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75화 (75/120)

제75화

자정이 지났을 무렵.

엘레노어는 혼자 방 안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쓸쓸해 보이는군.”

있다고 했다.

어디로 갔나 궁금했는데 여기에 있었다니.

지하를 탈출할 때 리안이 그와 협력했다는 말을 흘렸으므로 무척 반가웠다.

“그럼 빨리 찾아오지 그랬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엘레노어가 성큼 그에게 다가서자 스카이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왜 그래요?”

다가가면 오히려 한 발 더 다가오던 그가 물러나자 엘레노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세히 보니 그는 다소 여위었고 눈가가 조금 붉었으며 피로해 보였다.

“얼굴이 안 좋네요. 어디 다친 거예요?”

“거의 나았어. 좀 잠을 설쳤을 뿐이야.”

왜 잠을 설쳤을까.

그런 것도 스카이와 어울리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고 질문을 던졌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줘요.”

스카이는 담백한 말투로 그가 한 일들을 설명했다.

그가 일부러 지하로 그녀를 유도했다는 말에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 내 리안과 접선하고 함정을 파서 황녀를 불러냈다는 대목에 이르자 엘레노어의 눈이 반짝였다.

“황녀 곁에도 꽤 솜씨 좋은 호위가 붙어 있을 테니 해칠 수는 없지만, 예상대로 본인이 동의한 주술을 진 행하는 데는 끼어들지 않더군. 그 덕에 아주 푹 재울 수 있었지.”

황녀의 약점을 찌른 교묘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미심쩍은 부분은 남아 있었다.

“계략이 잘 맞아 떨어지긴 했지만, 황녀가 용케 의심을 풀고 당신을 믿었군요.”

온갖 일이 안 풀려서 뾰족해져 있을 그녀의 경계를 뚫고 들어가다니.

대단한 일이었으나 스카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 마음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건 내 특기거든. 어린 소녀를 구워 삶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정말 그렇게 쉽게 진행됐을까.

어쩐지 떨떠름해서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데 스카이가 화제를 전환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어.”

그는 벽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지금쯤 황녀는 각인이 사라진 것을 알고 미친 듯이 날뛰고 있겠지.

이로써 황녀는 나를 공식적으로 적대하게 됐어.”

그의 말대로 속은 걸 깨달은 황녀는 스카이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릴 것이다.

잃을 게 많은 공작 스카이가 제국 황실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하다니.

“왜 그런 큰 위험을 무릅쓴 거죠?”

“내가 벌인 일을 수습했을 뿐이야.”

스카이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뭐 당장은 별일이 없을 거야. 사랑의 서약을 하려다 리안을 놓쳐 버렸다고 공표할 정도로 심각한 멍청이는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도 없을 텐데요.”

“그래. 황녀가 나를 붙잡으려 혈안이 돼 있을 지금 제국에 비비고 있는 건 그다지 현명한 일은 아니겠지. 당신의 칼라브리아 백작도 나를 보호해 주지는 않을 테니까.”

스카이의 목소리는 다소 예민하게 들렸다.

그에게서 평소에 짜증 날 정도로 넘치던 여유도 느껴지지 않았다.

“페이드라로 돌아갈 건가요?”

엘레노어의 물음에 스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묻지. 나와 함께 가겠나?”

바다색 눈동자에 초조한 빛이 어려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해 준 마당에 거절하기 힘들었다.

“백작님은 나 때문에 많은 걸 잃었어요. 그의 곁을 떠날 수는 없어요.”

“당신 때문에 뭘 얼마나 희생했느냐 같은 기준으로 남자를 고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엘레노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마지막이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엘레노어는 스카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간 정말 고마웠어요. 가능하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나는 그런 타협 따위는 하지 않아.”

스카이는 거칠게 엘레노어의 말을 끊었다.

“당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줄곧 기다렸지만, 이젠 한계야. 내가 포기할 수 없다면 당신이 마음을 바꾸게 만드는 수밖에 없지.”

