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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74화 (74/120)

74화

에이드리언의 녹색 눈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놀라 아무 말도 못 하는 비앙카스타에게 다시 다그쳐 물었다.

“이제 나와 대화 나누기 싫어진 겁니까?”

“그럴, 리가. 싫어질 리가 없잖아요.”

비앙카스타는 양팔을 휘휘 저어가며 다급하게 부정했다.

“일어나 계신지 몰랐어요. 저는 자는 걸 방해하기 싫어서, 그래서 그러나 에이드리언의 굳은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낮에 찾아오면 될 텐데요. 당신은 그러는 대신 일부러 밤에만 찾아오고 있습니다. 나와 대면 하고 말을 나누는 걸 피하듯이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변명하고 싶었지만, 에이드리언의 말은 빠르게 이어졌다.

“내키지 않는다면 그런 식으로 찾아와 동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의를 차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도 않고, 당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고 여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뇨. 저는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일부러 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의사의 허락이 떨어지는 대로 저택을 떠날 테니까. 며칠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에이드리언은 단단히 화가 난 듯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비앙카스타는 언성을 높였다.

“그런 게 아니라고요!”

의도한 것보다 목소리가 훨씬 크게 나왔다.

에이드리언이 흠칫해서 멈춘 사이 비앙카스타는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제가 무슨 낯으로 당신을 보겠어요! 나 때문에 이런 일에 연루되어 고통을 겪은 게 미안해서 죽을 것만 같은데. 가뜩이나 심란한 당신의 마음을 괴롭힐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고요!”

흥분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감정 때문에 양 뺨이 뜨거워졌다.

아마 엄청나게 새빨개졌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 같은 건 꼴 보기 싫어졌겠지만, 더는 폐를 끼쳐서도 안 되지만, 그래도, 그래도…….”

처음 입을 열었던 기세가 조금 잦아들어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망설여졌지만, 비앙카스타는 눈을 질끈 감고 말해 버렸다.

“그래도 보고 싶었어요. 자는 거라도 보고 나가려고 했다고요.”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도망쳐서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다리가 굳어 버린 것처럼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없나 찾고 싶은데 설상가상으로 에이드리언이 다가 오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세요.”

비앙카스타는 물러서며 말했지만, 그 움직임은 민망한 것이 되고 말았다.

에이드리언은 그녀 곁으로 오는 대신 그대로 지나쳐 협탁으로 다가갔다.

“저는 이만 갈게요.”

등불에 불을 붙이고 있는 그를 보고 비앙카스타가 쭈뼛쭈뼛 말했다.

“이리 오세요.”

에이드리언은 딱딱하게 말했다.

어쩐지 거절할 수가 없어서 비앙카스타는 저도 모르게 다가갔다.

밝아진 방안에서 제대로 보니 보기 좋게 살이 올라와 있던 뺨이 마르고 다소 창백해진 듯했다.

아팠던 탓이겠지만, 초췌하다기보다는 성숙해 보였다.

비앙카스타는 어쩐지 쑥스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차갑게 말해서 미안합니다. 아무 래도 심정이 복잡해 최근 무척 예민해진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런 꼴이 돼서 자격지심도 생긴 것 같고요.”

“전혀, 조금도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완전히 괜찮으니까요.”

에이드리언의 사과에 비앙카스타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야말로,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말을 흐리며 비앙카스타는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계속 오가면서도 절대 보지 않으려 했던 곳을 응시했다.

옷 소매 아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있던 자리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울면 안 되는데 어쩔 수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당한 일은 분명 억울하고 청천벽력 같은 데다 솔직히 너무 힘들어서 도무지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말문을 잇지 못하는 비앙카스타 대신에 에이드리언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누가 나빠서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어요.”

에이드리언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울렸다.

“그러니까 당신이 내게 미안할 필요는 없어요.”

그 말을 듣자 가뜩이나 고여 있던 눈물이 더욱 뜨거워졌다.

부지불식간에 이런 일을 당했으니 비앙카스타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게 다 원망스러운 게 당연했다.

그런데 오히려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덜어 주다니.

그간 느꼈던 죄책감만큼 가슴이 뭉클해졌다.

“왜 우는 거죠? 바이스 후작 영애.

내가 말실수를 했나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고마워서….”

비앙카스타가 울기 시작하자 에이 드리언은 무척 당황했다.

그는 한 팔로 허둥지둥 카트에서 깨끗한 수건을 가져와 비앙카스타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녀를 위로하려 애썼다.

“지하 감옥에 있는 동안 엘레노어가 고맙게도 나를 돌봐 줬어요. 그러면서 내가 지루하지 않도록 많은 이야기를 해 줬지요. 나는 그중에 당신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비앙카스타는 불안하게 눈을 들어 에이드리언을 보았다.

“황녀가 당신에게 얼마나 심한 짓을 했는지, 그리고 아직 어렸던 당신이 혼자서 얼마나 긴 시간 고통받았는지도요.”

