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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77화 (77/120)

제77화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하반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쑥쓰러운데.”

뻣뻣이 굳은 제니트를 향해 스카이가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다.

“알몸을 보고 싶었다면 좀 더 젠틀한 방법이 있네만.”

“나는 그저 내가 벌인 일을 책임지고 수습했을 뿐이야.”

태연하게 받아치는 스카이에게 제 니트의 울분 섞인 질문이 떨어졌다.

“황녀가 당신을 믿고 사랑의 서약을 하게 만들기 위해 종속의 서약을 한 겁니까?”

“그래. 그리고 계획은 성공해서 리안 칼라브리아는 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녀는 풀려났지. 그렇게 되길 바란 거니까 설교는 그쯤으로 접어 둬.”

그리고 스카이는 가운을 벗어 던진 뒤 아무렇지 않게 욕조로 들어갔다.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스카이의 태도에도 제니트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 여인에 대한 마음이 그토록 진심이라면, 차라리 리안 칼라브리아가 서약으로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습니까! 그게 훨씬 당신답고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그의 힘이 없다면 지하에서 구해낼 수 없었어.”

스카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수에게서 도망친 후 부상에 신음하면서 엘레노어를 구해 낼 방법을 수도 없이 그려 보았고, 이것이 그녀가 살아남을 확률이 가장 큰 방법이었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긍지에 대한 문제야. 계산이 빗나가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어떻게 해서든 제 자리로 돌려 두는 것. 그게 나다운 행동이지.”

등을 돌린 상태였지만, 스카이는 자신의 말에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이는 지 알 수 있었다.

향유 때문에 붉은 빛이 도는 수면 서약에서 벗어난 리안 칼라브리아와 황실은 서로 맞설 거고 하나는 사라지게 될 테니까.

가능하면 둘 다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 버리면 좋겠군.”

스카이가 그런 제멋대로인 생각을 하는 동안 제니트의 추궁은 계속 이어졌다.

“당신 하나에 걸린 페이드라 공국의 미래는 안중에나 있습니까?”

“내가 없어도 공국은 문제없이 잘돌아가. 잘 알고 있잖아.”

무심코 대답했다가 스카이는 조금 멈칫했다.

제니트의 날카로운 눈 주변이 움찔대기 시작했다.

충격을 받은 건 미안하지만, 진심이었으므로 스카이는 말을 무르지 않았다.

“페이드라 공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군가 나타나 아무 일도 없이 자리를 메꿀 거야. 아버님은 아직 젊고 왕성하시니 바로 동생이 태어 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지만, 스카이의 말을 듣고 난 제니트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무기력한 말을 하는 분이셨습니까?”

“자꾸 불안해하니 최악을 가정해본 것뿐이야. 그리 나쁘지 않다고 말이지.”

“그리 나쁘지 않습니까?”

제니트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스카이를 내려 보며 물었다.

“당신의 예상이 빗나가 황녀에게 종속되고 꼭두각시가 돼 공국을 제멋대로 주무른다면?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하십니까?”

스카이에게 비참한 현실을 알려 마음을 긁어 놓으려는 의도인 듯했지만, 스카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네가 나를 처단해.”

간결한 결론에 제니트는 경련처럼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못 합니다.”

“어째서지? 너는 나보다 훨씬 나은무력을 지녔으니 어렵지 않을 텐데.”

“그런 문제가 아니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페이드라 공국이 중요하잖아? 감정에 휘둘릴 필요는 없어. 어차피 그때 되면 나 같은 걸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원래부터 좋지 않던 제니트의 표정은 이제 완전히 배신당한 것처럼 변했다.

그는 떨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스카이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그의 턱을 치켜 올려 자신을 향하게 한 뒤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잘 들으십시오. 당신이 한 건 그냥 바보짓이지 긍지도 무엇도 아닙니다. 그냥 그 여자에게 너무 빠져 버린 나머지 죽어 버릴까 봐 겁을 먹고 이성이 마비된 겁니다. 이렇게 하면 절대 그녀가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자신을 희생하다니요.”

그간 제니트가 품고 있었을 의구심들이 소리가 되어 스카이에게 쏟아졌다.

“게다가 마지막의 그 조잡한 연극은 뭐였습니까? 정말 백작 저에서 그녀를 겁탈하려 한 건 아니었겠지요. 그녀가 당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해서 나중에 혹시라도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하려던 거 아닙니까?”

스카이는 아무 말 없이 바다색 눈으로 제니트를 보기만 했다.

제니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물었다.

“제가 그때가 되면 당신을 주인으로 느끼지 않을 거라고요?”

대답을 구하고자 한 질문이 아닌 듯 제니트는 스카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바로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지금도 당신이 주인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당신은 이런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분이 아니셨으니까요.”

스카이는 턱 끝을 조금 들어 올리며 담담히 물었다.

“그럼 곁을 떠나고 싶은가?”

“…지금은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남겨진 스카이보다 따르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제니트가 훨씬 슬퍼 보였다.

“기분을 전환하고 오겠습니다.”

말을 남긴 제니트는 그대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스카이는 욕조에 팔을 걸친 채 나가는 제니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돌아오지 않을 거란 불안감은 없었으나 입안이 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천천히 몸을 돌린 채 제니트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너무 빠져서 겁을 먹고 이성이 마비되었다라… 내가?’

