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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68화 (68/120)

68화

날씨가 흐려 달도 숨어 버린 늦은밤.

한 대의 마차가 조용히 라인 오브에이브로트의 경계로 접근했다.

성벽 옆 후미진 숲에 멈춰 서자 무성하게 우거진 덤불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위로 젖혀졌다.

곧 지하로 통하는 새카만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에서 내린 칼라브리아 공작은 혀를 차며 통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간 걷자 등불이 켜진 네모난 작은 방이 나타났다.

칼라브리아 공작은 그 안에 앉아 있는 이에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 이런 은폐로 황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꼿꼿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플로이 드 공작 부인은 대답 대신 앉으라는 듯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칼라브리아 공작은 앉으면서도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광대 짓인지 모르겠군. 기껏 수도로 와서 한다는 것이 가문 최대의 영광이 될 수 있는 일을 걷어차고 남의 공작령에 틀어 박히는 거라니.”

“여기까지 와 놓고 그런 이야기만 할 거예요?”

공작 부인이 날카롭게 말하자 칼라 브리아 공작은 다소 누그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앞으로 대체 어찌할 생각이오? 감히 황실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하다니. 당장 작위가 환수돼도 할말이 없을 짓이야.”

“폐하께서 그리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무척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분명 작위는 환수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해도 플로이드 공작가의 재산은 남을 것이다.

어느 정도 빼앗긴다고 해도 그녀가 남은 재산만 쥐고 타 국가로 망명을 요청하면 수많은 국가가 그녀에게 작위를 내리지 못해 안달이 날 터였다.

막대한 국부를 유출한 제국은 흔들리게 될 거고 수많은 자본이 외국에 잠식된 채 기나긴 공황에 빠질 테니 결코 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숨어 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하지 말란 법도 없소.”

“내가 죽으면 내 아들이 원수를 갚아 주겠지요.”

공작 부인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그 애에게 자기 의지가 남아 있다면 말이지만.”

줄곧 싸늘하던 칼라브리아 공작의 표정이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 애에게 그따위짓을 한 건지 설명해요.”

“그게… 지금 무슨 소용이 있겠어.”

칼라브리아 공작은 시선을 옆으로 굴리며 딱딱히 대답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결혼해서 손에 넣은 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데 쓰일 수도 있겠지요.”

말투는 담담했으나 공작 부인의 보라색 눈동자는 농담하는 빛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당신에게 서약을 강요한 건가요?”

공작 부인이 질문했다.

칼라브리아 공작의 머릿속은 리안이 서약을 하던 밤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리안이 이제 막 걷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던 때였다.

총명하고 모두가 감탄하는 예쁜 아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리안의 지위는 평생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분명 리안의 앞날에는 어떤 어려움도 없어 보였다.

어느 날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황녀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처음 공작은 황녀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미천한 신분의 여인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뿐이다.

증거도 없고 설혹 있다 해도 사생아일 뿐이니 적당히 키워서 타국의 정략결혼 상대로 쓰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이 자꾸 변했었지..’

냉정하던 황제는 딸의 등장으로 완전히 변해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공작은 점점 초조해졌다.

혹시 황제가 모든 약속을 잊고 황녀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면 리안이 위험할 지도 모른다.

공작 부인이 결혼 생활에 실망하고 북방으로 떠나 버리자 그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리안은 그냥 두었어도 대공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을 거예요. 당신이 겁에 질려 그 따위 서 약을 하지만 않았어도 말이죠.”

공작 부인이 칼라브리아 공작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며 힐난했다.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강해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기사가 되었지만, 그땐 아장아장 걷는 어린애였소.

미래 대공이라는 점은 그 애를 오히려 위험하게 만들 뿐, 지키는 데는 도움이 안 돼.”

“어린아이 하나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그런 위험한 밀약에 발을 밀어 넣었단 말이에요?”

“당신도 그리 잘한 건 없잖아. 아이를 두고 나 몰라라 떠나 놓고 나를 비난하는 거요?”

말을 뱉어 놓고 칼라브리아 공작은 조금 움찔했다.

