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엘레노어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받아들인 정보를 처리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나는 지금 황궁 지하에 있을 텐데.’
그리고 문밖은 정해진 혈통의 사람이 아니면 위험한 마수가 나타나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고 있다.
그런데 왜 리안이 여기 있는 걸까.
‘헛것이 보이나….…?’
엘레노어는 눈을 한번 비벼 보았다.
그러나 다시 떴을 때도 여전히 수려한 흰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백작님…?”
소리 내어 부르자 미소 띠고 있던 붉은 입술이 열리며 부드러운 음성을 내보냈다.
“많이 놀랐습니까?”
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놀라 굳어진 엘레노어의 뺨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그 익숙한 손길과 체온에 엘레노어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왜 여기 계신 거예요? 대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마수는요?”
질문을 쏟아 내는 도중 엘레노어는 리안의 몸과 손, 그리고 뺨에 잔뜩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뜨며 리안의 옷자락을 잡았다.
“피투성이잖아요! 괜찮아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엘레노어는 황급히 돌아서서 침대 곁의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에이드리언에게 쓰기 위해 세탁해 둔 천 조각들이 있었다.
그것을 물에 적셔 피가 묻은 곳을 닦으려 했다.
붉은 선혈이 사라지고 드러난 피부는 새하얄 뿐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드리며 말했다.
그가 다친 게 이상할 정도로 속이 상했다.
“우선 응급처치라도 할 테니 앉아서 이야기를 하죠.”
리안의 상처 부위는 왼팔의 어깨부근과 허벅지였다.
엘레노어는 그가 가지고 있던 단검으로 옷자락을 가른 뒤 베아트릭스에게서 받은 약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싸맸다.
“왜 무리해서 들어온 거예요. 이제 어쩌려고 그래요?”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계획도 있고.”
계획이라.
엘레노어가 눈을 깜빡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어요?”
“음, 만난 것 같습니다.”
블레인과 비하인드 나이츠에 마주쳤을 것이다.
그런데 왜 혼자 들어왔을까?
엘레노어가 묻는 표정을 짓자 리안이 빙그레 웃었다.
“방해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왔습니다.”
“빨리 다 같이 머리를 모아서 안전하게 나갈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나요?”
“나갈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상당히 여유가 있으니까……….”
리안이 말을 흐리자 엘레노어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니 보라색 눈동자가 예쁘게 휘었다.
“둘이서 조금이라도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엘레노어는 그것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서 괜히 틱틱댔다.
“백작님은 여자에 대해 더 배우셔야겠어요.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 할 때 피 칠갑하고 오는 건 여자들이 싫어하거든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낮은 웃음소리에 당장 벗어나고 싶던 갑갑한 지하 감옥에 따뜻한 기류가 퍼져나갔다.
“어쨌든 잘됐어요. 제게 계획이 있어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엘레노어는 잠시 생각하다 우선 질문을 던졌다.
“오는 길에 베아트릭스는 만났나요?”
“이곳에 수감된 죄수 말입니까?”
일단 수감된 건 맞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방 안에 틀어박혀 소리만지를 뿐 꼼짝도 하지 않아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베아트릭스는 리안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엘레노어는 이야기를 본론으로 진전시켰다.
“제가 백작님의 서약을 해제할 방법을 찾았어요.”
서약 이야기가 나오자 리안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게 지워진 짐은 스스로 내려놓겠습니다.”
“아뇨. 그러지 말고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엘레노어가 만류하는 리안의 말을 끊고 설명을 쏟아 냈다.
베아트릭스의 정체, 그리고 그녀의 힘이 봉인된 방법과 그녀가 원하는것.
그리고 그가 리안에게 서약을 시전했다는 사실까지.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도 리안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아는 겁니까?”
대답하기 곤란해 엘레노어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묻지 말아 달라는 표정을 짓고 있자 리안이 질문을 거두었다.
“당신은 정말 신비한 여인입니다.”
보라색 눈빛에는 진심으로 감탄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당신을 좋아하길 잘했다고 말하는 듯한 그 눈동자에 마음 한구석이 콕콕 찔렸다.
엘레노어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밀라트릭스가 사망하면 베아트릭스가 힘을 되찾을 거예요. 그럼 아마 백작님의 서약을 풀 수 있어요.”
리안이 들으면 조금이라도 반가워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리안은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네?”
하지 않아도 된다니?
“안 하면 뭔가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요?”
“네. 방법이 있습니다.”
엘레노어의 질문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런 게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찾을 수 없었으므로 엘레노어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안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제 슬슬 시작됐겠군요.”
뭐가 시작됐다는 걸까?
의아해하는 사이 리안은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천정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마치 바깥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
같은 시각.
황녀는 나무 의자에 앉은 채 은은하게 불이 켜진 타운하우스의 실내를 돌아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요?”
이미 수백 번도 넘게 물어본 질문이었으나 스카이는 참을성 있게 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물론입니다, 황녀 전하.”
그는 황녀 앞에 놓인 책을 가리켰다.
낡을 대로 낡아서 바스러질 지경인 책장은 고대 문자로 빽빽하게 무언가가 써져 있었다.
“저는 처음 들어 보거든요. 이런게 존재했다니..….”
황족으로서 고급 교육을 받은 황녀는 고대 문자에 제법 능통한 듯했다.
