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황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스카이에게 물었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지시는가 싶더니 갑자기 나타나 답을 찾으셨다니요.”
“곧 설명하겠습니다.”
스카이는 능숙한 태도로 황녀를 에스코트해 응접실 중앙에 앉혔다.
“그 전에 황녀 전하의 고충을 말씀해 주시지요. 하나하나 해결될 테니까요.”
스카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황녀는 이미 말을 퍼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색이었다.
“지금 제가 가는 곳마다 수군대고 있어요. 엘레노어 마리체를 내가 죽였다고, 겉보기와 다르게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였다면서요!”
황녀는 얼마나 억울한지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이런 오명을 뒤집어쓰고는 견딜 수 없어요. 그런 여자 따위 죽는 게 낫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이제와서 나를 비난한다고요!”
실제로 그러려고 했으면서 자신의 행위로 인해 일어난 비난을 감수하지 못하는 건가.
스카이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보르미아 공작이 사달을 낸 것까지 내 탓으로 몰아가고 있어요!
행정 처리가 되지 않는 게 전부 황녀가 제멋대로 군 탓이라고요.”
그녀가 호소하는 상대가 바로 그렇게 되도록 몰아간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스카이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따뜻한 태도로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네. 황녀 전하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진정하고 현 상황을 잘 돌아보죠.”
티테이블에 놓인 차를 따라 주며 스카이가 차근차근 말했다.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비난하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엘레노어 마리 체가 살아 있을 때는 그녀를 헐뜯었으나 맛좋은 먹이가 사라진 지금은 다른 타깃이 필요하겠지요. 언제나 착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법입니다.”
황녀는 착하기는커녕 평소에는 자신이 그 타깃을 지정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녀는 정말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이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엘레노어 마리체로 인해 오해에 휩싸이는 걸 예상했지요. 이때를 위해 그 여자를 살려 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정말 죽였다면 이렇게 짜증이 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스카이는 입을 비죽이는 황녀를 달랬다.
“모든 일은 극적인 순간에 반전되어야 파장이 크게 일어납니다. 황녀전하에게 몰린 비난 여론이 극에 달했을 때 사실을 뒤집어 버리는 게 좋습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진실의 서약이라는 무기가 있으니까요.”
황녀는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이었지만, 반박하지 않고 스카이의 말을 잠잠히 들었다.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 제국 귀족들을 황궁으로 불러 모읍시다. 거기서 모두를 앞에 두고 서약하면 그간 황녀 전하를 음해하고 다니던 불온한 무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 거라면 백작님이 오시고 나서 하는 게 낫지 않나요?”
리안은 이미 도착해 팰리시티 어딘가에 은신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스카이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그를 앞에 두고 일을 벌이면 너무 작위적이니 돌아오기 전에 해치우는 게 사심도 없어 보이고 모양새가 좋을 겁니다.”
황녀는 그의 설명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듯 처음 들어올 때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정말… 그렇게 일이 잘 풀릴까요?”
“네. 오해는 그것으로 불식될 겁니다.”
스카이는 당당하게 장담했다.
애초에 소문을 부추기는 원흉이 자기 자신이었으므로 순식간에 사그러들게 만드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좋아요. 그렇게 하겠어요.”
결국, 황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스카이는 그 틈을 노려 자신의 진짜 목적을 꺼냈다.
“그리고 그 후의 일 말씀입니다.
만.”
“그 후요?”
“네. 제가 전하를 위해 그간 몸을 숨기며 구해 온 것을 보십시오.”
스카이는 품에서 꾸러미를 꺼내 황녀에게 건넸다.
안에서 나온 것은 아주 오래된 고서적이었다.
그것을 펼쳐 본 황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
체펠린은 에오가이노스 중앙 탑의 널찍한 방에 서 있었다.
방 중앙에는 황궁의 중정이 내려다 보이는 거대한 발코니가 있었다.
그곳은 위치가 몹시 높아 황궁 울타리 너머 광장에서도 훤히 보이는 장소였다.
그래서 신년 축사를 하거나 각종 중대 발표를 할 때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오늘도 커튼 너머 중정에는 수많은 귀족이 모여 있었다.
제국의 빈민을 위한 자선 만찬회였으나 그들이 모인 속사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정말 괜찮겠느냐, 아일린.”
황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간의 오해 따위 때문에 여린 네가 모두의 앞에서 굳이 이런 일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
“괜찮아요, 폐하. 저는 이미 각오가 되었어요.”
체펠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부녀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아일린이 위험한 서 약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껄끄러워하며 반대했다.
그건 정말로 황제가 황녀를 여린 딸로 봐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황궁의 주인인 황제가 엘레노어 마리체가 백주대낮에 스카이의 마차를 타고 입궁해 황녀궁으로 끌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황녀와의 괴리감 때문에 인지부조화상태인 것이다.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건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지.’
부정이 애틋하기보다는 허탈하게만 느껴졌다.
거기다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부디 아일린을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전하께서 안전하시도록 책임질 것입니다.”
고혹적인 얼굴에 짐짓 미소를 띠고 있는 저 남자.
스카이 페이드라의 존재가 무척 찜찜하게 느껴졌다.