남작 부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자랑스러운 과거는 아니었으므로 다시 고개가 떨어졌다.

“나는 내게 일어난 불행을 잊을 정도로 당신이 안타까웠어요. 힘이 되고 싶은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더 폐가 되겠지요.”

에이드리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비앙카스타는 이런 상황에도 자신을 위로하려 애쓰는 그에게 좋은 말을 돌려주고 싶었다.

“저는, 저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생각했어요. 당신을 따라서 남쪽으로 가고 싶다고요.”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가며 그녀는 자신의 말주변을 원망했다.

“수도를 떠나고 싶어서… 아니,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 맺어지고 싶었거든요. 처음으로 좋다고 생각한 분이었어요. 저는 혼자서 꽤 많은 걸 생각했어요. 당신이랑…….”

말을 할수록 수렁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비앙카스타의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이 날 것 같습니까?”

에이드리언이 잘린 손목을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전 갈고리를 단 해적 선장이 나오는 동화책을 본 적이 있어요. 주인공을 괴롭히는 나쁜 악당이었지요.

하지만, 나는 아주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오히려…..”

자신이 하는 말들이 모두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의 굳어 있던 입매에는 어느새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럼 갈고리를 달아 볼까요?”

농담하는 그를 보자 다시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뭐가 있어도 좋고, 뭐가 없어도 좋고 그냥 다 좋아요.”

유려하진 않아도 온 마음을 담은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이 터질 것 같은 진심을 표현하고 싶어 비앙카스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곧 용기를 내서 에이드리언의 팔을 들었고 상처 붕대 위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그러고 고개를 들자 바로 눈앞에 에이드리언이 있었다.

흠칫해서 물러나려 했지만, 에이드리언이 그녀를 끌어당기는 게 훨씬 빨랐다.

“……!”

까슬한 입술이 맞닿았다.

서툴게 입술을 대고만 있을 뿐인 첫 입맞춤이었지만, 비앙카스타의 세계는 금방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에이드리언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눈을 감았다.

*

칼라브리아 백작 저의 가장 커다란 방.

날씨가 따뜻한 데도 환자를 위해 방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었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그 따끈따끈한 공간 한가운데에 누운 아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새하얀 침대 위의 새하얀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의 반을 가린 붕대 때문에 그는 마치 침대에 속박된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이라면 무슨 말을 해도 말대 답은 못 하겠지.”

공작 부인이 입을 열자 리안의 눈꺼풀이 들리고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과부와 결혼하겠다며 속을 썩이는가 싶더니 곧장 위험한 원정을 떠나고, 그다음에는 마음대로 다쳐서 돌아오고,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결과가 이거니?”

공작 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싸늘하게 방 안에 울렸다.

그러나 리안은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할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고비는 넘겼지만, 아직도 큰 산은 남아 있어. 네 그 결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휘말려들지, 얼마나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지 각오는 한 거야?”

이번엔 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 드러난 강한 의지를 보고 공작 부인은 비꼬듯 말했다.

“하지만 넌 한동안 그녀를 만날 수도 없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붕대가 조금 움직였다.

뭔가 말을 하려다 삼키는 모양이었다.

그걸 본 공작 부인은 입가를 짚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깨가 떨리고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네가 이런 꼴이 됐다는 걸 대체 어떻게 엘레노어 남작 부인에게 전해야만 할까.”

리안이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아마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하지 않길 바라면 직접 말하면 되잖아.”

리안의 입에서 묘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공작 부인은 다시 입가를 눌렀다.

불빛에 비친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황가에 맞서고 싶다면 네 마음대로 하거라. 그들이 네게 부당한 압제를 걸었고, 그것에 저항하겠다면 말릴 수 없어. 하지만, 그 여자 문제는 옆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구나.”

공작 부인은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괜찮을 거라 말하지만,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으니까. 나도 끼어들어야겠어.”

리안은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공작 부인은 흔들림이 없었다.

“넌 병자답게 누워나 있어. 우리가 그 여자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말을 마친 공작 부인은 그대로 돌아섰다.

리안이 공작 부인을 부르려 했지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작 부인은 아들의 움직임을 모르는 것처럼 방을 떠났다.

*

그날 밤 백작 저에서 이루어진 대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풋풋한 사랑이 시작되고, 모자간의 갈등이 일어나는 그 시각.

엘레노어는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남자를 올려 보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예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놔줘요.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글쎄. 과연 그럴까.”

스카이가 바다색 눈동자를 빛내며 엘레노어를 내려 보았다.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벗어나려 그의 가슴을 밀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혹적인 눈동자와 붉은 입술이 바로 지척에 있었다.

열망이 가득 담긴 눈빛에 엘레노어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거야.’

분명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뿐인데.

엘레노어는 스카이가 돌변한 이유를 되짚어 보려 머리를 굴렸다.

30 분 전.

그가 갑자기 방에 나타났던 순간의 장면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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