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저 애가 내 며느리라고! 이거 놓으라니까!”
도나테의 말에 그녀를 저지하고 있던 일라이가 엘레노어를 향해 물었다.
“정말 당신의 가족입니까?”
호적상으로는 여전히 가족으로 남아 있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나 테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내가 아까부터 맞다고 했잖소!”
일라이의 손에서 벗어난 도나테는 엘레노어에게 다가왔다.
“이젠 너와 얘기를 나누려면 하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냐?”
도나테의 싸늘한 물음에 엘레노어는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여긴 대체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몰라서 묻는 거냐? 너 때문에 수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도나테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설교를 늘어놓았다.
“우리 마리체 가문은 대대로 황가에 충성해 왔다. 그런데 너 같은 걸 집안에 들이는 바람에 이제 황실의 역적으로 몰리고 있어. 황녀 전하께서 은총을 베풀어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너 때문에 멸문될 뻔했다고!”
어찌나 언성이 큰지 집안의 고용인 들까지 모여들어 구석에서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금방 입을 다물 것 같지 않았으므로 엘레노어는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이야기는 방에서 듣겠으니 우선 들어가시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되긴 왜 안 돼? 내가 왜 다른 이의 눈치를 본단 말이야?”
도나테가 엘레노어의 팔을 뿌리치며 호통을 쳤다.
“내게 손대지 마라, 이 천한 것!”
엘레노어를 모욕하는 소리가 홀에 커다랗게 울렸다.
“오늘 아침 황녀 전하께서 네 작위를 빼앗고 나를 복권시켜 주셨다.
너는 이제 더는 마리체 남작 부인이 아니야. 그냥 천박한 농노의 딸일 뿐이라고!”
엘레노어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작위를 빼앗겼다니.
평민이 되면 다시는 파티를 누빌수도 없고 낭독회를 열 수도 없었다.
모여든 메이드들이 입가를 막은 채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귀족이어서 그나마 대우를 해 주었을 뿐 같은 신분이 된다면 핍박이 심해질 것이다.
암울한 생각이 몰려들었나 엘레노어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이런 곳에서 충격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여긴 마리체 영지가 아니라 팰리 시티예요. 귀족이 되었어도 다른 이의 저택에서 만행을 부려서는 안 돼요.”
“만행이라니. 나는 네가 망쳐 놓은 것들을 바로잡으러 온 거야! 전하께서 나를 복권시켜 주신 것은 네 간악한 실체를 사방에 알리라는 의도 이셨으니까.”
도나테는 완전히 의기양양해져서 소리를 더욱 높였다.
“하, 수도에서 잘도 거짓을 늘어놓고 다녔더구나. 시모를 봉양하는 ²륵한 어린 과부? 남편 대신 속죄하는 성녀? 하하. 사람의 거죽을 쓰고 어찌 그렇게 뻔뻔할 수 있단 말이냐!”
수도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 전략을 사용하긴 했지만, 마리체 가문을 이용한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곳이니 오히려 발목을 잡혔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도나테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엘레노어를 면박 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너는 아무튼, 자기 손에 닿는 것은 뭐든지 망가뜨리는 인간이니까!
천한 농노의 딸 주제에 이깟 게 다 뭐야!”
도나테가 우악스러운 손을 뻗어 엘레노어의 머리 장식을 잡아당겼다.
소담하게 땋아 올린 머리카락 위에 꽂혀 있던 고급 장식 핀은 너무나도 쉽게 뽑혀져 나왔다.
곧 풍성하고 보드라운 적갈색의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너무나도 난데없는 봉변에 엘레노어는 당황했다.
도나테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그녀의 목을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목걸이로 시선을 두었다.
“우리 가문의 작위를 팔아 벌어들였나 본데 이런 것도 네겐 어울리지 않아!”
“이건 안 돼요.”
도나테가 리안이 준 목걸이를 잡으려 하자 얌전히 당하고 있던 엘레노어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적당히 해 두시오.”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일라이가 엘레노어의 앞을 막아섰다.
도나테가 또다시 악다구니를 쓰려는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넓은 홀에 위엄 있는 목소리가 울렸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층계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인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이냐.”