과연 저 남자가 이곳에 함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순수한 의도는 아니겠지.’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황제와 황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체펠린의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일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발코니의 커튼이 걷히고 황제와 황녀가 밖으로 나갔다.
귀족뿐만이 아니라 광장을 메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제국민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제국민들이여. 그 대들을 만나 마음이 무척 기쁩니다.”
황제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별다를 것 없는 행사의 개회사일 뿐이었지만, 긴 시간 황제로 지낸 경륜답게 그는 짧은 연설로 제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어서 황녀가 앞으로 나섰다.
“오늘 여러분들 앞에서 중요한 사실을 서약하려 합니다.”
아일린 하스카토르의 낭랑한 목소리가 장내에 퍼졌다.
*
“이건 예상 못 한 일인데.”
미나즈가 스푼으로 찻잔을 휘적거리며 중얼거렸다.
“황녀가 진실의 서약을 하다니. 뭐 어떻게 조작한 거 아냐?”
“가서 지켜본 심복들을 믿는다면 사실이라고 보는 게 낫겠지요.”
황가에서 무슨 짓을 벌이는지 염탐하기 위해 두 사람은 거의 30명에 가까운 심복을 보냈다.
서약이 실현되는 순간에만 일어나는 특유의 붉은 광채를 현장에 모인 전원이 보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 정도면 서약 자체는 진실일 것이다.
“서약의 내용이 분명 ‘엘레노어 마리체를 죽이라 명령한 적도 없고, 그녀의 죽음을 본 적도 없으며 죽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였지?”
“그렇습니다. 적어도 황녀가 그녀의 죽음에 관여하지 않은 건 확실해 보입니다.”
미나즈가 스푼을 내려놓았다.
“음. 이 서약의 파장은 상당하겠지요?”
“그간 안 좋게 흐르던 여론은 상당부분 뒤집히겠지.”
잠잠히 있던 공작 부인이 대신 말을 받았다.
“우리의 여론은 더욱 나빠지겠군요.”
황가를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지면 공개적으로 규탄한 공작들의 입지가 좁아질 게 분명했다.
미나즈는 씩씩거리는 그를 달래듯 말하자 로우앤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어쨌든 그들은 현재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카드를 쥐고 있었다.
리안 플로이드 칼라브리아.
그가 현재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에 들어와 있었다.
“리안이 이미 복귀했다는 건 우리 밖에 몰라. 우리가 황가보다 먼저 접선했으니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해결된 셈이지.”
문을 열어 주었던 이조차 들어오는 줄도 모르게 연기처럼 나타났다고 하니 황실 근위대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칼라브리아 백작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셨나요?”
로우앤의 물음에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된 기간까지는 침묵한다.‘라고 하더군요.”
리안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6일 후 움직이겠습니다. 란 말을 남긴 뒤 그대로 지하에 틀어박혀 버렸다.
이유를 아무리 물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아. 뭐,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내일이 칼라브리아 백작이 말한 날입니다. 그때가 되면 뭔가 일어나겠지요.”
리안에 대해서만은 인내심이 무한에 가까운 로우앤이 옹호하듯 말했다.
“그렇게 기다렸는데 입을 다물고 얼굴도 비추지 않는다니 너무하네.
나와서 앉아 있기만 해도 이 따분한 칩거 생활의 위안이 될 텐데 말이야.”
미나즈는 투덜거리면서 안락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뭐 생각해도 소용없으니 우린 일단 좀 쉬면서 둘이 뭘 벌이는지 지켜보기나 하자고.”
사실 공작이란 것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격무에 시달리는 직종이었다.
상황은 불안해도 미나즈는 모처럼의 여유를 즐길 만큼 대범했다.
“할 일도 없는데, 가서 리안 수련하는 거나 구경할래?”
“검술이 아니라 얼굴을 구경하는 게 목적 아닙니까?”
리안의 경지에 이른 몸놀림은 지켜보는 재미가 충만했다.
로우앤은 핀잔을 던졌지만, 슬그머니 따라서 일어섰다.
“저흰 다녀올 테니 필요하면 지하로 기별 주세요.”
공작 부인에게 말을 남긴 뒤 미나 즈는 쿡쿡 웃으며 로우앤과 함께 방을 떠났다.
*
엘레노어는 자그마한 꼬챙이를 그어 무른 벽에 선을 그었다.
들어온 첫날부터 긋기 시작한 선들이 어느덧 늘어나 벽 한 줄을 매울 정도가 되었다.
지하에 갇힌 지 벌써 13일째.
달력은커녕 해가 뜨고 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컴컴한 곳이라 블레인이 품에 지니고 들어온 태엽 시계를 감아 시간을 확인하는 게 고작이었다.
날짜를 표시한 엘레노어는 천천히 낡아 빠진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일지를 기록하고 잠시 독서와 집필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램프 심지를 돋우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나 들렸을까.
바깥에서 뭔가 마찰음이 들렸다.
‘또 수련하는 건가?’
지하에서 무엇보다 넘쳐나는 자원은 시간.
블레인은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똑똑.
누군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대답해도 문을 여는 기척이 없었다.
“자작님? 부단장님?”
블레인과 일라이를 동시에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 문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세……….”
그녀는 물음을 끝까지 맺을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엘레노어.”
리안의 보라색 눈이 그녀를 다정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