쿵 뛰었지만, 엘레노어는 도도하게 받아쳤다.
“혀가 낫자마자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시는군요.”
“…그때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왜여. 기여었는데. 시러져요?”
엘레노어의 놀림에 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자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말, 농담이라도 하지 마세요.”
정색하는 엘레노어에게 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혀가 남아 있는 걸 후회하지 않게 해 주시겠습니까?”
이건 무슨 의미야?
잠시 멍해졌던 엘레노어는 리안이 자신의 입술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 그녀는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때가 더 귀여웠어요.”
“말은 그랬어도 속으로 하는 생각은 변한 적 없습니다만.”
장난스럽던 시선이 조금 더 뜨겁게 변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엘레노어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리안이 엘레노어의 입술을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더 내렸다.
“아직 하고 있었군요.”
리안의 눈은 그녀의 목덜미에 향해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뻗어 자신이 선물한 목걸이를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돌아오면 풀기로 했는데.”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네요.”
엘레노어는 리안의 손가락을 살며시 떼어 내며 말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들은 멈춰 두기로 공작 부인과 약속했잖아요. 모든 일이 다 끝나면 풀기로 해요.”
“그럼 그때까지 내 곁에 묶여 있어주는 겁니까?”
눈을 빛내는 리안의 얼굴이 유려해서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엘레노어는 속눈썹을 드리우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글쎄요. 저도 포박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해서 말이죠. 백작님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 달아날지 몰라요.”
“또 도망가는 겁니까?”
“음, 하는 거 봐서요.”
쿡쿡 웃으며 받아치자 리안이 고개를 낮춰 속삭였다.
“가지 말아요. 나 말 잘 들을게요.”
간절한 눈빛과 다정한 목소리.
머리 하나 큰 남자가 또다시 커다란 강아지처럼 느껴졌다.
이럴 때가 아닌데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쿵 뛰고 달콤 한 분위기가 번져 나갔다.
둘이 그렇게 은근한 분위기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단장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노크와 거의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선 사람은 일라이였다. 리안이 엘레노어와 함께 있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방해받은 탓인지 리안은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제국 귀족이 칼라브리아 백작님의 불충을 규탄하며 결투장을 보내 왔습니다.”
“결투라고?”
엘레노어는 무척 놀랐다.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말그대로 순수한 경악이었다.
‘대체 누가 멀쩡한 목숨을 내다 버리고 싶어 하는 거야?’
제국 최고의 기사에게 결투장을 보내다니.
그 정신 나간 상대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했다.
“누가 보낸 거지?”
리안의 질문에 일라이는 대답 대신 따라 들어온 집사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집사가 황금색 쟁반 위에 놓인 붉은 봉투를 리안에게로 내밀었다.
그것을 열어 안에 든 카드를 본 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세요? 아는 사람인가요?”
엘레노어의 물음에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채 리안은 그대로 방을 떠나 버렸다.
*
“좋은 아침이야, 클로드.”
인사하는 미나즈를 보면서 클로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술입니까?”
미나즈의 손에는 두 잔의 보석 같은 샴페인이 들려 있었다.
그중 한 잔을 클로드에게 건네며 미나즈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전쟁터에 나서는 기사는 모두 미녀가 건네는 술을 마시는 법이라고.”
“저는 기사가 아니라 법관입니다.”
딱딱하게 대꾸하면서도 클로드는 샴페인을 받아 들었다.
“자, 건배. 마시고 힘을 내서 대중들 앞에서 그 악랄한 가면을 벗겨주는 거야.”
클로드는 고조된 듯한 미나즈를 잠시 응시하다 물었다.
“황녀를 언제부터 그렇게 싫어했습니까?”
“어?”
“유독 화가 나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단순히 화가 났다기에는 뭔가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쯤 추측으로 던져 본 말이었는데 미나즈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티가 났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미나즈는 자신의 잔에 샴페인을 한 잔 더 채우며 말했다.
“트로인 회의의 명단에 미하일이 합류했어.”
로우앤의 미간이 좁혀졌다.
미하일 에이브로트.
올해 스무 살이 된 미나즈의 남동생이었다.
“그가 트로인 회의에 들어갔다고요? 어째서?”
“황녀가 강력하게 권유했다고 하더라고.”
아무리 황녀가 권유했다고 하더라도 공작가의 직계가 트로인 회의에 참석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미나즈가 설명을 보충하듯 부언했다.
“그 애가 팰리시티의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때 하급생이던 황녀가 나서서 많이 감싸 줬다고 하더군. 당시에는 고맙게 생각했는 데…….”
잠시 말을 흐리며 미나즈는 샴페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비앙카스타 바이스의 경우를 보면… 글쎄. 어땠을지.”
미나즈의 의심은 타당했다.
제국 5대 공작가의 직계가 아카데 미에서 따돌림당하는 건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미하일은 다소 심약한 면이 있어도 호감 가는 외모에 나쁘지 않은 사교술을 지니고 있었다.
이상한 공작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무척 커 보였다.
“미하일이 작위를 원하는 겁니까?”
