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제73화
체펠린은 커튼을 슬쩍 걷어 마차 밖을 살폈다.
이른 아침인데도 팰리시티의 대로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제국 기사단이 팰리시티에 인접했다는 기별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하크메르시아 토벌이라는 제국사에 남을 업적을 이룬 영웅들은 환영하기 위해 팰리시티 성문에서부터 황궁에 이르기까지 환영 인파가 벌써 늘어서 있었다.
체펠린은 그 형렬 앞을 지나 팰리 시티의 성벽 밖으로 나갔다.
얼마간 마차를 달려 체펠린은 성문앞 주둔지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궁정백님.”
제국 기사단의 부단장인 미쉘이 그를 맞아 주었다.
황제가 팰리시티에서 지척인 주둔지에 굳이 제국 기사단을 멈춰 둔것은 성대한 개선식을 위해서였다.
황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모처럼의 업적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체펠린은 실패가 생기지 않도록 점검하러 이곳까지 나왔다.
물론,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목적도 있었다.
“칼라브리아 백작은 어디 있습니까?”
개선식의 주인공이기에 앞서 모든 팰리시티 사람이 손꼽아 기다리던 인물이다.
황제는 그의 현 상태를 확인하고 몸이 달아 있었다.
그러나 직접 나올 수는 없어 체펠린을 보냈다.
미쉘은 즉답하지 않고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백작님께서는 저희와 함께 복귀하지 않고 단독으로 떠났다고 수도에 보고했습니다만.”
“그건 알고 있소. 하지만 칼라브리 아 백작으로부터 성 부근에서 합류한다는 기별이 왔었는데..….”
“금시초문입니다. 저희에게는 그대로 개선하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에 펼쳐졌다.
눈앞이 캄캄해진 체펠린은 곧장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바로 황궁을 향해 바퀴가 빠지게 달렸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복귀한 체펠린은 에오가이노스로 가 황제에게 방금 확인한 사실을 보고했다.
황제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 현재 칼라브리아 백작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이냐!”
“일단 팰리시티 전체와 그가 갈만한 곳에 대한 방비는 철저히 했습니다. 칼라브리아 백작령에도 사람을 보내 두었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체펠린은 회의 감을 느꼈다.
아무리 방비를 해도 리안 칼라브리 아가 잠입하고자 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수상한 낌새도 차리지 못하도록 노력한 것인데.’
다소 방심하고 있었던 것은 황가도 그렇지만, 수도의 다른 이들도 리안칼라브리아와 접선할 방법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에서 심복들이 몰래 드나드는 정황은 하나도 빠짐없이 포착했다.
그들이 혹시 리안으로 연결되지 않나 철저히 감시했지만, 공작들 간의 모략을 꾸미는 움직임 외에 다른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리 성을 떠나기 전에 만날 약속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해.’
그리고 그럴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현 수도의 상황은 그가 팰리시티에서 나간 후 여러 가지 상황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며 급변한 결과였다.
리안은 황가와의 관계를 자신의 힘으로 무난히 넘기고자 원정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막장으로 흘러갈 걸 예견했다면 불확실한 만남을 약속하기보다는 차라리 수도를 아예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그가 수도로 돌아오지 않고 잠적한 건 아니겠지?”
황제의 물음에 체펠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간 리안 칼라브리아의 어디로 튈지 이해할 수 없는 행보 중에서도 단 한 가지는 명확했다.
그가 무슨 수를 써서는 엘레노어 마리체를 곁에 두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현재 그녀의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수도에 있는 건 확실했다.
그녀가 여기 있는 이상 리안도 수도로 돌아올 것이다.
“이미 수도로 들어와 은신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래도….”
체펠린은 말문을 흐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황녀 전하께 엘레노어 마리체의 신병을 넘겨받아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간 황녀가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모르는 척했지만, 제국의 커다란 위기에서 그녀의 비위나 맞추고 있을 수는 없었다.
황제도 이번에는 딸의 편을 들지 않았다.
“그래. 그 애는 너무 착해 연적조차 처리하지 못하고 살려 둔 모양이니 우리가 데려오는 게 낫다.”
“네. 그렇습니다.”
