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황제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황녀를 걱정스레 돌아보았다.
“정말 괜찮겠느냐.”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황녀는 자못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들이니까요. 함께하게 해 주세요.”
그녀는 며칠간 극에 다다른 분노 때문에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했다.
미칠 것처럼 날뛰는 감정을 간신히 누르고 이성이 돌아온 것은 증오와 복수심 때문이었다.
절대로 당한 상태로 모든 게 끝나도록 둘 수는 없었다.
눈물이 멈추자마자 그녀는 황제에게 곧장 달려갔다.
그리고 에오가이노스의 집정에 함께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네가 직접 집정에 나서는 일은 없기를 바랐지만… 이렇게 된 이상 만류할 수도 없구나.”
내내 내키지 않아 하던 황제는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을 잡은 듯했다.
집정 시작을 알리자 가장 먼저 들어선 것은 언제나처럼 체펠린 궁정백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혼자가 아니었다.
체펠린이 함께 들어온 남자를 소개했다.
“황녀 전하. 백작 이델체라고 합니다.”
황녀도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하크메르시아 토벌에 동행한 분이 시군요.”
“그렇습니다. 칼라브리아 백작을 설득하려 했지만, 조금도 말을 듣지 않더군요. 황녀 전하의 심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그는 아첨 섞인 태도로 변명하며 황녀에게 허리를 숙였다.
간사한 눈에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뭐든 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교활함이 넘쳐흘렀다.
“네게 보좌할 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불렀다. 이델체 백작은 오랫동안 궁정에서 일해 지식이 많고 눈치가 빨라 알아서 조율하는데 능하니 지금 네게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거야.”
황제가 자상한 어조로 설명했다.
아마도 체펠린처럼 보좌관 역할을 맡아 줄 사람인 모양이었다.
‘쥐 같은 인간이로군.’
속으로는 경멸했지만, 황녀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정의감이나 사명감에 불타는 부류보다는 이렇게 대놓고 사심을 채우려고 혈안이 된 군상이 그녀로서는 훨씬 다루기 쉬웠다.
“잘 부탁드려요.”
황녀는 짧게 인사를 마치자 곧 황제가 체펠린에게 지시했다.
“바깥의 정황을 보고하라.”
“상비군의 집결은 순조롭습니다.
트로인 회의의 귀족들이 약속한 병력을 차질 없이 보내고 있습니다.”
겨우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팰리 시티 주변은 사방에서 모여든 기사와 군단들로 빼곡해졌다.
여기까지 오면 도성 안의 귀족들에게도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왕당파 외 귀족들의 반응은 어떻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규합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체펠린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이대로 귀족들을 배제하고 진행하는 건 추후 문제가 될 소지가 큽니다. 조금이라도 지지를 모으고 나서 행동에 나서는 게 좋습니다.”
“음. 귀족 회의를 소집하고 각 파벌과 교섭하려면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
“최대한 서두르면 2주 안에 과반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황녀가 입을 열었다.
“병법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세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황녀에게 쏠렸다.
“주둔이 길어지면 쥐가 들끓기 시작한다. 서툰 장군은 곡식을 파먹는 쥐만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불안이라고 하는 쥐가 훨씬 큰 골칫거리다.”
제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가 남긴 아주 유명한 구절이었다.
“2주나 도성 밖에서 대기하면 불안이 싹틀 거예요. 이만한 인원이 모였으니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단숨에 몰아쳐 사태를 종결하는 게 모두를 위해서 낫지요.”
황녀가 굳이 집정에 관여하고자 한 것은 빠른 대응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얘기한 병법상의 문제라기보다 시간을 끌수록 묻어 둔 문제들이 터져 나올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엘레노어 마리체가 탈출한 것은 단순히 연적을 놓친 이상의 타격이었다.
그녀는 바깥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베아트릭스 역시 그 틈을 타 탈출 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움직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들을 모두 잡아 처단하지 않으면 발을 뻗고 잘 수가 없었다.
“황녀의 말이 옳군. 칼라브리아 백작 저를 둘러싸고 속전속결로 끝내도록 하지.”
황제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황녀의 의견을 채택했다.
그러나 체팰린은 의견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서둘러도 속도전으로 끝내지는 못할 겁니다. 농성에 들어간 칼라브리아 백작을 위협할 만큼 많은 병력이 모이지 못했습니다.”
“그거라면 괜찮을 거예요. 칼라브리아 공작가에 부탁하면 되니까요.”
이번에도 황녀가 대신 답을 내어놓았다.
“칼라브리아 공작님께서는 기꺼이 폐하를 위해 협조할 것입니다.”
“이미 결혼이 무산된 마당에 칼라 브리아 공작이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칼라브리아 공작으로서는 이제 황가에 협력해도 얻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공작은 얼마 전 은근슬쩍 팰리시티를 떠나 칼라브리아 공작령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황녀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다시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반드시 응하실 겁니다. 저를 믿고 가서 요구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설득해 보겠습니다.”
체펠린이 마지못해 대답을 남겼다.