거친 말투에 엘레노어는 흠칫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멋대로에 위압적인 남자였지만,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스스로 오지 않게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데려가겠어.”

강제라니.

심상치 않은 기운에 즉시 방을 떠나려 했지만, 스카이가 다가오는 것이 훨씬 빨랐다.

그는 엘레노어의 팔을 붙잡은 뒤 강한 힘으로 당겼다.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그에게 끌려 침대에 눕혀졌다.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어서 놔줘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나? 난 당신이 생각보다 훨씬 나쁜 짓을 많이 해 왔어. 수도 없이 속이고 갈취하고 싸웠고….”

스카이의 모양 좋은 눈매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고개를 더욱 가까이 가져와 음산하게 속삭였다.

“원하는 것을 빼앗아 손에 넣어 왔지.”

그 말과 함께 스카이가 굳은 엘레노어의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시야가 암흑에 휩싸이는 것과 동시에 입가에 뭉클한 것이 닿았다.

“웃.”

그가 키스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엘레노어는 당황했다.

게다가 짧은 입맞춤이 아니었다.

단단히 붙잡혀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그녀를 스카이는 깊이 머금었다.

강압적인 태도와 달리 입술은 다정하고 농밀하며 애절하기까지 했다.

다소 서툰 기미가 남아 있는 리안과 전혀 다른 키스.

그러나 아무리 키스가 능숙하고 눈앞의 얼굴이 유려해도 강제적인 키스를 즐길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그가 호흡을 고르듯 잠시 멈춘 사이 온힘을 다해 밀어냈다.

그는 생각보다 쉽게 떨어져 나갔다.

거리가 벌어지자 엘레노어는 그의 뺨을 때렸다.

짜악.

전혀 피하지 않았는지 파열음이 강렬하게 울렸다.

“당신이 이런 저열한 인간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화가 나기보다 실망이 너무 깊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스카이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글쎄. 나는 줄곧 이러고 싶은 걸 참았을 뿐이야.”

조금도 변명하지 않는 그를 보니 더 화가 났다.

엘레노어는 이를 악물며 경고했다.

“신세 진 걸 생각해서 여기까진 넘어가지만, 거기까지예요. 더는 나도 참을 수 없어요.”

“물러나지 않으면 어쩔 거지? 리안을 불러 나를 베어 버리라고 할 건가?”

도발하는 듯한 스카이의 말에 엘레노어는 싸늘하게 답했다.

“당신에게 실망하고, 경멸하고, 진심으로 싫어하게 될 거예요. 좋았던 기억도 다 잊고 내 안에서 당신 같은 건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남겠죠.”

남의 힘을 빌어 위협하기보다는 자신이 실제로 느낄 감정을 전달했다.

스카이의 바다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사라져요.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말을 남긴 엘레노어는 그대로 몸을 추스르며 방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스카이는 곧장 나가는 대신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치 모든 기운이 일순에 빠져나간 것처럼 맥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꺼풀을 올려 맞은 편 벽에 걸린 벽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잡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강인하던 손이 놀라울 정도로 무기력하게 보였다.

흐릿한 불빛을 받은 섬세한 얼굴에는 거칠고 위협적인 표정은 모두 가시고 허탈하고 씁쓸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이렇게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한 적이 없는데.”

허공을 움켜잡듯 힘없이 주먹을 쥐며 스카이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한동안 그대로 멈춰 있던 스카이는 조용히 방을 떠났다.

*

황제는 어두운 방 안에서 잠든 딸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잠들기 직전까지 눈물을 흘렸던지라 눈가가 빨갛고 여기저기 부어 있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스카이 페이드라가 비록 야심은 많지만, 영민하고 분수를 아는 남자라 생각했다.

그가 대공이 되면 페이드라 공국도 발전해 제국의 명예를 드높일 거라 여겼다.

감히 이런 순진한 아이를 속이다니.’

그런 잔인한 서약은 직접 해야만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앞에서 충성을 말하는 무리들이 뒤에서 얼마나 간악해질 수 있는지 잊었던 것이다.