체펠린은 적당히 동조한 뒤 의견을냈다.
“이젠 사실상 칼라브리아 백작을 목격하자마자 종속시키는 것 외엔 방도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모든 장소에 황녀 전하를 대동해야 합니다.”
“리안이 함께 오지 않았다는 말만으로도 황녀는 충격을 받을 테니 내가 직접 가서 전하겠다.”
황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명령했다.
“즉시 칼라브리아 공작 저로 연락하라. 그리고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와 칼라브리아 백작 저로도 사람을 보내 리안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주력해.”
“네, 폐하. 명 받들겠습니다.
체펠린을 보낸 황제는 그대로 에오가이노스를 나섰다.
그가 로사그란데로 들어섰을 때였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악.”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처절한 절규가 울리고 있었다.
그게 딸의 음성임을 눈치챈 황제는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황녀의 방문을 열자 그는 아연해졌다.
세상의 온갖 진귀한 장식과 공예품으로 꾸며진 황녀의 방은 마치 마적에 짓밟힌 것처럼 초토화되어 있었다.
그 중앙에서 황녀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침대를 뒹굴며 고함을 내질렀다.
“아일린! 진정하거라.”
황제는 다가가서 황녀의 팔을 잡고 안정시키려 애썼다.
처음 황녀는 마구 몸부림치며 그를 뿌리치려 했으나 이내 아버지란 걸 깨달은 듯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와락 황제의 목에 매달리며 눈물을 쏟아 냈다.
“사라졌어요! 완전히, 완전히 사라졌어요!”
“사라지다니. 뭐가 사라졌다는 거지?”
황녀의 옷은 잔뜩 잡아 늘려져 너덜너덜했다.
그사이 뽀얗게 드러난 목덜미는 어찌나 긁었는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곳을 찌르며 황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를 냈다.
“가, 각인이… 각인이 사라졌어요!”
황녀의 말에 황제의 입이 벌어졌다.
이토록 좌절할 각인이라면 오직 하나뿐이다.
‘리안의… 종속의 서약이 풀린 것인가.”
간신히 붙들고 있던 희망의 끈이 툭 끊겼다.
황제조차 망연자실한 채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
“죄송합니다만, 오늘도 주인님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칼라브리아 백작가의 집사장이 엘레노어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중한 태도였지만, 무척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래도 그냥 돌아서기 아쉬워서 엘레노어는 한 번 더 간청해 보았다.
“그냥 괜찮으신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어요. 말도 안 걸고, 그냥 가만히 보고만 나올게요.”
“백작님께서 지금은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엘레노어의 표정이 굳었다.
문 안쪽에 서 있던 일라이는 눈이 마주치자 미안한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책임이 아니었으므로 엘레노어는 함께 눈인사를 나눈 후 리안의 방문 앞을 떠났다.
복도를 가로지르며 걸으려니 마음이 무겁고 배가 욱신욱신 아팠다.
‘언제쯤 볼 수 있으려나.’
지하를 탈출한 지 3일째.
엘레노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칼라브리아 백작 저 자신의 방이었다.
깨어나자마자 곧장 리안을 찾았지만, 그는 문을 굳게 걸어 닫은 채 방문을 사양했다.
리안이 자리를 비워 만나지 못한 적은 있어도 가까이 있으면서 만남을 거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걱정됐다.
‘정말 무사하긴 한 건지.’
죽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주변의 심각한 분위기를 보면 상태가 위중한 듯했다.
작은 결점조차 없던 완벽한 신체.
그것에 씻지 못할 타격을 입은 그를 대체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까.
“휴.”
방으로 돌아온 엘레노어는 스툴에 주저앉았다.
걱정 때문에 무기력해서 잠조차 자고 싶지 않았다.
이틀 간 계속 피를 흘리는 리안의 얼굴만을 바라보다 잠에서 깼고, 그래서 아무리 자도 피로하기만 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어느덧 해가 기울고 식사 시간이 되었다.
정각이 되자 언제나처럼 메이드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식사하십시오.”
메이드는 손수레를 민 채 들어와 엘레노어의 테이블에 차려 준 뒤 방을 떠났다.
