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제국 트로인 회의.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제국 왕당파의 거대 회합.
분기별로 열리는 정기회의 외에 긴급 소집된 일은 제국 역사상에서도 드문 일이었고, 이번 황제 즉위 후에는 단 한 번 열렸을 뿐이었다.
바로 아일린 하스카토르를 황녀로 인정하기 위한 회의 때였다.
두 번째 회의가 열린 트로인 회의 당의 분위기는 술렁이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고 체펠린이 안건을 발표하자마자 여기저기서 금방 목소리를 냈다.
“칼라브리아 백작을 황실 모독으로 축출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그 스캔들 때문입니까?”
“다른 부마를 맞는 게 낫지 않습니까. 정식으로 약혼했던 것도 아닌데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인재를 실권시킬 것까지야……….”
“지금은 부마보다는 공작들과의 교섭이 우선입니다. 우선 행정 절차를 정성화시키고 봐야 합니다.”
저마다 의견을 쏟아 내는 바람에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체펠린은 노련하게 그들의 말을 멈추게 한 후 분위기를 정리하려 애썼다.
“폐하께서는 황실의 권위를 바로잡으면 그 아래 질서는 자연히 따라올것이라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의견을 내 주십시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분위기는 신통치 않았다.
“황실의 권위를 세우는 데에는 칼라브리아 백작과의 대립보다 협력이 효과적이지 않습니까? 세계 최고의 부를 지닌 최강의 기사는 유례없는 인적 자원입니다.”
“맞습니다. 그를 잃어버리는 것은 제국에서도 큰 손실입니다.”
“과부와 사랑에 빠질 정도이니 야심가나 정치가 기질도 아니지 않소.
타협의 여지가 있지 않겠소이까?”
황실에 거의 맹목적 힘을 실어 주는 왕당파에서도 이토록 의견이 분분할 정도이니 밖으로 나가면 제국이 얼마나 사분오열될지 보지 않아도 명백했다.
그들을 설득해야만 하는 체펠린은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이 의견들을 듣고 마음을 돌리면 좋으련만.’
그러나 체펠린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황제의 편을 드는 이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칼라브리아 백작은 제국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황제 폐하의 은총에 감사하며 스스로 복종해야 마땅한데 사사로운 일로 반기를 들다니. 서둘러 축출해서 본보기를 세워야만 합니다.”
나이가 70이 넘었으나 여전히 정정한 제럴드 후작이었다.
극도로 보수적인 그의 말을 어떤 젊은 귀족이 받았다.
“단순히 본보기를 세운다기에 흘려야 할 피가 너무나 많습니다. 칼라 브리아 백작은 제국 최고의 무인이며 비하인드 나이츠라는 엘리트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칼라브리아 공작가의 후계자가 아닙니까? 그를 단죄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칼라브리아 공작은 공과 사를 구분할 것이오. 누구보다 앞장서서 백작을 단죄하겠지.”
“그래도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이란게 있는 법입니다. 막상 자식에게 칼을 겨누고 싸울 때가 되면 약해질 겁니다.”
제럴드 후작과 젊은 귀족의 말싸움에 다른 귀족들도 하나씩 가세했다.
“점령전이 아니므로 비하인드 나이 츠가 별동대처럼 돌아다니며 타격을 가하면 비슷한 숫자로는 상대할 수가 없소이다. 이 넓은 제국에서 그들을 포위해 섬멸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소.”
“아무리 강하다 해도 보급 문제가 있는데 무한정 돌아다니며 싸울 수가 있겠소?”
“그는 플로이드 공작가의 차기 가주이기도 합니다. 그 정도 인원이라면 제국이 사라질 때까지 건사하고도 남을 겁니다.”
첨예한 대립의 균형이 기운 것은 두 명의 귀족이 나섰을 때였다.
“황가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재능과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라 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칼라브리아 백작이 아까운 인재라 해도 황가의 명예보다 중할 수는 없겠지요.”
중부의 노회한 여우 포란체 리카르도 후작이 말했다.
그러자 굵고 거친 목소리가 리카르도 후작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황실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비하인드 나이츠는 뭐든 황가에 반역하는 무리는 처단할 뿐입니다.”
그는 남부의 젊은 프리차드 보르미아 후작이었다.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구나.’
두 후작이 노리는 것은 뻔했다.
본래부터 후계자가 없는 보르미아공작가.
그리고 리안을 잃고 나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될 칼라브리아와 플로 이드 공작가.
제국의 분열을 노려 공작가의 빈자리를 치고 들어올 속셈인 것이다.
‘헛된 야심을 품은 멍청이가 아니라는 게 더 문제로군.’
두 사람은 공작가 바로 아래 수준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고 야심이 있는 만큼 꾸준히 세력을 정비했을 것이다.
황제에게 분명히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나서자 역시나 몇몇이 휩쓸려 황제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황실 근위대, 제국 기사단과 그 예하 수많은 보병 무대가 있고, 또한 정비된 성과 무기들이 전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결국, 이대로 결론이 나는 건가.
회의당의 모두가 황제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냥 칼라브리아 백작을 내버려 두면 안 되겠습니까.”
어디선가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황녀 전하가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발끈해서 내전을 일으킨다면 타국에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모두가 내심 품고 있던 생각을 누군가 입 밖에 낸 것이다.
