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72화 (72/120)

제72화

“말도 안 돼요!”

엘레노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그녀는 리안으로부터 그의 ‘계획’을 막 전해들은 참이었다.

“꽤 앞뒤가 맞는 계획이라고 생각 합니다만.….”

리안은 차분히 반박했다.

그의 말대로 완전히 어처구니없는 계획은 아니었다.

리안이 안으로 진입하고 스카이가 황녀를 방심시켜 24시간 잠 재운다.

그사이 각인을 제거하고 종속의 서 약에서 벗어난다.

얼핏 퍼즐은 맞아떨어졌지만, 중간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 하나하나가 잘못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위와 연락도 되지 않는데 어떻게 확신하고 실행하죠? 만일 페이드라 공작이 실패했으면 바로 목숨을 잃게 된다고요.”

“나는 그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리안은 스카이를 인정하는 게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말했다.

물론 엘레노어도 스카이가 유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게다가 성공해도 그것보다 더욱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스카이 공작이 죽음의 명령을 내릴 수 없게 시간을 끌어도 서약을 해제하려면 결국 각인을 제거해야만 하는 거잖아요!”

리안의 각인은 혀에 있었다.

제거한다는 건 혀를 도려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제가 떠올린 방법이 훨씬 안전해요. 죽을 위험도 없고, 신체를 잘라 낼 필요도 없다고요.”

엘레노어는 넌지시 던지던 태도를 벗어나 리안을 열심히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 말을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밀라트릭스가 거기에 있다는 걸 확신해요. 당신이라면 황녀의 눈에 띄지 않도록 베아트릭스를 데리고 남부로 가서 힘을 되찾게 만들 수 있어요.”

“아뇨.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엘레노어가 제안한 쪽이 편한 길이었다.

그러나 리안은 이상할 정도로 단호했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엘레노어의 물음에 리안은 생각지 못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나는 베아트릭스에게 힘을 돌려주기 위해 죄 없는 여인을 죽이진 않을 겁니다.”

그런 문제였나.

엘레노어는 난감해졌다.

그녀라고 해서 살육을 즐기는 사이 코패스는 아니었다.

그러나 밀라트릭스는 이미 300년 전의 인물.

현재 숙주라서 살아 있긴 하지만, 몸은 오래전에 시체가 되었어야 정상이었다.

당연히 생기는 모두 소멸되었고 자아도 없이 목숨만 이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은 없었으며 소설상에서 사망할 때 밀라트릭스는 드디어 해방되어서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런 걸 알아도 ‘그녀는 죽는 게 더 나을 거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엘레노어가 고심하는 사이 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래된 제국 역사서에서 과거 제국에 살육을 자행하던 잔인한 마녀가 있다는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베아트릭스가 그 마녀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엘레노어가 대답하지 못하고 묵묵히 있자 리안이 말을 이어 갔다.

“그런 마녀 베아트릭스에게 힘을 되찾아 주는 것은 살인마에게 칼을 돌려주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겁니다.”

리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랑카랑한 베아트릭스의 외침이 울렸다.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군! 감히 네가 뭔데 나의 미래를 재단하고 입을 놀리는 거야? 새파란 애송이가!]

서슬이 퍼런 호통을 리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자신의 힘에 취해 살육을 자행하던 양심에 제국의 안전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내 혀 하나와 제국의 평화라면 당연히 후자입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뱉을 수 있는 걸까.

리안의 그릇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운 한편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나는 베아트릭스에게 우리를 돕겠다고 서약하게 만들었어요. 내가 여기서 살아남은 것, 그리고 어느 정도 인간적인 생활을 영유한 것, 그리고 아직 에이드리언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도 전부 베아트릭스덕분이에요.”

엘레노어의 작은 말에 리안은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당신이 신세를 졌다니 함께 데리고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내 감시하에서 어느 정도 운신의 폭도 마련해 주겠지만, 힘을 되찾는 건 절대 안 됩니다.”

리안의 입장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백작님이 그렇게 자신의 안위에 미련 하나 없는 것처럼 말하니 걱정하고 있던 내가 바보 같은데요.”

그녀가 서글픈 기색을 보이자 단호 하기만 하던 리안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는 엘레노어를 위로하기 위해 쩔쩔매며 말을 건넸다.

“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꿋꿋이 구출을 바라는 걸 넘어 오히려 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당신이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아지긴 커녕 더 속만 상했다.

“나는…….”

엘레노어는 울컥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간신히 말을 맺었다.

“나도 백작님을 지켜 주고 싶어요.”

“내게 그런 말을 할 여인은 온 제국에 당신뿐일 겁니다.”

너무나 고귀하고 너무나 강한 남자.

내가 이 사람을 지킨다는 건 너무 무리인 걸까.

엘레노어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리안의 표정에는 감동이 가득했다.

“당신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얼마나 기쁜지 압니까?”

“기쁘면 그러겠다고 말해 주세요.”

엘레노어는 간절히 말했다.