공작 부인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렸다는 자각은 있었다.

“어쨌든 그땐 그랬다는 거요. 당신도 내가 불안했을 거란 건 알지 않소.”

결혼했을 때까지만 해도 플로이드공작 부인이 밑지는 거라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현재 칼라브리아 공작가의 번영은 모두 최고의 기사로 자란 리안과 플로이드 공작가의 후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최초로 기사단장에 오르지 못한 칼라브리아 공작이었기에 그땐 황제의 밀약을 목숨처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최선이라 생각한 일을 했을 뿐이야.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어.”

솔직한 말이었으나 목소리가 잦아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이 구제불능 바보 천치라는 걸 알았어요. 당신 같은 사람을 믿고 리안을 맡기고 떠난 나의 어리석음이 안타깝군요.”

공작 부인은 싸늘하게 말하고 시선을 돌렸다.

“나를 비난하려고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건가?”

“아뇨. 도움을 좀 받으려고요.”

“도움?”

칼라브리아 공작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공작 부인의 태도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고자세였다.

현재 입장만 봐도 그녀를 돕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지만, 항상 우러러보던 부인이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폐하께서 우리를 끌고 오라고 하던가요?”

공작 부인의 물음에 공작은 입을 비죽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언제쯤 들이닥칠 거죠?”

“들이닥칠 계획은 없어.”

“왜죠? 당신이 바라는 걸 텐데.”

“리안이 분열된 제국의 황제가 되라고 이런 일을 벌였다 생각하오?”

공작을 끌고 오라는 황제의 명령은 정상적인 게 아니었으므로 체펠린조차도 당장은 시간을 끌라고 했다.

공작 부인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황궁으로 간 엘레노어 마리체의 소식은 들었어요?”

“그 계집은 이미 죽었어. 그렇게만 알면 돼.”

칼라브리아 공작에게 있어 여전히 그녀는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이었다.

“설령 황녀가 아니라도 리안에게 어울리는 상대는 얼마든지 있으니 그 여자를 도우란 말은 하지 마시오.”

“그런 사람이 있건 없건 황녀가 아닌 사람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 아니었나요?”

공작 부인이 짧은 행간을 읽어 치고 들어왔다.

순간 멈칫하자 그녀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뭐 생각이 바뀔 일이라도 있었나요?”

평소라면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이상하게도 입이 스르르 열려 버렸다.

“황녀가 내게 종속의 서약을 요구했소.”

어떤 말에도 냉담하던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녀는 몸까지 반쯤 일으키며 달려 들 듯 물었다.

“수락했어요?”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당황한 공작은 뒤로 몸을 좀 물렸다.

“그랬다면 이런 말을 하지도 않겠지.”

그의 대답을 듣자 공작 부인은 이 성이 돌아온 듯했다.

방금의 동요한 기색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아들에게는 시켜 놓고 본인은 거절하다니. 참 편리한 기준이네요.”

할 말이 궁색한 칼라브리아 공작이 퉁명스레 말했다.

“내게 도와달라는 일이나 말하시오. 서로 얼굴 맞대고 있어 봐야 입장 차가 좁아지는 것도 아니고 피차불만스러울 뿐이니까.”

공작 부인도 이제 더 물을 게 없는 듯 바로 요구 사항을 말했다.

“한동안 수도를 떠나 있어요.”

“수도를? 어째서?”

“리안을 위해서예요.”

리안이라는 말에 공작이 옅은 색 눈동자를 빛냈다.

“그 애가 설마 팰리시티로 돌아왔나?”

공작 부인은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우릴 보호해 달라고는 하지 않아요. 하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해요.”

딱 잘라 말한 뒤 플로이드 공작부인은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

칼라브리아 공작은 멀어져 가는 부인의 늘씬한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다 지하를 떠났다.

*

종일 초조하게 서성이던 엘레노어는 정해진 시간이 되자마자 베아트릭스의 방을 노크했다.

“눈을 빛내는 걸 보니 뭔가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해낸 모양이군.”