체펠린은 당황해서 좌중을 둘러보았지만, 방금 발언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보라.”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황제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가. 정녕 그리 생각한다면 자신 있게 나서서 목소리를 내!”
황제의 호통은 서릿발 같았다.
당연하게도 누구 하나 스스로 말했노라며 나서는 이가 없었다.
“하하. 기회가 생기니 기다렸다는 듯 나서서 황가를 멸시하기 시작하는군. 하하하하.”
적막한 실내에 황제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만이 섬찟하게 울렸다.
“황녀가 거절당해 발끈했다고?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아, 아닙니다. 절대 그런 불경한 생각은….”
갑작스레 지목당한 귀족은 무척 당황해서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황제가 다른 이에게 핏발 선 눈을 돌려 물었다.
“그럼 자네는? 자네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떠올린 순간조차 없습니다! 폐하!”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서 귀족들로 들어찬 회의당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감히 제국에 충성하지 않는 불온한 움직임은 발견하자마자 뿌리를 뽑아야만 하네. 그게 심지어 제국을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는 고위 귀족이라면 빠를수록 좋지.”
귀족들은 뒤를 지나는 황제에게 지목당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떨어뜨리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칼라브리아 백작의 불충과 기만, 그리고 위선을 벌해야만 하네.
장차 제국을 이끌 황녀의 삶을 불경한 사생활로 망신을 주고 책임을 외면하는 자에게 어찌 가장 커다란 권력을 주고 그녀를 수호할 거라 믿는 단 말이야!”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회의당 안에 황제의 분노에 찬 호통만이 울렸다.
“나는 그를 단죄해 제국의 기강을 바로 세울 것이야. 이참에 썩은 적폐들을 쓸어 새롭게 태어난 제국을 황녀에게 물려주겠다!”
쩌렁쩌렁한 포효가 지나간 회의당은 고요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묵직한 음성이었다.
“폐하께 여쭙고 싶습니다.”
체펠린은 시선을 들어 이 분위기를 뚫고 말을 꺼낸 용기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프리차드 보르미아였다.
“칼라브리아 백작의 만용은 그 혼자만의 힘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그를 멋대로 굴도록 방조하는 공작들의 지원 속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현재 그에게 동조하고 있는 공작들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체펠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제국의 시작부터 함께해 온 공작가는 이제 광영에 취해 감사를 모르게 되었네. 그들이 가진 힘은 모두 제국과 황실의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잊은 거야.”
비록 황제는 어긋난 부정으로 냉정을 잃었지만, 타고난 명석함을 잃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이곳에 모인 귀족들이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공작들에게 확인할 생각이네. 계속 그런 권력을 부여할 자격이 있는가 하고 말이야.
늦게라도 제정신을 차린다면 그간의 노고를 고려해 자비를 베풀겠지만, 아니라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위치로 떨어지겠지.”
황제는 천천히 자리로 돌아와 책상을 양손으로 짚고 섰다.
그는 충혈된 두 눈으로 회의당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면 빈자리가 생기게 될 거야.”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 속에서 뭔가 움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격을 보인 이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내 뒤를 이어 황제가 될 딸을 보필할 인재. 누구보다도 우월한 충성을 보인 이들에게로.”
명백한 암시에 귀족들의 눈빛이 변했다.
제국의 공작은 여전히 너무나도 매력적인 과실인 것이다.
“새로운 제국의 역사에 동참하겠는가. 아니면 여기서 패배자로 사라지겠는가. 그대들의 선택일세.”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환성이 울렸다.
“미래의 황제 폐하를 위해서!”
“황실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모든 이가 고조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랗게 목소리를 높였다.
체펠린은 참담한 심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
팰리시티 외곽의 오래된 타운하우스.
그곳의 주인이던 어느 백작 부부가 노령으로 사망한 후 먼 친척들에 의해 인수되어 수도 구경을 온 영주나 지방 귀족들을 위해 임대되곤 하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새로운 임대인 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새하얀 가운에 윤기가 도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드리운 채 이제 막 욕실에 들어선 참이었다.
커다란 대리석 욕조가 뜨거운 온수로 채워진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욕은 예기치 못한 방해를 받았다.
“계속 이렇게 여유로운 척하고 계실 겁니까?”
목욕탕 벽에 목소리가 반사되어 어지럽게 울렸다.
입구로 들어선 것은 제니트였다.
“그게 정녕 공작님께서 내린 결론입니까?”
스카이 페이드라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목욕을 즐기는 게 네게 설교를 들어야 할 일인 줄은 몰랐는데.”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제니트가 언성을 높였다.
부릅뜬 그의 눈빛은 울분으로 가득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째서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네가 언제부터 내가 하는 일에 설명을 요구하게 됐지?”
싸늘한 스카이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제니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내민 손에서 새카만 보석 반지를 본 스카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건 어디서….”
물음을 채 맺기도 전에 접근한 제니 트는 스카이의 가운 끈을 휙 당겼다.
곧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수려하게 드러났다.
제니트는 매끄러운 근육에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피부가 닿자 보이지 않던 것이 나타났다.
조각 같은 복근이 새겨진 오른쪽 복부 아래 아슬아슬한 곳.
거기에 종속의 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