따뜻한 새 고기 스튜와 토마토 스프, 샐러드와 먹음직스럽고 달콤한 디저트.
음식은 훌륭했고, 메이드의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깍듯했다.
하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냉기가 감돌았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칼라브리아 백작 저에서 일하는 고용인 대부분이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푸대접에 가까웠지만, 엘레노어는 불평하지 않았다.
‘미워하는 게 당연하지.’
모두 리안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모셔 왔던 고용인들이라고 들었다.
리안은 딱히 살갑거나 자상한 주인은 아니었겠지만, 분명 모두의 자랑이었을 것이다.
입맛이 없어 몇 입 뜨지 않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지하에서 그녀를 괴롭히던 메슥거림은 가셨으나 대신 쿡쿡 찌르는 듯한 복통은 가시질 않았다.
식기를 치워 달라고 부르는 것도 민망해서 엘레노어는 직접 손수레를 끌고 복도로 나왔다.
부엌으로 가는 도중 그는 블레인과 마주쳤다.
“캔터베리 자작님.”
모처럼 편한 사람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다.
그러나 블레인은 그녀를 보자마자 입가를 가리더니 곧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버렸다.
‘자작님까지 화가 난 건가.’
블레인 역시 리안의 둘도 없는 친구였고, 또 원래 엘레노어를 반대하던 쪽이었다.
리안이 다친 것을 보고 다시 원망하게 됐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엘레노어는 한층 무겁게 느껴지는 손수레를 끌고 계속 걸었다.
복도 끝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그 안은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머무는 침실이었다.
그녀는 어젯밤 늦게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를 나와 이곳으로 왔다.
바로 인사하러 갔지만, 그녀 역시 엘레노어를 만나길 거부했다.
‘공작 부인이야말로 지금 나를 가장 원망하고 계시겠지.’
엘레노어는 자상하진 않아도 카리 스마와 위엄이 넘치는 공작 부인이 좋았다.
그녀에게 인정받는 건 무척 기쁘기도 했다.
그런데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신임을 잃어버리다니.
이대로 괜찮은가 싶은 불안이 몰려왔다.
‘황궁이 조용한 건 다행이지만.’
황녀는 이제 엘레노어가 탈출한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또한 리안이 저택에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 움직임이 없다니.
모든 게 폭풍전야처럼만 느껴졌다.
불안을 느끼자 다시 배가 콕콕 찌르듯 아파왔다.
아침부터 배가 너무 아프다.
‘왜 이러지.’
생각하다 문득 엘레노어는 이 복통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각된 하반신의 기묘한 위화감.
엘레노어는 황급히 복도를 가로질러 화장실로 향했다.
‘시작됐구나.’
그간 줄곧 늦어져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월경이었다.
리안과의 관계가 있었고 그 후로 뚝 끊겼기에 솔직히 혹시 임신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냥 스트레스 때문에 늦어졌던 것뿐인가.’
아이러니 했다.
그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침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필 이 타이밍에 시작하다니.
지하에서 시작된 것보단 훨씬 낫지만, 무척 얄궂었다.
어떻게든 그의 곁에 붙들어 놓으려는 것 같던 세상이 이제는 그의 곁을 떠나란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성급해지면 안 돼.’
혼자 결론을 내리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였다.
마음을 다잡으며 엘레노어는 방으로 돌아갔다.
*
늦은 밤.
비앙카스타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칼라브리아 백작 저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녀의 손은 낮의 엘레노어처럼 손수레를 미는 중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손수 만든 음식과 탕약, 그리고 물수건 등으로 가득하단 점이었다.
부엌에서 제법 먼 구석 방까지 온 그녀는 살금살금 방문을 열었다.
이렇게 숨어드는 게 벌써 3일 째.
이전 이틀과 마찬가지로 방 안은 어둡고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고 있구나.’
비앙카스타는 불도 켜지 않고 연금술사의 등이 박힌 조그만 막대 불빛에 의지해서 천천히 방 안으로 나아갔다.
침대 앞에 도착해 불을 비춰 본 비앙카스타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당황해서 황급히 나가려 몸을 돌렸을 때였다.
“왜 이런 식으로 숨어 드는 겁니까?”
방 그늘에서 에이드리언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