“이토록 강력한 주술… 그걸 심지어 서약자가 없어도 다른 각인의 정보만을 이용해 걸 수 있다고요.”
그녀는 책장 한가운데 적힌 표제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사랑의 서약]
서약자가 시전자에게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주술.
그것은 스카이가 한창 주술에 매진하던 시절에 입수한 주술서였다.
당시의 그는 아카데미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관으로도 부족해 허가를 얻어 황실 서고를 탐독하고 각 귀족 가문을 방문하여 고서적을 탐독하는 등 자료 수집에 엄청나게 심취해 있었다.
그렇게 노력을 기울이고도 새로운 주술에 항상 목이 말라서 그는 뒷세계의 시장에까지 방문했다.
그리고 어떤 수상쩍은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처음 이 서약을 봤을 때 느꼈던 눈이 번쩍 뜨이는 감각이 여전히 생생했다.
‘비록 가짜였지만, 말이야.’ 그는 온갖 고생을 다해 희귀한 재료를 모으고 방법을 보완해 가며 실험에 매진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얻어지는 결과는 실패 뿐.
오기가 생겨 미친 듯이 참고 서적을 찾다가 해당 주술서를 집필한 이의 회고록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실험 결과 ‘사랑의 서약은 실패였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꽤 긴 시간을 낭비한 만큼 무척 허탈했으나 스카이는 책을 내버리지도 폐기하지도 않았다.
‘분명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
분명 혹하는 이가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력한 효과를 지닌 주술.
책은 정말로 오래되어 조작됐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진짜 고서적이었고 이게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 건 제국에 스카이가 유일한 거나 다름없었다.
분명 이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미끼로 사용할 수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결국, 이렇게 써먹게 되는군.’
듣도 보도 못한 주술을 시전하겠다고 하면 누구라도 수상히 여길 것이다.
특히 황녀처럼 경계심이 많은 이라면 상대조차 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렇기 때문에 스카이는 황녀의 신임을 사기 위해 그녀의 곁에 머물며 충성을 가장했다.
그리고 그 결과.
황녀가 그를 따라 타운하우스에 발길을 내딛게 된 것이다.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스카이는 눈을 굴리고 있는 황녀에게 말을 건넸다.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황녀가 뺨을 살짝 붉혔다.
그녀는 조금 눈알을 굴리더니 이내 결심이 선 것처럼 말했다.
“아뇨. 당신처럼 스스로 온 마음을 다해 충성한 사람은 없었어요.”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합시다.”
황녀는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스카이는 그녀를 이끌어 방 한쪽에 마련된 제단으로 데려갔다.
황녀는 곱게 깔린 비단 위에 몸을 누이며 말했다.
“모든 게 잘되면 반드시 섭섭지 않게 보답하겠어요.”
“보답은 필요 없습니다. 도울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정말 사심 따윈 없다는 투로 말하자 황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제 뭘 해야만 하나요?”
“그냥 편안히 계시면 됩니다.”
“주의해야 할 사항은?”
황녀의 질문에 스카이는 티 나지 않게 침을 꿀꺽 삼킨 뒤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강력한 새 서약이 새겨질 때면 기존에 새겨진 서약 부위들이 아리거나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존의 각인에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겠죠?”
불안 섞인 황녀의 말에 스카이가 차분하게 답했다.
“당신이 한 대부분의 서약은 나와 베아트릭스가 건 것이죠. 주술은 더욱 강력한 힘으로만 해제됩니다. 당연히 나는 내가 건 것을 풀 수 없고 베아트릭스는 나보다 훨씬 강합니다. 아무리 잘 봐줘도 동급일 테니 제가 그녀의 주술을 푸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랬기에 황녀에게도 더욱 설득력 있게 와닿았을 것이다.
“눈을 떴을 때는 칼라브리아 백작님이 눈앞에 있으면 좋겠어요.”
황녀는 마음을 완전히 놓은 듯 희망적인 말까지 입 밖에 냈다.
“금방 끝날 겁니다. 마음을 안정시킨 채 잠시 그대로 계십시오.”
스카이는 안정을 도우려는 듯 향기가 풍기는 꽃다발에 불을 붙여 황녀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
황녀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내 동그란 눈이 스르르 내려 감겼다.
주술을 시전 해야 할 스카이는 그저 잠잠히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긴장한 듯 다물려 있던 입술이 풀어지고 오르내리는 가슴의 움직임이 규칙적으로 변했다.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이다.
“좋은 꿈꾸십시오, 고귀하신 황녀전하.”
스카이는 몸을 정중하게 굽혀 황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인 뒤 방을 나섰다.
“안에 꽂아 둔 꽃다발을 10분 간격으로 계속 태워 연기를 피워라.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돼.”
“네, 알겠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하에게 스카이가 명령을 내렸다.
이미 타운하우스와 그 반경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해 철통같이 보안을 유지해 두었다.
“일어나는 것을 확인한 뒤 미행을 붙이고 복귀하라.”
“네, 공작님.”
대답을 마친 제니트가 질문을 던졌다.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연적의 영역으로.”
스카이는 의미심장하게 답한 뒤 타운하우스를 떠났다.
그가 탄 마차가 빠른 속도로 팰리 시티를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