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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82화 (82/120)

제82화

블레인은 처음 소식을 접하는 미나 즈와 클로드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황제가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알려졌지만, 지금 부추기고 있는 건 황녀입니다. 그녀가 에오가 이노스에 합류하면서부터 대화나 협상의 여지는 차단되고 무력시위로 완전히 변질됐지요.”

황녀의 이미지가 워낙 천사 같았으므로 두 사람이 곧이곧대로 받아들 일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미나즈의 입에서 곧장 욕설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꼬맹이 같으니. 그렇게 새카만 속내를 품고 있었다니. 그 깜찍한 수작에 제국 전체가 속아서 놀아날 뻔했군.”

미나즈는 황녀에게 속은 것이 무척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생각해 봤나?”

미나즈와 클로드는 우선 이쪽의 의중을 탐색할 생각인 듯했다.

다들 생각에 잠기자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한마디 꺼내도 될까요?”

“얼마든지.”

엘레노어는 그간 방에서 근위대가 모여드는 모습을 보며 혼자 생각한 것들을 말했다.

“제국은 결국 여러분이 통치해야 하는 국가지요.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일 거예요. 벼룩을 잡으려 헛간 전체를 태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엘레노어는 대규모 전투만은 피하고 싶었다.

이미 오랫동안 거주 중인 팰리시티는 그녀에게 있어서 제 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존중하고 사랑했다.

그런 곳이 누군가의 이권 때문에 전쟁터로 변하는 것이 싫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말려들어 죽는 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엘레노어는 언젠가 고대 병법서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아직은 맞붙은 게 아니라 상대도 우리도 모의 단계예요. 그러니 지금 싸우려는 의도 자체를 부수는 게 최선이며, 안 되면 외교를 파훼하고, 그조차 실패했을 때 적과 맞서 싸워야지요. 성과 시가지를 부수기에 이르면 이겨도 승리라고 부를 수 없다고요.”

말을 마치자 별로 기대치가 없는 듯 기울어져 있던 미나즈의 고개가 꼿꼿해져 있었다.

엘레노어는 긴장한 얼굴로 모두의 반응을 기다렸다.

“연애 상담이랑 파티밖에 모르는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들은 대체 어떻게 생각해 낸 거야?”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미나즈였다.

“나 역시 피를 흘리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해. 황제는 그걸 바라는 모양이지만, 거기에 응수하면 제국은 혼란에 빠져. 그럼 결국 누가 승리하는 모두가 진 전쟁이 될 거야.”

“황녀가 교전을 원하는 건 그게 가장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상대의 장단에 맞춰 줘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소.”

공작 부인이 말하는 사이 리안도 앞에 놓아 둔 종이에 뭔가를 쓰고 있다가 펜을 내렸다.

그를 대신해서 블레인이 모두에게 들리도록 읽었다.

[나의 개인적인 문제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 건 원치 않습니다. 전면 전은 피해야 합니다.]

전쟁으로 번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 동일한 듯했다.

공작 부인이 미나즈를 향해 물었다.

“교전 외에 다른 방안을 생각해 둔게 있소?”

“네. 아마 여러분들도 많이 있으시겠지요.”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노어가 제안했다.

“생각의 궤는 대략 확인한 거 같으니 모두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방향성을 간단히 적어서 동시에 확인해 보면 어떨까요?”

모두 그녀의 의견을 수락했다.

잠시 종이에 깃펜이 사각거리는 소라만이 지하실에 울렸다.

다들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으므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두 쓴 것을 앞으로 펼쳐 주세요.”

공개된 종이의 내용을 확인한 일동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대외적으로 황녀의 신뢰를 무너뜨려 고립시킨 뒤 일시에 제압한다.]

[황녀의 이면을 널리 파헤쳐 실각하도록 여론을 유도한다]

[제국민들의 동의를 얻어 문제의원흉을 제거한다]

표현 방법은 제각각이었지만, 결국 결론은 같았다.

“황녀를 파헤쳐 제국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제거해야만 해.”

“제 생각에도 그렇게 하면 이 병력은 피를 흘리지 않고 해산할 수 있막상 결행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떨렸다.

엘레노어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다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자신은 이미 작위도 빼앗겼고 목숨까지 불안정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나 공작들은 달랐다.

얻을 것이 많지 않고 잃어버릴 것은 많은데 뛰어드는 것이기에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다.

“괜찮고 괜찮지 않고를 따질 문제가 아니지. 그런 악한 천성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 분명 재앙을 일으킬 거야. 재앙의 싹은 미리 뽑아야만 하겠지.”

“이미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손익을 계산하기 보단 목적을 달성할 뿐입니다.”

미나즈와 클로드는 한 점의 망설임없이 즉답했다.

“먼저 부당하게 건드린 것은 저쪽 이네. 어리석은 황제에게 북방의 방식을 보여 드리지.”

공작 부인 역시 피로한 기색이 가득한 데도 눈빛에는 의지가 가득했다.

‘불평할 시간이 있으면 낭비하지 말고 복수를 계획하라.’

그녀가 말했던 북방 격언을 떠올리고 엘레노어는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슬슬 일어나서 황제 폐하를 마음껏 피곤하게 만들어 보자고.”

