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제83화
황녀는 멍하니 벽에 걸린 장식을 바라보았다.
먼 이민족 왕이 바친 진상품은 순금이었으나 마치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보이는 독특한 눈알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어서일까.
현재 보고 중인 체펠린의 목소리 역시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들렸다.
“오늘 호법청 대법관인 로우앤 공작이 에이드리언 유니스의 제소를 공식 인정했습니다. 또한, 그가 요청한 공개 재판까지도 수락했다고 합니다.”
“뭐가 어째?”
황제의 눈은 분노로 핏발이 일어서 있었다.
“감히 지방의 정신 나간 촌부 나부 랭이의 말에 넘어가 황제의 딸을 제 소해? 내 이 미친 반역자들을 당장 찢어 매달아 버리겠다!”
길길이 날뛰는 황제를 간신히 진정 시킨 뒤 체펠린이 창백해진 얼굴로 보고를 이어 나갔다.
“문제가 더 있습니다. 법률상 공작이상의 작위를 지닌 자가 재판을 받을 때는 대법관이 직접 주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로우앤공작은 폐하로부터 황궁 출입을 금지당한 상태입니다.”
황제는 공작령에 황가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한 데에 대한 보복으로 네 공작을 황궁에 출입 금지시켰다.
“황녀를 개나 소나 볼 수 있는 길바닥에 세워 죄를 묻겠다는 건가?
그따위 일이 어찌 용납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나 옆에 서 있던 법률 자문관이 송구스러운 목소리로 고했다.
“법률상 재판정은 황궁과 각지의 법정, 그리고 호법청에서 특별히 인가한 장소입니다. 클로드 로우앤이 호법청의 수장이므로 재판정을 인가 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법률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애초에 그 사법 귀신인 클로드 로우앤이 빈틈없이 살폈을 테니 법적인 부분에 허점이 있을 리 없었다.
“무척 송구합니다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제소가 근거 있는 일인지 확인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체펠린이 몸을 깊이 숙이며 말을 흐렸다.
그러자 줄곧 듣고만 있던 황녀가 창백한 얼굴을 들며 외쳤다.
“근거가 있을 리가요! 이게 사실일리가 없잖아요!”
억울함이 묻어나는 절절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저는 억울합니다. 이건 분명한 모함이며 함정입니다. 제가, 제가 어찌 그리 끔찍한 짓을……….”
황녀의 커다란 눈에 금방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울먹이면서도 또박또박하게 주장했다.
“거짓을 흩뿌려 백성을 선동해 황가를 음해하려는 겁니다! 재판 따위는 무시하고 즉시 쳐들어가 그 사악한 무리를 단죄해야만 한다고요!”
황제가 그것을 훑어보는 사이 체펠린은 말을 이었다.
“무리한 내전을 일으키는 만큼 반드시 명분은 쥐고 있어야만 합니다.
황녀 전하의 결백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말도 안 되는 재판을 받아들이란 말이냐?”
“로우앤 공작이 적어도 만인의 앞에서 조작된 사실로 법을 농락하진 않을 것입니다.”
비록 경력이 짧아도 로우앤의 강직성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말한 뒤 체펠린은 눈을 들어 황녀 쪽을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결백하다면 이 방법이 분명 최선일 것입니다.”
마치 결백하지 않다면 지금 이야기할 것을 종용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체펠린 궁정백.
황녀 전하께서 결백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소.”
동석하고 있던 이델체 백작이 황녀의 편을 들었다.
세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어두운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우선 남부 유니스 가문에 에이드리언이 제기한 제소를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게.”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제국 남부까지 소식이 가려면 너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던 황녀는 이어진 황제의 말에 뻣뻣이 굳어 버렸다.
“전투는 이 일이 해결되고 예정대로 인원을 모아 명분을 찾은 뒤에 진행하겠다.”
“폐하!”
황제의 결론에 황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말 저를 적들이 준비한 광대놀음에 세우실 작정인가요?”
“아일린. 나는 네 결백을 믿는다.”
황제는 황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진중하게 말했다.
“네가 겪게 될 수모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이번 일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얄팍한 수작을 뒤엎고 너에 대한 모든 오해를 일거에 불식시켜 보는 거야.”
최근 제국을 떠도는 황녀에 대한 괴담이 황제의 신경에도 거슬린 모양이었다.
말문을 잃은 황녀의 어깨를 한 번 꼭 쥔 뒤 황제는 체펠린을 향해 큰 소리로 명령했다.
“아일린의 결백을 중명할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 또한, 명분을 가져오는 것과 동시에 곧장 칠 수 있도록 준비하라.”
“네, 폐하.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금방 에오가이노스에 전문가들이 모여들어 북적이기 시작했다.
황녀는 그 틈을 타 슬며시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황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걷어차고 싶은 생각을 간신히 억눌렀다.
분명 이따위 조잡한 수작을 부리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전에 전투를 일으켜 묻어 버리려고 했던 거였다.
‘역시 그때 전부 죽여 없앴어야만 했는데..’