“글쎄. 그런 내색을 보인 적이 없지만, 트로인 회의에 참석했다면 그렇겠지? 애초에 원하는 게 정상이고.”
제국에서는 여자가 작위를 잇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지만, 아들과 딸이 모두 있는 경우 딸이 손위라도 아들이 작위를 잇는 것이 보통이었다.
미하일이 에이브로트 공작이 되지 못한 것은 전대 에이브로트 공작이 사망했을 때 겨우 5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나즈는 올해 32세로 미하일과 제법 터울이 있었다.
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총명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당시 이미 성인식을 마친 상태였다.
“그때도 남동생에게 작위를 물려주라는 목소리가 높았어. 아직도 숙모건 백부건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지. 그 애가 성인식을 마쳤을 즈음에는 내게 작위를 양위하란 압력도 가했어. 내가 공작으로서 자격미달이라면서 말이야.”
“말도 안 됩니다.”
클로드가 딱딱한 목소리로 일축했다.
“당신이 공작이 되고 나서 고작 4년 만에 영토 분쟁을 깔끔하게 해결했고 또 늘 주기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던 국경 부근도 조용해졌습니다.
최근 맺은 협정들 모두 유효하게 유지되고 있고요.”
“오. 수업 시간에 안 졸고 열심히 들었구나.”
미나즈가 킬킬거리며 웃자 클로드의 미간에 주름이 깊이 파였다.
“기껏 칭찬하고 있는데 그럴 겁니까?”
“미안, 미안. 듣기 좋으니까 더 해보라고.”
클로드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했던 말을 무르지는 않았다.
“당신이 공작의 품위를 대폭 해치고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외교를 담당하는 에이브로트 공작으로서는 적임입니다. 자격 미달이라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평소에는 나사가 빠진 것처럼 가볍게 보여도 외교에 있어서는 타고난 천재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다소 허술한 인상으로 상대를 방심하게 만든 뒤 원하는 것을 철저하게 얻어 내는 기술은 외교의 정석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그런 관계로 네가 할 일은 내게 아주 중요해졌어. 부디 그 기분 나쁜 여자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주고 오길 바라.”
처음부터 일을 맡은 이상 반드시 완벽하게 수행할 생각이긴 했지만, 더욱 각오가 단단해졌다.
클로드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미나즈에게 받은 샴페인을 깨끗이 비웠다.
*
엘레노어는 칼라브리아 백작저의 가장 높은 탑에 올라가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넓은 정원 너머 멀리 펼쳐진 광장은 수없이 몰려든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에이드리언 유니스와 황녀 아일린 하스카토르의 재판을 보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엘레노어 역시 참석하고 싶었으나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터라 귀족석에 입장할 수 없었다.
멀리서 구경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 수많은 인파에 섞여 있는 건 별로 현명한 선택이 아닐 터였다.
하는 수없이 그녀는 탑에서 연금술사의 확대경을 이용해 관람하기로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에게는 실시간 생중계가 붙어 있었다.
[호법청 대법관이 왜 저리 기생오라비 같은 어린 녀석인 거야?]
재판정으로 들어서는 로우앤을 보고 베아트릭스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엘레노어가 넘겨준 보석 장식 핀 하나를 받고 대강의 내용을 전해 주기로 합의했다.
[이제 시작하는군.]
오늘은 첫 번째 재판.
평민은 한 번의 재판으로 판결과 처벌까지 이루어지지만, 제국 귀족은 총 세 번의 재판 기회가 있었다.
현대처럼 각각 다른 법원에서 주관하진 않지만, 각각의 재판에서 판결이 뒤집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배심원에게 어떻게 어필하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끄러운 녀석이 올라왔어.]
팔을 잘린 뒤 고통에 신음하던 에이드리언을 베아트릭스는 여전히 그렇게 불렀다.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여인이 지위와 신분을 이용해 저를 납치했고 씻을 수 없는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부당한 이유로 신과 부모님이 내려 주신 소중한 한 팔을 잃게 되었고, 긴 시간 지하에서 학대받았으며 다른 이의 구원이 없었다면 살해당했을 것입니다.]
베아트릭스는 연극에 제법 소질이 있는지 에이드리언의 말투를 무척 그럴 듯하게 흉내 냈다.
절절한 에이드리언의 호소 후 클로 드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 여인이 그대를 납치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을 배신한 친구를 벌주고 싶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친구란 누구지?]
[비앙카스타 바이스 후작 영애입니다.]
비앙카스타의 이름이 나오자 대중들이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악녀라는 평판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좋지 않은 흐름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를 구원한 것은 누구지?]
[리안 플로이드 칼라브리아 백작입니다. 그가 부당한 감금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클로드의 절묘한 질문으로 야유는 환호성으로 변했다.
리안을 향한 대중의 지지는 여전한 것이다.
[그대를 감금하고 학대한 상대의 이름을 밝히도록 하라.]
아주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반대쪽 단상에 선 소녀를 향하는 것이 보였다.
[제국의 황녀 아일린 하스카토르를 고발합니다.]
광장이 떠날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