“송구합니다, 공작 부인.”
공작 부인이 다가오자 도나테는 엘레노어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대는 누구인데 내 아들의 저택에서 잡음을 내고 있는가.”
그토록 날뛰던 도나테도 공작 부인의 카리스마에 위압된 모양이었다.
입가를 어물거리더니 엘레노어를 돌아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네 입으로 설명해.”
도나테의 명령 따위를 듣긴 싫었지만, 직접 소개하면 분명 더 좋지 않은 소리나 늘어놓을 게 뻔했다.
엘레노어는 하는 수 없이 가장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입에 담았다.
“제… 시어머니입니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미간이 꿈틀했다.
엘레노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추태는 공작 부인에게 결코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공작 부인에게 정말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리안의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기품 있고 사려 깊으며 강인한 그녀를 존경했다.
‘실망하셨겠지.’
원래부터 평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여자라는 걸 알았어도 직접 눈으로 이런 장면을 보는 건 전혀 다를 것이다.
태생부터 고귀한 공작 부인의 눈에 이런 짓을 하는 시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얼마나 흉하게 보일지는 자명했다.
“시어머니라니.”
아니나 다를까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얼굴은 완전히 굳었다.
곧 저 얼음 같은 얼굴에 경멸이 떠오르겠지.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상황에 도나 테가 말뚝을 박은 셈이었다.
‘그나마 쫓겨나면 둘 다 죽을 테니 다행인가.’
황녀는 그냥 엘레노어를 압박하기 위해 도나테를 이용하는 중일 테니까 엘레노어가 죽으면 도나테도 이용 가치가 사라져 처분당할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제 발로 떠나고 싶었는데.
엘레노어가 눈을 내리감은 채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그건 이제 나 아니었나?”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중얼거림에 엘레노어는 눈을 떴다.
‘이게 무슨 말이지?’
이해하지 못한 건 그녀만이 아닌 듯했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공작 부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 아이는 그대의 아들과 혼인한 게 맞으나 현재 사별한 것으로 알고 있소. 혼인 관계가 사라졌으니 그대와의 고부 관계도 소멸했을 텐데.”
“하지만… 저 애는 여전히 마리체 가문의 이름을 단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땐 저 아이가 마리체 가문의 수장이었으니까 그랬겠지. 그러나 아까 언성 높여 외치기를 작위도 그대가 환수했다고 하지 않았소?”
공작 부인의 질문에 도나테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부부의 연은 천륜입니다. 아무리 제 아들이 죽었다고 한들 어찌 그 연이 끊긴단 말입니까?”
“명이야말로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하늘이 끊었다면 하늘의 연도 사라지는 게 마땅하오.”
도나테는 할 말을 생각하는 듯 눈을 깜빡였으나 빈틈없는 공작 부인의 논리에는 파고들 구석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방금처럼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저 아이는 우리 가문에서 돈을 주고 사들인 아이니까 가문 소속의 노예나 마찬가지입니다. 고부 관계는 끊겨도 채무 관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 애가 그간 마리체 영지에 환원하고 그대의 아들의 피해자에게 보상한 자금의 규모는 영지 전체를 사고도 남을 것이오.”
“노예가 벌어 온 돈은 당연히 주인의 것이지요. 그런 건 계산이 들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도나테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엘레노어를 노려보았다.
“이제 가문 망신은 집어치우고 영지로 돌아가 네 신분에 걸맞게 살자 꾸나. 반반한 얼굴로 요망하게 제국을 어지럽히지 말고 하던 대로 장작이나 줍고 허드렛일을 해.”
어딘가로 도망쳐 이름 없는 촌부로 생을 마치더라도 도나테를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엘레노어는 반격할 새도 없었다.
“경고하건대 그 애에게 손대지 마시오.”
공작 부인이 엘레노어의 앞에 서며 도나테에게 명령했다.
도나테는 겁을 먹은 기색을 보이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다른 가문에 일에 간섭하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대체 무슨 권리로 가로막는 겁니까?”
“그대야말로 지금 누구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거지?”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내리깔렸다.
