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혀의 피부를 벗겨 냈다고요?”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블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혀를 자르려다 문득 당신 손에 끼워진 스트링 스톤을 보고 떠올렸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에 끼워진 까만 반지를 보았다.
“그걸 끼고 거울을 확인하며 선이 사라질 때까지 조금씩 살갖을 벗겨냈다고 합니다.”
자신이 기절한 사이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건가.
설명을 듣고 나니 엘레노어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다행한 일이고 너무 잘한 일이긴 한데 어쩐지 리안답지 않아서 놀랐다.
잠들기 전에 보았던 그라면 그런 섬세한 작업을 하기보다는 전혀 망설임 없이 대범하게 혀를 휙 잘라버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눈을 깜빡이고 있자 블레인이 씩웃으며 물었다.
“당신이 리안에게 스스로 소중히 하라고 했다지요?”
“아… 그건….”
“그래서 리안이 지킬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 본 거 같습니다. 덕분에 상처를 최소한으로 만들었고요.”
블레인은 거기서 뺨을 살짝 긁적이며 덧붙였다.
“그 외에도 뭐 별이 보였다나 어쨌다나 하던데… 뭐 결국은 당신의 말때문이었겠죠.”
별? 그건 또 무슨 얘기지.
의아한 표정으로 리안을 돌아보자 그가 블레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엘레노어는 미소지었다.
어쨌든 자신의 호소가 리안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게 무척 기뻤다.
“피부만 벗겨 낸 거라면 치유될 수 있겠군요.”
제국은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지만, 대신 신비한 효능을 지닌 약초나 시술이 많았다.
외과 수술이 필요한 상처는 거의 치료할 수 없는 반면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상처는 흉터 하나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절단된 팔이 다시 솟아나는 게 하는 건 불가능해도 자연적으로 재생되고 아무는 것들은 오히려 현대보다 나은 예후를 보였다.
“네. 필요한 약재도 전부 있으니 얼마간이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정말 잘됐네요.”
리안이 괜찮아질 수 있다는 말에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걱정이 사그라들자 묻어 두었던 섭섭함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리안을 돌아보며 샐쭉하게 물었다.
“그런 거면 왜 내게 말 안 한 거예요. 얼마나 걱정했는데.”
리안은 대신 대답해 달라는 듯 블레인을 바라보았지만, 방금 노려본 탓인지 블레인은 못 본 척 딴청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리안이 얼굴을 붉혀가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바르미… 이사해소…….”
발음이 이상해서?
“당시니 시러하까 바….”
내가 싫어할까 봐 피했다는 건가.
“살면서 멋지지 않아 본 적이 없으니 당황했나 보죠.”
블레인이 킬킬거리며 슬쩍 끼어들자 리안이 또다시 눈을 가늘게 뜨며 눈총을 주었다.
“바보네요. 그런 거로 사람을 싫어하진 않거든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싫기는커녕 리안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남자가 귀여울 수 있다니.
역시 잘생기고 볼 일이다.
“그럼 이 복면은 왜 쓰고 계신 건가요?”
“최대한 빨리 나을 수 있는 약을 발라 달랬더니 상처 부위가 엄청 부어서….”
대신 대답하던 블레인이 말을 맺지 못하고 다시 웃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길래 저렇게 웃는 걸까.
“나도 보고 싶어요.”
엘레노어의 말에 리안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브어서… 이상함미다.”
“괜찮으니까 보여 주세요.”
엘레노어는 직접 리안의 복면으로 손을 가져갔다.
목뒤로 맨 끈을 잡아당기자 부드러운 천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곧이어 드러난 모습에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귀여워!’
혀가 많이 부어서 마치 볼 양옆에 커다란 사탕을 문 것처럼 빵빵했다.
리안이 흰 뺨을 붉히며 더듬더듬설명했다.
“으사가 일즈일망 이쓰면 나는다고 해서… 기다려는데 더 브끼만 하고..”