리안은 쓴웃음을 짓더니 엘레노어의 이름을 불렀다.

“엘레노어.”

엘레노어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깨달았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리안은 흰 뺨을 붉히며 기쁜 듯이 말했다.

엘레노어는 황급히 방금 뱉은 말을 물리려 애썼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싫은 거 같아요. 그런 남자는 질색이에요.”

딱히 거짓말을 못 하는 편이 아닌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서툴게 말이 나왔다.

리안은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쿡쿡 웃었다.

“이미 진심을 들었으니까 그 말은 안 믿을 겁니다.”

리안은 진심으로 웃고 있는데 엘레노어의 마음은 곧 일어날 일 때문에 초조해졌다.

“백작님이 너무 크게 희생할 바에는….”

입술을 한번 깨문 뒤 내내 하지 않으려 했던 생각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냥 만나지 않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리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황제가 되고 행복하게 살았을 거예요.”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게 당신의 운명이었으니까요.”

단언하는 엘레노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당신은 항상 뭔가 내가 아는 것보다 많은 걸 볼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엘레노어는 잠잠히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게 정말 내 운명이라면…….”

리안이 말을 끌며 생각에 잠겨 내리뜨고 있던 눈을 들었다.

“운명을 바꿀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엘레노어는 차마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이제 곧 자정이로군요.”

리안은 다시 시계를 꺼내 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그가 자정을 기점으로 시행하라 했으니, 준비해야겠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망설임 하나 없이 말할 수 있는 걸까.

엘레노어는 누군가를 위해 혀를 자를 수 있냐고 묻는다면 즉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리안은 마치 산책이라도 다녀오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지 마세요.”

엘레노어는 마지막까지 말려 보기로 마음먹고 간곡히 호소했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더 아껴야 해요. 나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고요.”

“여기서 나가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가 달콤한 혀로 속삭였던 말들.

그 모든 것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차마 리안이 그러도록 내버려 둘수는 없었다.

“그러면 안 돼요. 차라리 그냥 저를 두고 나가세요. 난 이런 건 원치 않아요.”

간청이 통하지 않자 엘레노어는 화를 냈다.

“난 나가지 않을 거예요. 당신 곁에 있지도 않을 거예요. 내 말을 따라 주지 않을 거라면 그냥 나는 없던 셈치고 가서 황녀와 맺어져 황제가 되세요.”

고집을 부릴 거라면 나도 같이 고집을 부리는 수밖에.

“당신이 설령 나를 택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겁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도 리안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해 주십시오.”

자정에 거의 임박했을 무렵.

리안이 엘레노어의 말을 멈췄다.

“나는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만일의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줄곧 거침없던 리안의 말투에 조금 쑥스러움이 어렸다.

그는 전부 엿듣고 있을 베아트릭스가 신경 쓰이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조금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곧 엘레노어의 귓가에 나직한 속삭임이 어렸다.

“사랑합니다. 아마, 죽어서도.”

담담한 목소리, 담백한 말투.

거기서 묻어나는 깊은 감정에 엘레노어는 말문이 막혔다.

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달싹대는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이제 다시 못 할지도 모르니까.”

리안은 어리광부리듯 눈을 조금 찡긋한 뒤 몸을 더욱 굽혔다.

곧 입술에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닿기 전까지는 수줍음이 역력했지만, 닿고 나니 그런 건 눈꽃이 녹듯 사라졌다.

리안은 엘레노어의 허리를 꼭 끌어 안고 뜨거운 숨을 뱉으며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깊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그가 느껴지자 달콤함에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는 한참 엘레노어를 놓아주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그는 간신히 멈췄다.

“백작님. 저는….”

이 달콤함을 잃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그를 말려 보려 엘레노어가 입술을 떼었을 때였다.

“아.”

엘레노어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한 채 스르르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미안합니다. 보지 않는 게 나을 테니까.”

리안은 엘레노어가 들을 수 없는 사과의 말을 속삭였다.

기절한 그녀를 안아 침대에 소중히 눕힌 뒤 그는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침침한 감옥등불에 잘 벼려진 칼날을 살폈다.

“……?”

순간 뭔가 반짝이는 것이 검신에 반사되었다.

리안은 고개를 들어 위를 응시했다.

“저건….”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온통 돌로 뒤덮인 침침한 천장뿐이었다.

그러나 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또 데네브가 떴군.”

아무리 돌이 성긴 구조라고 하더라도 밤하늘이 절대 보일 리 없는 깊디깊은 굴속이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환한 별빛이 그의 눈에 비쳐졌다.

[보일 리 없는 것이 보일 때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리안은 흠칫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법이지.]

베아트릭스의 목소리였다.

긴장해서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슨 뜻이지.’

의미를 파악하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엘레노어가 한 말만이 뇌리에 맴돌았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껴라…….”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생겼을 뿐이다.

리안은 다시 칼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혀로 향했다.

새빨간 선혈이 어두운 지하 바닥을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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