홀 안의 분위기가 서리라도 맺힐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공작 부인은 코끝을 치켜들며 도나 테를 내려 보았다.
“감히 변방 남작 나부랭이가 제국의 공작에게 이따위 태도를 보이다니. 목숨을 부지하기 싫은 모양이군.”
“저, 저는… 황녀 전하의 명을 받고..”
“그 입 다물어!”
일정한 톤을 유지하던 공작 부인이 호통을 쳤다.
뒤에 서 있는 엘레노어조차 흠칫할 정도로 섬뜩한 일갈이었다.
“다시 한번 내 안전에서 그따위로 입을 놀렸다가는 사지를 찢어서 매의 밥으로 주겠다.”
귀족 간의 살인은 엄중히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런 반박 따위는 입 밖에 낼 수조차 없었다.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벌벌 떨면서 뒷걸음질 치고 있던 도나테는 거의 구르듯이 돌아서 꽁무니를 뺐다.
그녀가 사라지는 걸 보고서도 홀에 있던 이들 대부분은 박력에 질려 입을 열지 못했다.
언제 나왔는지 블레인이 난감한 어조로 토를 달았다.
“공작 부인, 아무리 그래도 같은 귀족끼리 그 언행은 조금.….”
“불만 있으면 공작하라고 해.”
짧게 일축해 버린 뒤 공작 부인은 엘레노어를 돌아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별로, 칼라브리아 공작 부인이 내게 텃세를 부리던 게 생각났을 뿐이니까.”
무뚝뚝하게 말하고 공작 부인은 곧 다른 화제를 꺼냈다.
“듣자 하니 크레니아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다던데.”
히스테리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찔리는 구석이 있긴 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꼿꼿하던 자네답지 않군. 무슨 일이 있었나?”
“간신히 사지에서 돌아왔는데 누구도 상황에 대해 알려 주지 않으니 답답하네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자 공작 부인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안이 그대를 피해 다니고 있지.”
“공작 부인께서도 그러시지 않았나요?”
공작 부인은 부정하지 못했다.
“이유를 말해 주세요. 피하시지 말고요.”
“그 문제에 나는 끼어들 수 없어.
두 사람이 직접 얘기하는 게 나을 거야.”
“하지만 백작님은 저만 보면 자꾸 도망가시는걸요.”
엘레노어의 말에 공작 부인이 어째서인지 입술을 깨물었다.
“백작님이 공작 부인과 이야기 나누시는 모습을 봤어요. 돌아서 울고 계시던데… 그렇게 부상이 심각한 건가요?”
걱정스레 묻자 이번에는 공작 부인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녀는 입가를 짚으며 고개를 숙이더니 감정을 가다듬는 듯 잠시 심호흡을 했다.
“리안의 방으로 데려다줄 테니 얘기해 보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야.”
엘레노어와 함께 홀을 나서며 공작부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시어머니로서는 내가 저 여인보다 훨씬 낫지?”
“네?”
“아무것도 아니라네.”
엘레노어와 블레인, 그리고 플로이 드 공작 부인은 복도를 지나 본관 3층의 구석방에 도착했다.
노크하려던 엘레노어는 문 너머에서 작은 목소리를 감지했다.
그것은 리안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집사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랑은 대화하면서 왜 나만 안 된다는 거야.”
갑자기 서러움이 한 번에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엘레노어는 벌컥 문을 열면서 리안을 불렀다.
“칼라브리아 백작님!”
엘레노어를 본 리안은 화들짝 놀란 기색이었다.
그가 도망치기 전에 엘레노어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말할 수 있으면서 왜 내게만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불편해졌으면 그냥 그렇게 말해요! 귀찮게 매달릴 생각은 없으니까!”
리안은 보라색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는 그에게 엘레노어가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요. 나도 이제 백작님이랑 얘기 안 할 거예요.”
강경하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때였다.
드디어 그토록 듣고 싶던 리안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런 게 아임미당!”
뭐야? 이 갓 말하기 시작한 어린애 같은 발음은?
당황해서 돌아보니 새빨개진 리안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블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블레인이 폭발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블레인의 웃음소리가 커다랗게 방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