스카이 페이드라.
그 남자 때문에 베아트릭스와 엘레노어 마리체, 그리고 에이드리언 유니스에 블레인, 일라이까지 중요 증인들이 전부 살아서 나갔다.
재판이 진흙탕으로 갈 것은 불 보듯 명확했다.
‘제길.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빠져나가야만 해.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황녀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은 스스로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상황과 인질을 조작해서 누명을 벗어나는 건 그녀의 특기.
비록 많이 떨어져 나갔지만,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체스 말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쪽의 장단에만 놀아날 수는 없지.’
위기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저쪽에도 한 방씩 타격을 돌려줘야만 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때마침 오늘.
그녀가 써먹을 수 있는 말이 찾아 오기로 되어 있었다.
바쁜 오전을 보내며 마음을 가다듬은 뒤 정해진 시간에 황녀는 응접실로 향했다.
“칼라브리아 공작님.”
공작이 앉아 있다가 황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뻣뻣한 얼굴로 황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황녀 전하.”
공작과의 관계는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층 미묘해져 있었다.
이제 황녀가 리안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심지어 내전까지 일으키려는 판이니 공작으로서는 황실에 무조건 충성을 바쳐도 얻을 게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가 발을 빼면 황가로서는 재앙이었으나 황녀는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여유로웠다.
‘미리 손을 써 두길 잘했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황녀는 공작에게 악수를 청했다.
손이 맞닿자 공작의 뺨에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서약의 각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정언의 서약.’
칼라브리아 공작은 종속의 서약은 거부했지만, 황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한다는 서약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 덕에 그는 더는 발을 뺄 수 없었다.
“이제 슬슬 칼라브리아 공작님께서 움직여 주실 때가 됐는데요.”
황녀는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서 제가 더 궁지에 몰리게 되면 스스로 충성을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녀의 재촉에 칼라브리아 공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금일 제 충성의 증거를 보실 겁니다.”
황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줄곧 칼라브리아 공작에게 줄곧 가문의 군권을 황가에 일임하라 압력을 넣어 왔다.
그의 병력만 있다면 그 시끄러운 체펠린의 입을 다물게 하고 곧장 군대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잘됐네요. 그럼 빨리 서둘러 주시면 좋겠네요.”
칼라브리아 공작은 군말 없이 곧장 일어서 로사그란데를 나섰다.
황녀의 득의만면한 시선이 그의 결의로 가득 찬 뒷모습에 꽂혔다.
*
“그간 정말 죄송했어요.”
비앙카스타가 아침부터 엘레노어를 찾아와 사과의 말을 건넸다.
“백작님께서 절대 말을 전하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워낙 거짓말을 못해서… 남작 부인이 우울해하면 참지 못하고 말해 버릴 거 같아서 한동안 피해 있었어요.”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엘레노어는 흔쾌히 말한 뒤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요? 어서 에이드리언에게 가 보세요.”
엘레노어의 말에 비앙카스타는 양 뺨을 붉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 나눠요.”
비앙카스타가 돌아가고 난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누군가 엘레노어의 방문을 노크했다.
문을 연 엘레노어는 흠칫했다.
“엘레노어.”
리안이 복면을 벗은 채 맨 얼굴로 서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퉁퉁 부어 있었는데.
의사의 장담대로 딱 일주일이 되자 거짓말처럼 회복된 모양이었다.
샤프하게 돌아온 얼굴선을 바라보며 엘레노어가 물었다.
“괜찮아요? 이제 다 나은 거예요?”
“그런 것 같습니다.”
리안의 목소리는 원래의 깔끔하고 귀족적인 발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이긴 한데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부작용은 없나요?”
“네.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다가 리안이 마침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아. 뜨거운 음식을 잘 못 먹게 된 거 같습니다.”
종속의 서약을 벗어나는 대가로 고양이 혀가 되다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엘레노어는 쿡쿡 웃으며 리안에게 물었다.
“잘됐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그게… 당신에게 온 우편물을 가져왔습니다.”
리안의 말에 엘레노어는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주변 상황을 고려해 단둘이 있거나 이야기 나누는 것을 피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말을 붙이려고 일부러 심부 름을 자처한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확인해 볼게요.”
“위험한 우편물이 있을지 모르니 제가 함께 보겠습니다.”
직접 가져왔으니 이미 수상한 것들은 전부 걸러 냈을 터였다.
속내가 뻔히 보였으나 엘레노어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럼 안으로 들어오세요.”
방으로 들어온 엘레노어는 리안과 함께 우편물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분량의 편지들은 대부분 흥미 본위로 안부를 묻는 내용이나 팬레터였다.
빠른 속도로 하나하나 갈무리하던 엘레노어의 눈에 제국 인가청에서 날아온 편지가 눈에 띄었다.
봉투를 열어 본 엘레노어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무슨 내용입니까?”
“제가 이제 더는 엘레노어 마리체 남작 부인이 아니라는 내용이네요.”
제국 인가청에서 온 공문이었다.
엘레노어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방안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