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런 건 안 할래요.”
엘레노어의 입에서 딱 떨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약을 풀기 위해 또 다른 서약을 하는 건 싫어요.”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베아트릭스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너도 내게 서약을 하라며 요구했잖아.”
“그야 당신은 별로 믿음직스럽지도 않고, 약속 같은 건 금방 어길 거 같으니까.”
“너는 뭐 믿음직스러운 줄 알아?
네가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해?”
“어차피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뿐이잖아요. 손해 볼 것이 없는데 보상을 요구할 수는 없어요.”
베아트릭스가 엘레노어를 무섭게 노려보다가 이를 가는 소리를 냈다.
“봐주고 있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내가 금방이라도 너를 죽여버릴 수 있다는 걸 자꾸 잊어버리는 모양이야.”
베아트릭스의 몸 주변에서 이글거리는 살기가 피어올랐다.
무척 살벌한 광경이었으나 엘레노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런 협박에 겁을 먹은 적도 분명히 있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럴 수 없을 거예요. 나를 죽이면 당신은 외롭고 고독해질 테니까.”
엘레노어의 말에 베아트릭스의 주름진 입가가 움찔했다.
“황녀가 나를 죽이고 칼라브리아백작님을 종속시켜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이곳을 찾지 않게 되겠죠.
당신은 황녀의 의식 밖으로 사라질 거예요.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 말이죠.”
“멋대로 떠들지 마. 입 다물어!”
베아트릭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갈퀴 같은 손이 뻗어와 입을 틀어 막으려 했지만, 엘레노어는 몸을 뒤로 물리면서 끝까지 말을 맺었다.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혼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살아온 긴 세월만 헤아리고 있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세요.”
그 말을 기점으로 베아트릭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멈칫하는 그녀에게 엘레노어가 왜기를 박았다.
“믿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어차피 백작님이 이 방법으로 반드시 안전해진다는 보장도 없고, 위험하긴 그냥 각인을 자르는 거와 마찬가지니까.”
그녀는 엘레노어를 누르려던 손을 거두고 고개를 숙인 채 이만 악물고 있었다.
기운이 빠지니 무시무시한 마녀라기보다는 늙고 무기력한 노파처럼 보였다.
“고집부리지 말고 양보해요. 좋게 진행될 수 있는 일을 오기 때문에 허사로 돌리지 마세요.”
다소 누그러는 태도로 다시 권하자 베아트릭스가 투덜거렸다.
“넌 정말 짜증 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도와줄 거죠?”
베아트릭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는 엘레노어를 쏘아보았다.
“제길, 알았다고. 약속이나 지켜.”
엘레노어는 끌어안고 있던 책을 테이블에 다시 올렸다.
그리고 원래의 페이지를 펼친 뒤 내밀었다.
거기에는 제국 남부의 작은 마을 아이트리샤의 지도가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던 마을 구석에 붉게 표시된 작은 집이 있었다.
“잘 부탁해요, 베아트릭스.”
엘레노어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비앙카스타는 베일을 끌어 내려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흐릿해진 시야 앞에 우뚝솟아있는 낯선 타운하우스를 바라보았다.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의 봉쇄가 극단적으로 치닫기 전 에이브로트 공작의 권유로 그녀는 공작령을 나왔다.
우선 이 모든 일로부터 멀어져 충격받은 마음을 추스르라는 배려였다.
어차피 도움도 되지 않았고 그곳에서는 계속 에이드리언이 생각나 수락하고 나왔다.
황녀의 입김이 닿아 있는 바이스후작 가로는 돌아갈 수 없고 호위나 보안 문제도 겹쳐져 고심 끝에 그녀가 향한 곳은 바로 구 샨카른 호텔이자 현 칼라브리아 백작 저였다.
현재 제국이 발칵 뒤집히게 된 중심지라 시선들이 모이지 않을까 우려했으나 중심인물들이 빠져나가서인지 그런 일은 없었다.
주변은 빈틈없이 경호해 주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오히려 아무 기별도 없는 가운데 너무 한산해서 계속 잡생각만 들던 중이었다.
‘왜 나를 여기까지 부른 걸까.”
어젯밤 그녀는 스카이 페이드라 공작의 편지를 받았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일 마차를 보낼 테니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지정한 장소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 S. 페이드라.]
스카이는 잠시 봤을 뿐이지만, 그 존재감은 압도적으로 기억에 각인되어 있었다.
엘레노어를 봤을 때처럼 그야말로 별천지 사람.
그런 대단한 인물이 자신의 도움이 필요로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으나 인장은 진짜였고, 편지를 보내온 남자도 파티에서 스카이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갈지 말지 무척 고민하는 사이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고, 비앙카스타는 결국 거기에 타고 말았다.
그리고 미행을 능숙히 따돌려 가며 달린 끝에 현재 팰리시티 외곽의 타운하우스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제니트라는 남자의 정중한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곧 작지만 고풍스러운 거실이 나왔다.
스카이는 거기에 앉아 있다가 비앙카스타를 반가이 맞았다.
“와 주셨군요, 바이스 후작 영애.”
비앙카스타는 쭈뼛거리며 스카이에게 예법에 맞게 인사를 올렸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자세한 부탁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당신에게 해 줄 말이 있습니다.”
비앙카스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스카이의 말을 기다렸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과 에이드리언유니스는 현재 살아 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던 소식인지 모른다.
비앙카스타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며 눈을 빛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스카이가 재차 확인해 주자 비앙카스타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울다 지쳐서 전부 말라 버린 줄 알았건만,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스카이는 좋은 향기가 나는 손수건을 건네주고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그녀는 황궁 지하에 갇혀 있고 구해 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 볼 순 없나요? 칼라브리아 백작님이 돌아오시면……….”
