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서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는 것은 슬슬 한계였다.
엘레노어는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려고?]
“부탁이니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앉아 있는 거보단 재미있는 걸 구경하게 될 테니까.”
베아트릭스는 콧방귀를 뀌었으나 역시 심심한지 방해할 기색은 없었다.
밖으로 나와 본관으로 향하는 긴 회랑을 지나니 저 멀리 울타리 너머황실 근위대가 보였다.
가택 연금을 칼라브리아 백작 저로 옮겨 달라 요청한 플로이드 공작 부인을 감시하기 위해 따라온 병사들이었다.
‘숫자가 점점 많아지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공작 부인은 냉정하게 만남을 거부하고 모두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이유조차 몰라 답답해 죽을 노릇이었다.
[어쩔 생각이지? 그 녀석을 찾아 방 하나하나씩 뒤져 볼 생각인가?]
베아트릭스가 약 올리듯 물었다.
엘레노어가 자꾸 찾아오자 리안은 이제 매일 방을 옮겨 다니며 피하고 있었다.
이 넓은 저택을 전부 뒤지려면 종일 걸릴 거고, 그녀가 그렇게 누비고 다니면 시종들을 통해 리안의 귀에 들어가 언제까지고 만나지 못할 것이다.
엘레노어는 조금 더 편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슬슬 자작님이 돌아올 시간이니까.’
블레인은 비하인드 나이츠의 훈련에 동참했다가 정확히 이 시간 즈음에 귀가했다.
그녀는 입구 부근에 숨어 대기했다.
예상대로 블레인이 곧 들어왔고 그는 방으로 가는 대신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미행하자 그는 세 번째 별관과 성벽 사이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탁 트인 공터에 검술 훈련을 위한 표적이 몇 개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엘레노어는 눈을 빛냈다.
‘백작님!’
넓은 어깨에 작은 두상.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는 플레티넘 블론드.
얼굴을 보지 않아도 리안임이 분명했다.
감격해서 리안을 보던 엘레노어의 기분은 이내 무거워졌다.
죽음의 명령을 피했다 하더라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을 테니까.
리안에게 기척을 들킬 우려가 있어 엘레노어는 우선 더 다가가지 않고 먼 곳에서 관찰했다.
블레인이 리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이, 리안.”
엘레노어는 흠칫했다.
또렷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뭔가 리안의 대답 같은 것이 들렸기 때문이다.
귀를 의심하고 있는데 리안에게 완전히 접근한 블레인이 또다시 말을 걸었다.
곧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둘을 보고 엘레노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말을 할 수 있어?’
내용까지 잘 들리진 않았으나 분명 필담이나 수화가 아닌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백작님이 혀를 자르지 않았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반듯한 이마와 또렷한 콧날과 깊은 눈매.
거기까지는 리안이 확실했으나 코부근까지 복면을 두르고 있었다.
입가를 가린 걸 보면 역시 다친 걸까.
혼자 결론을 내리기보단 리안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걱정했어요, 그간 어떻게..…..”
빠르게 달려가서 엘레노어는 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다가갈 때까지 머뭇거리던 리안이 뒷걸음질 쳤다.
“백작님?”
드러난 얼굴 반은 온통 곤란한 기색이었다.
늘 그녀를 보면 반짝반짝 빛나던 눈조차도 거부의 빛을 띠고 있었다.
리안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심지어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젓더니 이내 돌아서 버렸다.
“어디 가세요. 잠깐이라도 좋으니 저와도 얘기 좀 해요.”
엘레노어는 면전에서 무시당하자리안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러나 리안이 엘레노어의 손을 뿌리쳤다.
“리안. 아무리 그래도…….”
그 모습은 최근 냉담하던 블레인마저 너무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엘레노어가 당황해서 굳어진 사이 리안은 머뭇거리다 그대로 도망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왜 도망가는 거야..….”
엘레노어의 예쁜 입술 사이로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딱히 괴롭히려던 것도 아니고 그저 소식이 궁금하고 반가웠을 뿐이다.