의사가 일주일만 있으면 낫는다고 해서 기다렸지만, 더 붓기만 했다는 말인 듯싶었다.
뒤에서 블레인이 꺽꺽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귀여운데요.”
“지짜여?”
되묻는 모습을 보니 엘레노어도 참을 수가 없었다.
풋하고 웃음을 터뜨려 버리자 리안이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당싱까지 웃늠 곰니가….”
침울한 리안의 목소리에 엘레노어는 웃음을 간신히 삼키며 말했다.
“저 아까 창문 너머로 공작 부인이 어깨를 떨면서 우는 모습을 봤거든요. 그래서 대단히 심각한 줄 알고 좌절했다고요.”
“그건 얘기하던 도중에 웃음이 터져서 그런 거라네. 너무 웃음이 나와서 몸을 가눌 수가 있어야지.”
“저도 지난 며칠간 웃느라 배에 복근이 좀 생긴 거 같습니다.
블레인이 웃느라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리안이 당신에게 알리면 외국으로 망명가겠다며 난리를 피우는 통에 말을 못 했습니다. 대충 설명이라도 하려 했는데 생각만 해도 자꾸 웃음이 나오는 바람에…….”
공작 부인 역시 블레인의 설명에 그게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는 그간 두 사람과 마주쳤을 때의 장면들을 되새겨 보았다.
두 사람은 얼굴을 굳히며 입술을 깨물고 돌아서거나 이상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게 다 웃음을 참느라 그런 거였구나.’
항상 완벽한 리안의 굴욕(?)이라 그런지 더 반응이 격해지는 모양이었다.
“이대로도 아주 좋으니까 이제 피하지 마세요.”
리안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강아지가 생각나는 움직임이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핑크빛 분위기를 조성하는 건 그쯤 해 두거라.”
귀여운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으려니 공작 부인의 엄격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에이브로트 공작으로부터 전갈이 왔네. 슬슬 바깥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만 해.”
공작 부인은 에이브로트 공작에게서 받은 거로 추정되는 자그마한 봉투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원했든 원치 않았든 많은 사람이 말려든 마당에 무책임하게 서로만 챙기는 건 용서할 수 없네. 연애는 모든 게 해결된 후에나 하도록해.”
엘레노어도 이런 상황에 눈치 없이 연애에 신경 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안은 다소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그래도 완전히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니네.”
나중에 하라고 했지, 하지 말라고는 안 했다.
공작 부인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훨씬 나아진 셈이었다.
“리안. 너도 대답해.”
대답을 재촉하자 리안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아라픔미다.”
리안은 비장한 얼굴을 했지만, 대답이 나오자마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버렸다.
너무 웃은 나머지 이제 울기까지하는 블레인을 노려보며 제국 최고의 기사는 시무룩해져서 방을 떠났다.
그 침울한 뒷모습을 보며 엘레노어는 오랜만에 아주 마음껏 웃었다.
*
문이 열리자 미나즈의 놀란 목소리가 울렸다.
“온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의 지하실.
칼라브리아 공작과 접선했던 곳에 또 다른 방문객이 찾아들었다.
미나즈는 검은 후드를 벗고 있는 엘레노어, 리안, 그리고 블레인과 플로이드 공작 부인을 차례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까지 대체 어떻게 온 거죠?
황실 근위대에게 들키지 않았어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무술에 조예가 없는 인원을 데리고 완전히 눈을 피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블레인이 질문을 받았다.
“오는 길에 보이는 파수들은 전부 처리하고 왔습니다.”
“뭐? 그래도 괜찮아요? 오히려 더 소동이 일어나는 거 아니고?”
미나즈가 리안을 향해 묻자 평소엔 과묵한 일라이가 말하지 못하는 단장을 대신해서 설명했다.