해가 뜨기 전에 돌아가야만 했으므로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미나즈가 나가는 리안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당신이 모든 일이 중심으로 나서 주어야만 하니까 일에 차질이 없도록 빨리 부상에서 벗어나야 해요.”

긴 회담 내내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의사소통을 했던 리안이었으나 나갈 무렵이 되니 긴장이 풀려 버린 듯했다.

“넴.”

짧은 대답이었으나 미나즈의 눈이 번쩍 뜨이는 게 보였다.

“왜 이렇게 귀엽게 대답하죠? 뭐야?”

당황한 리안이 얼굴을 붉히며 물러 섰다.

“아무래도 궁금해서 안 되겠어요.

조금 보여 주시죠.”

미나즈가 복면 끈을 끌어 내리자 리안의 아직 조금 붓기가 남아 있는 뺨이 드러나고 말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폭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핫, 부어 있는 거였구나, 귀여워! 귀여워!”

“만디디 마십시어.”

“하하핫, 발음도 그 상태예요? 아, 앞으로 어떻게 해요?”

“곰방 갠차나 질곰니다.”

미나즈와 클로드가 웃어 대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지하를 벗어나야만 했다.

제국의 앞날이 걸린 중요한 회합은 그렇게 웃음과 토라진 리안의 얼굴을 남긴 채 끝났다.

*

“오늘 도착한 병력은 어떻게 되지?”

“서부의 론다 자작과 남부의 리카르도 방계 가문에서 보낸 이들입니다. 전투 경험이 많지 않아 외곽 지원 부대로 보냈습니다.”

보고와 동시에 체펠린이 벽에 걸린 지도에 표식을 남겼다.

한 발짝 물러서 그것을 바라보며 체펠린은 제국 공작들의 세력을 한눈에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황제의 영향력이 강한 중앙을 제외하면 서부와 동부의 귀족들이 단연 코 참여율이 높았으며 반면 북부에서는 어느 귀족도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아직 가문을 이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미나즈와 로우앤의 세력 기반이 약하고 북방에서 직접 거주하며 통치한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통솔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결과였다.

“지방에서 교전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수도 외에도 거점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행동으로 나서려면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은가.”

“완벽히 준비되려면 최소 한 달가 량 걸릴 것입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에 앉아 있던 황녀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요? 슬슬 행동에 나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황녀가 또다시 재촉을 시작했다.

대체 뭐가 그리 급한 걸까?

실연의 상처가 너무나도 커서 머릿속에 보복만이 남은 건가.

사랑스럽고 영리한 소녀는 사라지고 조급함에 쫓기는 고집쟁이의 면모가 드러났다.

“제국이 넓은 만큼 도착은커녕 이제야 기별을 받고 있는 귀족들도 많습니다. 지방의 왕당파들이 병력을 보낸 틈을 타 반대 파벌에 밀리지 않도록 안배도 해야 하니 쉽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압도적인데 빨리 결론을 내는 게 낫지 않나요? 이렇게 시간을 주면 적들이 대비 행동에 나설 거라고요.”

“칼라브리아 백작 저의 규모가 엄청나지만, 실제 공격할 수 있는 면적은 무척 좁습니다. 게다가 비하인 드 나이츠가 한점 돌파해 아예 제국 바깥으로 흩어지면 더욱 골치가 아파집니다. 완벽히 포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체펠린이 적절히 설명해도 황녀는 막무가내였다.

자꾸 돌격을 주장하는 그녀에게 체펠린이 몇 번이고 반복한 설득을 시작했다.

“빠른 해결을 원한다면 여전히 대화가 가장 좋은 수단입니다.”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시는군요.

상대와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실제 병력이 이만큼 모였으니 그저 말로 위협하는 것보다 훨씬 위협적일 것입니다. 코앞에 칼이 들어왔는데 그저 의연할 수만은 없겠지요.”

황제는 숙고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여지없이 황녀가 자르고 들었다.

“그만두세요. 궁정백께서는 압도적인 병력을 쥐고도 어떻게든 싸움을 피하는 데에만 급급하시네요. 황가가 당한 멸시를 잘 아시면서도 말이죠.”

말하면서 더욱 흥분했는지 황녀는 자신의 감정을 못 이기고 벌떡 일어나 말을 뱉었다.

“저는 이런 실랑이에 지쳤어요. 이제 슬슬 뜻을 헤아려 행동하실 때가 된 거 아닌가요?”

“지치셨다면 돌아가서 쉬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폐하께서도 황녀 전하께서 너무 힘들지 않나 우려하고 계십니다.”

“이런 비상시국에 어떻게 편히 쉴수 있겠어요. 제가 걱정된다면 모든 일을 최대한 빠르게 끝내 주세요.”

결국, 황녀와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체펠린은 에오가이노스를 물러 나왔다.

‘역시 나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가.’

최선을 다해 막으려 했지만, 이제 내전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체펠린은 무거운 마음으로 개인 집 무실에 들어섰다.

그러자 안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서성거리고 있는 부하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호법청에 이상한 제소가 들어왔다.

고 합니다. 내용이 심상치 않아 즉시 알려야 할 것 같아 왔습니다.”

“이상한 제소?”

부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돌말린 양피지를 내밀었다.

“유니스 백작의 아들 에이드리언유니스가 불법 감금 및 고문으로 황녀 전하를 제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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