리안 이야기를 꺼내다 멈칫했다.
비앙카스타는 스카이 역시 엘레노어를 좋아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카이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칼라브리아 백작이 황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요.”
비앙카스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카이가 설명했다.
“백작의 힘은 대단하지만, 서약 때문에 단독으로 엘레노어를 구하기는 힘듭니다. 황녀가 백작을 먼저 보게 되면 끝장이니까요.”
“네, 그렇겠네요.”
“나는 엘레노어를 구하기 위해 백작과 협력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과연 내가 그런 대단한 일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만.”
비앙카스타는 쭈뼛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앞으로 당분간 모든 파티에 참석해 화제를 주도해 주십시오.”
“네? 화제를요?”
“그렇습니다. 황녀를 비난하며 질투 때문에 엘레노어를 끔찍하게 참 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 됩니다.”
뭐든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금방 두려움에 움츠러들었다.
자신이 잘못될까 봐가 아니라 실패했을 때 엘레노어와 폐가 되는 게 두려워서였다.
“저는 파티에서 항상 벽에 붙어 있는 쪽이었어요. 노력은 하겠지만, 잘될지 확신할 수 없어요.”
“지금의 당신은 화제의 중심에 설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엘레노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주변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 겁니다.”
비앙카스타는 자신이 참석했던 마지막 연회를 떠올렸다.
엘레노어가 꾸며 준 덕이긴 했지만, 그때 분명 사람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환호했었다.
“하지만, 황녀가 나타나면….”
“황녀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연회를 즐기는 건 있을 수 없으니까요.”
공작들이 황가를 페르소나 논 그라 타로 지정한 비상시국에 아무리 어린 황녀라 한들 연회에 참석해서 흥청대는 모양새가 좋게 비칠 리 없었다.
그러나 비앙카스타는 시원스레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간 따돌림을 당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타인에게 오해만 불러일으키던 자신이 나섰다가 공연히 실패하는 게 아닐까.
무척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었지만, 반면에 숨어만 있고 싶다는 마음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비앙카스타의 망설임은 스카이의 말 한마디에 모두 날아가 버렸다.
“엘레노어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순간 엘레노어가 해 준 것들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황녀에게 속박되어 비참하게 죽었을 삶을 구해 주고 당당히 맞설 수 있게 해 주었다.
‘당신은 아주 예뻐요. 조금만 더 마음을 열면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엘레노어의 다정한 속삭임이 귓가에 윙윙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 사람이 위험한데 혼자서 안전한 저택에 틀어박혀 비탄에 잠겨 있을 순 없었다.
“네. 최선을 다해서 해 볼게요.”
비앙카스타는 의지로 눈을 빛냈다.
*
비앙카스타와 이야기를 나눈 후 3일.
스카이는 흔들리는 마차에 기댄 채 제니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던가?”
“네. 이미 팰리시티 내의 귀족들은 거의 모두 소문을 접했을 겁니다.”
“시간이 짧았는데 제법 잘 해내 주었군.”
스카이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비앙카스타는 그가 부탁한 대로 모는 오찬, 다과회, 만찬회, 자선 모임등 모든 사교장에 닥치는 대로 나타나 소문을 뿌려 댔다.
그녀 외에도 몇몇 귀족이나 하녀를 포섭해 같은 일을 지시했지만, 대부 분의 성과는 비앙카스타가 만들어낸 것이다.
“황가가 전례 없는 거대 스캔들에 휘말린 셈입니다.”
냉혈한에 다소 제멋대로였으나 유능했던 황제.
그런 그를 따뜻한 부정에 눈뜨게 한 황녀까지 두 부녀는 제국 역사상에 꼽힐 정도로 사랑받는 황실이었다.
그런데 천사 같은 황녀의 이미지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벌레 하나 잡지 못할 것 같은 그녀가 질투에 눈이 멀어 엘레노어 마리체를 끔찍하게 참살했다는 소문이 정설처럼 파다했다.
“심지어 황녀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까지 의심스럽다고 말이 나오는 중입니다.”
“일단 균열이 생기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법이지.”
짧은 기간이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황녀를 지켜보았다.
그 결과 그녀의 인품상 사람을 해코지 하려 든 게 처음이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비슷한 나쁜 짓을 많이 했고, 제법 많은 사람이 그녀로 인해 나락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 악랄함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건 그 치밀한 은페력이었다.
‘이번 일이 없었다면 나조차 속았을 거라는 거지.’
그에게도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녀는 상냥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솜사탕 같은 소녀였다.
그런 그녀의 진면목이 이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저로서는 황녀의 여론을 나쁘게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만.”
제니트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안에게 호언장담을 하고도 황녀의 소문을 퍼뜨리는 것 외에는 타운 하우스에 죽은 듯 틀어박혀 치료에만 전념하는 스카이이 모습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글쎄. 나쁜 짓을 했으면 마땅히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한가.”
스카이는 교묘하게 얼버무리며 창밖을 보았다.
슬슬 그가 탄 마차가 황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황궁 중정을 지나 마차가 별궁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마차에서 내려 기거하고 있던 별궁의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간 치료를 위해 일부러 타운 하우스에 머물렀으므로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그가 여전히 불편한 몸을 소파에 누이기가 무섭게 황녀가 들이닥쳤다.
“대체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황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렸다.
초조한 기색이 가득 묻어나는 그녀를 보며 스카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간 저는 끔찍한 소문에 시달렸다고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계속 쏟아지는 황녀의 말을 스카이가 부드럽게 끊었다.
“제가 황녀 전하께서 원하시는 답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스카이는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