“그리고 부대의 지휘는 칼라브리아공작님께서 직접 해 달라 명해 주세요.”
황녀의 첨언에 체펠린이 눈을 크게 떴다.
“아들을 토벌하는 자리에 아비를 선봉으로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번에는 황제까지도 껄끄러운 기색을 보였으나 황녀는 입장을 무르지 않았다.
“전쟁에는 금기가 없습니다. 적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건 뭐든 사용 해야 한다 배웠습니다.”
“하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무리한 요구를 하면 오히려 일이 어그러질 소지가 있습니다.”
체펠린이 계속 반대하자 이델체 백작이 황녀의 편을 들고 나섰다.
“안 된다. 안 된다 하기 전에 되도록 성사시키는 게 궁정백의 소임이 아닙니까? 궁정백께서 하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나 의견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한참 입씨름을 벌이던 세 사람의 시선이 최종 결정권자인 황제에게로 향했다.
“그를 데려와 자기 아들의 죄를 스스로 물도록 하게.”
결국,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황녀는 미소를 지었고 체펠린은 한층 피로해진 얼굴로 회의장을 떠났다.
*
칼라브리아 백작 저의 상황은 미나 즈의 걱정과 정확히 정반대였다.
엘레노어는 리안과 만나기는커녕 그의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스카이가 그렇게 떠난 후 아무도 엘레노어를 찾지 않았고, 밖에 나갈수도 없어서 종일 방 안에 홀로 앉아 근심에 휘말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오직 단 하나 있는 대화 상대는 최악이었다.
[이쯤 되면 죽은 거 아냐? 슬슬 불안하지?]
그녀에게 말을 거는 건 탈출할 때 따라온 베아트릭스였다.
리안이 처치한 마수는 지하 감옥을 지키는 게 아니라 베아트릭스의 봉인이었다.
지하 감옥을 벗어날 수 있게 된 베아트릭스는 칼라브리아 백작 저로 옮겨 와 엘레노어를 괴롭히는 중이었다.
“기껏 바깥으로 나왔는데 나를 염탐하는 것보다 좀 나은 일은 없어요?”
[이렇게 편하고 좋은데 왜 나가?]
마치 자신이 원해서 남아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리안이 자신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조치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침울한 걸 구경하는 것보다 재미있는 게 어디 있지?]
베아트릭스가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지하 감옥에서 사용할 수 있던 신통력은 바깥에서도 유효한 모양으로 그녀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주변 반경을 관찰할 수 있는 듯했다.
그녀라면 분명 리안의 근황을 알고 있을 테지만, 엘레노어를 안심시켜 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리안이 죽었다면서 엘레노어의 신경을 긁어 댔다.
[시체에 의리 지킬 필요 없잖아?
적당히 남자 하나 잡아서 도망치라고, 어디 몰래 만나는 쓸 만한 녀석 없어?]
베아트릭스의 도발에 엘레노어는 문득 스카이를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상했단 말이지.’
당시에는 너무 놀라 버럭 화를 내고 떠나 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힘으로 엘레노어를 취하고자 했다면 스카이에게는 아주 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제법 신사적인 태도로 물러섰던 그가 왜 이제 와서 돌변한 걸까.
게다가 그때 스카이는 뭔가 평소와 달랐다.
초조하고 여유 없는 태도, 거친 말투와 야윈 얼굴.
그가 그런 이상 행동을 벌인 데는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서를 찾기 위해 그가 했던 말과 행동을 되짚어 보았지만, 의심이 가는 정황 외에는 콕 짚어 이렇다 할 점이 없었다.
이내 생각은 스카이와의 키스에 이르렀다.
거기에도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던 것 같다.
평소 절륜하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던 남자답게 무척이나 능숙했다는 것 외에는.
전혀 즐길 상황은 아니었으나 그의 입술과 그 안의 것이 남긴 감촉은 여전히 생생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왜 얼굴이 빨개져? 남자라도 생각하나 본데?]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엘레노어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나마 그걸 이 마녀가 못 봐서다행이지.’
베아트릭스의 신통력은 특정 범위를 전부 감지하는 게 아니라 수정구슬에 특정 위치를 비춰 보는 것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저택이 워낙 넓은 나머지 그녀는 엘레노어를 찾는데 시간이 꽤 걸렸고 그 덕택에 처음 며칠간은 아무런 방해 없이 조용히 보낼 수 있었다.
만약 스카이와 있었던 일을 봤다면 베아트릭스는 즉시 리안에게 가서 전부 떠들어 댔을 게 분명했다.
“백작님이 당신에게 뭐 말한 건 없나요? 혹시 내게 아무것도 전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다든가.”
[내가 그딴 녀석의 말을 들을 것 같아?]
베아트릭스는 카랑카랑하게 받아쳤지만, 순간 멈칫하는 것을 엘레노어는 놓치지 않았다.
리안이 함구령을 내린 게 맞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최소한 베아트릭스를 위협할 정도로는 멀쩡하다는 뜻이다.
‘이젠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