‘내 실수로 이 천사 같은 아이를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

한 번도 어른스러움을 잃지 않았던 딸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울부짖었다.

아름다운 말밖에 쏟아 내지 못했던 입술에서 처절한 목소리로 세상을 저주하는 것을 듣게 되고 말았다.

‘제가 당한 만큼 똑같이 받아야만 해요! 그대로 벌을 받아야만 해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외침에 황제는 알았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실수이니 그녀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황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황제는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용히 방을 떠나 집무실로 나왔다.

“폐하.”

체펠린은 밤을 새운 듯 에오가이노스 안에 있었다.

황제는 그의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황녀 전하께서는 좀 안정되셨습니까?”

“아니. 그렇게 빨리 벗어날 순 없겠지.”

황제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신당한 충격이 너무나 큰 모양이야. 그저 사심 없이 너무나 깊이 사랑했을 뿐인데. 세상은 어찌 그 애에게 이리 잔혹한 건지.”

체펠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깊었던 마음이 이제는 증오로 변했네. 그 애는 이제 리안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

“그렇습니까.….”

체펠린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어딘지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황녀 전하를 위해서라도 빠르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해야 할 듯 합니다. 한동안 칼라브리아 백작을 변방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도 다쳤으니 명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의 청에 황제는 무슨 소리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 딸이 지금 지옥 속에 살고 있네. 그런데 나보고 그 원인을 요양이나 보내 주라는 말인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칼라브리 아 백작을 문책하고, 제국 기사단장의 직위도 박탈하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나 지금은 우선…….”

“겨우 그딴 것으로는 안 돼. 나는 그를 내 딸보다 더 깊은 지옥으로 떨어뜨려 줄 생각이니까.”

황제의 말에 체펠린은 사색이 되었다.

“폐하. 칼라브리아 백작을 축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공작들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제국의 황제다. 불가능한 것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지? 그런 건방진 말을 하는 것들에게 황제의 힘을 보여 줄 것이야.”

“힘을 보이시다니… 내전이라도 벌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황제가 부정하지 않자 체펠린은 필사적으로 설득에 나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전만은 피해야 합니다. 절대 바람직하지 않은데다 하실 필요가 없는 전쟁입니다.”

“지금 전쟁이 필요 없다고 했나?

그대는 곁에서 나와 다른 것을 보고 들은 모양이군.”

냉담하기 짝이 없는 황제의 비꼼에도 체펠린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맺은 서약 때문에 꼭두각시가 될 뻔했고, 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큰 고통과 위험을 겪었을 겁니다. 그는 당신께 대적할 힘을 갖추었고, 대적해야 할 명분도 있습니다.”

황제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으나 체펠린은 단호하게 질문했다.

“그럼에도 충성을 보일 거라 여겨지는 신하를, 폐하께서는 내치시려 하시는 겁니까?”

리안은 자신의 문제로 제국민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지 않을 것이다.

황제만 뜻을 꺾으면 이 모든 일은다소 불쾌한 사건으로 덮고 넘어갈 수 있었다.

체펠린은 애간장이 끊기는 심정으로 초조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곧 황제의 입이 열리고 제국의 운명이 걸린 답이 흘러나왔다.

“내 딸은 온전한 여왕이 되어야 해.”

체펠린은 멍한 눈으로 그의 입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았다.

“제국의 모두는 그 애에게 군말 없이 충성하고 복종해야만 한다는 뜻이지. 썩은 싹은 내 대에서 모두 잘라 버릴 것이야.”

까슬하게 수염이 자라난 체펠린의 턱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떨렸다.

단단히 굳어 버린 부하에게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트로인 회의를 소집하게.”

트로인 회의는 황실을 지지하는 왕당파들로만 구성된 원로 귀족 회의였다.

그들을 모으는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명백했다.

자신을 지원할 힘을 결집하려는 것이다.

‘기어코 재앙으로 번지는구나.’

누군가 이 흐름을 멈출 수 없을까.

체펠린은 불구덩이로 향할 제국의 앞날에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