엘레노어에게 호감이 있는 건 맞지만, 그 정도로 깊이 빠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영민한 부하의 말을 듣고 보니 수긍할 구석도 있는 듯했다.

‘감정에 휘둘리다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군.’

스카이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물속에 몸을 깊이 담갔다.

머리끝까지 모두 담그자 생각이 씻겨나가는 듯했다.

그는 그대로 호흡을 멈춘 채 깊은 생각의 바다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

“트로인 회의를 소집하다니. 폐하께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미나즈의 거친 발언에 클로드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예전의 황제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 늙은이들을 불러 모아서 우리를 밀어 버리라 했다고? 정말 상황을 어처구니없는 쪽으로 몰고 가시는군.”

미나즈는 답답한 심경을 내비치듯 소식을 전해온 보고서를 휙 내려쳤다.

“이건 그냥 결혼 문제라고. 그 부분만 제외하면 리안은 말이 통한단 말이야. 충성을 보이려고 목숨 걸고 하크메르시아 토벌까지 다녀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영웅을 죽이겠다고?

완전히 미쳤어. 이해할 수가 없어.”

“우리들의 집단 반항이 꽤 폐하에겐 충격적이었나 보군요.”

“애초에 황녀와 대공의 결합을 정치적으로 견제하지 않았던 게 이상한 거지. 우리 쪽은 지극히 정상이고 명분도 있단 말이야.”

미나즈의 말대로 역사서에서 수도 없이 반복된 상황이었다.

과거를 거울삼아 발을 걸쳤지만, 이번에는 그처럼 상식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힘을 과시한 뒤 회유하는 척하고 적당히 이권을 챙겨 줘서 못 이긴 척 끝내면 될 일에 내전을 일으켜?

이건 최악의 수란 말이야. 우리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철저히 황가에도 자충수라고.”

“이성을 잃어 주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계시나 봅니다.”

“그 모양이니 이젠 곁에서 말리는 멀쩡한 녀석도 없을 거야. 오히려 지금쯤은 주변에서 부추기고 있을 걸.”

그녀의 말은 오래가지 않아 증명되었다.

외부 루트를 통해 트로인 회의 참석자 명단을 받아 확인한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차드에 리카르도… 그 외에도 온통 공작이 될 수 있다면 영혼을 팔 수 있는 녀석들로 가득하군.”

위에 몇 명만 읽어 보고도 미나즈는 질려 버린 듯했다.

로우앤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지금 이게 당신이 바란 상황은 아니겠죠?”

미나즈는 고개를 저으며 선선히 속내를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결혼이 성공하면 낭패지만, 백지 화되면 유리할 거라 생각했지. 칼라 브리아 백작이랑 갈라서려면 우리의지지가 있는 게 편할 테니까. 그때 양쪽에서 내거는 조건을 조율해 보고 적당히 떨어지는 콩고물을 먹으려고 했는데.”

너무나 적나라한 속셈에 클로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나즈가 다시 물었다.

“그러는 너는? 설마 아무 생각도 없이 내가 하자니까 동참했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뇨. 내 속셈도 당신과 비슷합니다.”

매일 툴툴대기만 하다가 간만에 속내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마주 본 상태로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뭐 이제 이렇게 된 이상 완전히 칼라브리아 백작의 편으로 돌아서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미 거의 그쪽으로 돌아선 상태였지만 말이지.”

공작령에 감금됐을 때부터 황가에 마음이 떠났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클로드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 하는 얘기들은 제국을 향한 반역인데. 너무 태연하고 아무렇지 않게 결정하는 거 같아서 당황스럽습니다.”

“별로 반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가 모셔야 할 황제는 바뀌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차기 황제는 칼라브리아 백작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자랐다.

“제가 전부터 말했지 않습니까. 칼라브리아 백작은 공정한 황제가 될 겁니다.”

어쩐지 으스대는 듯한 클로드의 말에 미나즈가 딴죽을 걸었다.

“너 그거 셔츠에 수놓고 다니지 그래. 차기 황제 폐하께서 예뻐해 주실 텐데.”

“좋습니다. 당신도 하나 드릴 테니 입고 다니십시오.”

“어쭈. 제법 받아치는데?”

미나즈는 클로드의 등을 팡팡 두드린 뒤 곧 뒤로 물러섰다.

“자, 그럼 공작 부인의 매를 또 이용할 때가 됐네. 칼라브리아 백작저와 먼저 연락을 주고받자고, 행동에 나서는 건 그다음으로 하고.”

황실 근위대의 봉쇄가 더욱 강해진 탓에 공작 부인이 북방의 매를 부르는 방법을 그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면 바깥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만나서 하는 게 좋은데 말입니다. 잘 전달될지 걱정스럽군요.”

“그러게. 호색한 씨가 오래간만에 재회한 애인을 파고드느라 바빠서 우리 편지에 답장할 틈이 있을지 의문이네.”

엘레노어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은 플로이드 공작 부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미나즈의 농담에 클로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뭘 상상하는 거냐고, 뭐를.”

심각한 상황이지만, 클로드를 놀리는 맛에 소소한 재미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킥킥 웃으며 미나즈는 새카만 매를 방 안으로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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