피해 다니긴 했어도 설마 이렇게 직접 만났는데도 저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너무나 차가운 반응에 할 말을 잊고 서 있는 엘레노어에게 블레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얘기가 통하지 않으니 방에 돌아가 있는 게 나을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블레인도 리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엘레노어는 하릴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하하하. 네 말대로 재미있는 구경을 했네.]
베아트릭스는 방 안에서 침묵에 잠긴 엘레노어의 귓전에 대고 요란하게 웃어 댔다.
그녀가 아무리 놀려도 엘레노어는 무시한 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심심해진 듯 저녁 무렵이 되자 엘레노어에게 슬쩍 귀띔을 남겼다.
[재미의 보답으로 하나 가르쳐 주지. 지금 있는 별관 탑에서 오늘 녀석이 머무는 방이 보일 거야.
놀리는 거란 걸 알았지만, 그래도 미끼를 물 수밖에 없었다.
엘레노어는 밤이 되자 베아트릭스가 말한 별관 탑으로 향했다.
마침 커튼이 걷혀져 있어 방 안의 광경을 엿볼 수 있었다.
여전히 복면을 쓰고 있는 리안이 플로이드 공작 부인과 함께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역시 말을 할 수 있네.’ 리안은 뭔가 다소 화난 듯한 반응을 보이다가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뭐라 외치는 듯한 기색을 보이더니 공작 부인에게 방 밖으로 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공작 부인은 물러나는 대신 입가를 짚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깨를 떨고 있는 공작 부인의 모습에 엘레노어는 깜짝 놀랐다.
의문을 풀려고 나왔는데 뭔가 해결되긴커녕 궁금한 것이 증폭되기만 했다.
엘레노어는 착잡한 시선으로 공작부인을 바라보았다.
얼마가 지나자 공작 부인은 간신히 눈물이 잦아는 듯 굽혔던 몸을 펴더니 이내 방을 떠났다.
[감상이 어때?]
베아트릭스가 여전히 킬킬거리며 물었다.
엘레노어는 대답 대신 탑의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종일 갇혀 있던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잘 관리되고 있는 자신이 직접 조성한 정원을 둘러보던 엘레노어는 남쪽에서 처음으로 비앙카스타를 발견했다.
‘이곳에 와 있었구나.’
지금까지 전혀 마주치지 못했는데 그 이유를 조금쯤 알 것 같았다.
비앙카스타의 곁에는 에이드리언이 함께 있었다.
이렇게 멀리 있는 데도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의 달콤한 핑크빛 기류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둘은 서로 은근히 건드리고 재잘거리며 설렘을 나누는 중이었다.
‘잘된 모양이네. 다행이다.
황녀에게 고통받으며 누명을 쓴 채 짧은 삶을 마감했을 뻔했던 비앙카스타.
그리고 그에 휘말려 들어 손 하나를 잃어버린 에이드리언.
선한 두 사람이 행복을 되찾기를진심으로 바랐으므로 엘레노어는 무척 기뻤다.
그러나 미소를 짓는 한편으로 번지는 씁쓸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그들을 지켜보아 엘레노어는 터덜터덜 방으로 향했다.
“뭐지…? 저건.”
엘레노어는 문 앞에서 뜻밖의 꾸러미를 발견했다.
나갈 때까지 없었으므로 그사이에 누가 두고 간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열어보자 안에서는 소박한 장미꽃다발과 카드가 나왔다.
카드를 펼쳐 본 엘레노어의 입술이 벌어졌다.
[걱정하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지금의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리안이 두고 간 게 분명했다.
그것을 보니 안심이 되기보다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 나에게만 보이고 싶지 않은 걸까.’
다친 모습에 도망갈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 정도의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나.
가뜩이나 무거운 엘레노어의 마음을 베아트릭스가 긁어 댔다.
[마음을 붙잡아 두려고 하는 거라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원래 연애가 처음인 남자는 미안해서 한 번에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하고 질질 끄는 법이지.]