“다른 부대에게 신호를 보내지 못하도록 목격자들은 그 자리에서 전부 처단하고 있습니다. 아마 돌아갈 때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뭐? 그러면 내일 시체를 발견하면 난리가 나잖아.”
“전부 쥐도 새도 모르게 옮겨 처분할 겁니다. 갑자기 기사들이 증발한 것 때문에 일대 난리는 나겠지만, 아무 증거도 없이 행동에 나서지는 못합니다.”
이미 비슷한 작전을 수행해 본 듯 자신 있는 말투였다.
“정말 대단하군. 간단하게 말하지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미나즈는 감탄하며 그런 불가능한 일을 너무 쉽게 해치운 지휘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리안의 얼굴을 가린 복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복면은 왜 안 벗어요? 우리끼리 있는데.”
리안이 대신 대답해 달라는 듯 엘레노어를 보았다.
“지하에서 탈출할 때 약간 부상을 당했어요.”
“뭐? 설마 그 잘생긴 얼굴에 상처라도 생긴 거야?”
미나즈 뿐만 아니라 클로드까지 몸을 반쯤 일으키며 경악했다.
리안은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는 게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미나즈가 재차 캐물었다.
“말해 달라고, 중요한 얘기에 집중이 안 되잖아.”
리안의 부기는 많이 가라앉아서 얼굴은 이제 거의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으나 발음은 여전했다.
“상처 때문에 조금 붓긴 했지만, 곧 나을 거라고 하네요.”
“우와. 다행이네.”
엘레노어가 대신 설명하자 미나즈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됐을까 봐 긴장했잖아. 저 얼굴은 나라에서 문화유산으로 보호 해야 하는데 말이야.”
리안은 그녀의 호들갑이 민망한 모양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동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엘레노어는 역시 솔직히 얼굴이 무사한 걸 확인한 순간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마음이 찔려 말을 돌렸다.
“아무리 비하인드 나이츠라도 무한대로 시간을 끌 수는 없겠지요. 빨리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해요.”
그렇게 에이브로트, 로우앤, 플로이 드의 세 공작 가문과 리안, 엘레노어, 블레인이 참석한 비밀 회합이 시작되었다.
보르미아 공작은 연령 때문에 직접 참석이 어려워 추후 결과만 통보하기로 했다.
여기서 합의한 사항에 따르겠다는 뜻을 전해 왔으므로 사실상 네 개의 공작가가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심복을 시켜 현재 황실군의 배치를 대강 파악했습니다. 거기 있는 지도를 봐 주십시오.”
그들이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까지오는 사이 미나즈와 클로드도 기다리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클로드가 미리 준비한 자료들을 내보이며 간단하게 현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팰리시티 내에 인원 배치와 군들의 주둔지 현황입니다.”
블레인이 곁에서 엘레노어에게 군사 지도 보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기존 상비군의 네 배 정도 되는 병력이 수도 주변에 이미 도착해 있군요. 이 정도면 팰리시티의 시민들까지 이상 징후를 감지했을 텐데요.”
“현재 시장에서 식료품이나 옷감, 보석 등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네.
민간에도 상당히 불안감이 돌고 있다고 봐야겠지.”
공작 부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가 블레인을 향해 물었다.
“황궁의 움직임은 입수한 게 있습니까?”
블레인은 제국 기사단으로 오래 일했으므로 황궁에 인맥이 넓었다.
그가 시녀나 하급 관리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언급했다.
“황제 폐하께서 매일 귀족을 불러 들여 왕당파에 들 것을 종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 파벌에서도 눈치껏 병력을 각출하라 압박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정말 전쟁을 일으킬생각이로군.”
미나즈의 중얼거림을 엘레노어가 정정했다.
“정확히는 황녀가 전쟁을 종용하고 있겠지요.”
“뭐라고?”
“황녀가 에오가이노스의 집정실에 합류했습니다. 소식통에 따르면 황녀가 사실상 모든 의견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미나즈와 클로드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