아니라고 차갑게 쏘아붙이고 싶은데 묘하게 일리가 있었다.
한층 복잡한 심정으로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
그녀를 불러 세운 것은 꼿꼿한 표정을 짓고 있는 4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엘레노어는 그녀가 공작 부인의 집사장인 크레니 아임을 떠올려 냈다.
엘레노어가 꽃이 보이지 않도록 꾸러미를 등 뒤로 돌며 여미는 사이 크레니아가 다가와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저택을 헤집고 다니면 곤란합니다.”
“네?”
“백작님과 공작 부인께 당신이 계속해서 접근하려 하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두 분을 대신해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크레니아가 안경을 치켜들자 안경알이 벽 등에 반사되어 번쩍 빛났다.
그 모습이 그녀의 사감 같은 분위기에 무척 어울렸다.
“상대가 피하려고 하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중하는 게 부녀자로서 당연한 덕목 아닌가요?”
이건 무슨 낡아빠진 사고방식이람.
거기다 고위 인사 아래서 일한다고 자기도 그렇게 된 것처럼 으스대는 분위기까지.
“가뜩이나 적은 인원으로 저택을 아름답고 완벽히 관리하느라 어려운데 당신이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받아 줄 때는 제멋대로 굴어도 됐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관심에서 벗어났으면 부디 신분을 자각해 주세요.”
이 저택은 모두 엘레노어가 디자인하고 단장한 곳이었다.
파티 때 엘레노어에게 밀려 공작부인의 총애를 빼앗겼던 게 어지간히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세련되지 못한 견제라니.
“계속 이런 식으로 멋대로 굴면 저택 밖으로 내보내라고 공작 부인께 건의하겠어요.”
“그런 거라면 그냥 지금 바로 건의 하시죠.”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을 말에 엘레노어는 발끈했다.
지금은 이쪽에서 먼저 당장 나가버리고 싶을 정도로 폭발 직전이었다.
“당신은 여기서 나가면 갈 데가 없을 텐데요. 자존심이 상하면 목숨은 내다 버리는 성격인가요?”
“목숨을 구걸해서 살아남으려 한 적 없어요. 그런 식으로 천덕꾸러기 대접을 할 거라면 그냥 내보내라고요.”
엘레노어의 말에 크레니아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철이라고는 하나도 없군.”
“뭐라고요?”
“그런 태도는 모두에게 폐가 된다는 거 몰라요? 당신을 구하려다 심하게 다친 백작님께 특히 말입니다.”
막말에 받아치려던 엘레노어의 말문이 멈췄다.
크레니아의 일침에는 폐부를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부디 부탁이니 얌전히 있어요.”
크레니아는 경멸하는 기색을 보이며 돌아가 버렸다.
방으로 돌아온 엘레노어는 기운 없이 창가에 주저앉았다.
이런 수준 낮은 기싸움에서 지다니.
스트레스 때문에 뭐가 어떻게 돼버린 모양이다.
‘이제 어쩌지.’
리안의 외면과 장미꽃.
그리고 냉담한 사람들과 공작 부인의 눈물.
모든 것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이라 하나로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막막한 기분으로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수와 마녀에 둘러싸여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보다도 길이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으나 오늘따라 주변에서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백작 저에 부인을 찾는 손님이 와 계십니다.”
메이드가 그녀를 부르러 나타났다.
손님이라니.
그녀를 찾을 사람도 없고, 있다 한들 황실 근위대가 통과시켜 줄 리도 만무했다.
엘레노어는 의아한 기분으로 일어 서서 본관으로 향했다.
홀에 채 들어서기도 전에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 안에 있는 사람의 혈족이란 말입니다! 황실 근위대도 나를 통과시켰는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다니요?”
“보안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째지는 듯한 목소리의 소유자가 일라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것을 들은 순간 엘레노어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오늘의 일진은 너무하다.
엘레노어는 참담한 심정으로 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엘레노어!”
도나테 마리체.
그녀의 재앙 같은 시어머니가 그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