베아트릭스는 입을 비죽이며 들어오는 엘레노어를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뭐라고 해도 난 네 무모한 짓에 참여하진 않을 거야.”

그녀는 블레인과 일라이와 협력해도 마수를 이길 가능성이 없다며 엘레노어의 계획을 비웃었다. 엘레노어는 코끝을 들며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은 전혀 다른 얘기니까.”

자신만만한 엘레노어를 삐딱하게 바라보던 베아트릭스가 손에 든 책을 발견하고 물었다.

“그건 또 뭐야?”

“오래된 지도책이에요.”

지하 감옥 구석구석에는 제법 책이 많이 쌓여 있었다.

엘레노어가 탁자에 두꺼운 책을 쿵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먼지가 일어나 베아트릭스가 콜록대기 시작했으나 엘레노어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리 접어 둔 페이지를 펼쳤다.

“제국 서부, 콜체른 영지에서 남쪽으로 벗어난 마을, 아이크리샤.”

다짜고짜 쏟아 낸 말에 베아트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여기에 밀라트릭스가 있어요.”

심드렁하던 베아트릭스의 자세가 꼿꼿해졌다.

그녀가 지도로 곧장 시선을 가져가자 엘레노어는 과자로 장난치는 어른처럼 손바닥으로 지도를 덮었다.

“뭐 하는 거야?”

“우선 내 말을 들어 봐요. 내게 계획이 있어요.”

관심을 끄는데 성공한 엘레노어는 책을 뒤로 빼 무릎에 얹고 제안을 던졌다.

“나와 협력해서 칼라브리아 백작님의 서약을 푸는데 협조해 주세요.”

베아트릭스는 평소대로 그게 무슨 소리냐고 타박을 던지는 대신 미간을 찌푸린 채 듣고 있었다.

아마 이게 그간 해 온 정보 교환중 가장 중요한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슬슬 백작님이 팰리시티에 도착할 즈음이 됐어요. 아마 이곳으로 곧장 올 거라고 우린 예상하고 있어요.”

베아트릭스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리안이 마수를 돌파하지 못할 거라는 둥 어깃장을 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게 어쨌는데?”

“우선 그걸 설명하기 전에 하나 물을게요.”

엘레노어가 말을 슬쩍 돌리자 베아트릭스는 몸이 달은 기색이었다.

“백작님이 종속의 각인이 새겨진 부위를 잘라 해제하면 황녀가 어떻게 알게 되나요?”

“서약이 각인된 부위가 뜨거워지고 빛을 발하게 돼. 아픔 속에 극렬한 상실감과 고독이 들면서 서약이 해제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서약 부위의 아픔을 해제로 곧장 연결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명령을 내리지 않은 채 24시간이 그냥 지나갈 가능성은?”

“별로 없어. 각인이 아프면 서약을 의식하게 되고 뇌리에 떠오른 순간 조금이라도 서약자의 죽음을 떠올리면 그대로 죽어 없어질 테니까.”

역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건가.

엘레노어는 입술을 깨문 뒤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백작님께 부탁해서 당신을 함께 데리고 나가 줄게요. 그러니 밀라트릭스를 찾아 힘을 되찾으면 종속의 서약을 해제해 줘요.”

벨라트릭스의 눈이 순간 빛을 발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기다렸다는 듯한 흔쾌한 대답이었다.

엘레노어는 빈틈없이 팔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내게 서약해요.”

“뭐라고?”

“당신이 칼라브리아 백작의 서약을 풀어 주겠다는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정언의 서약이요.”

정언의 서약.

자신이 서약한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사망하게 되는 언어의 금제였다.

베아트릭스는 주름진 입가를 오므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좋아.”

허락이 떨어지자 긴장하고 있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신 너도 내게 정언의 서약을 하는 게 조건이야.”

그러나 베아트릭스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네가 꺼낸 제안이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밀라트릭스에게 데려가서 힘을 되찾도록 만든다고 서약해.”

베아트릭스의 거친 손이 엘레노어의 티 한 점 없는 팔목을 꼭 쥐었다.

“그걸 지키지 않으면 너도 죽는 거야.”

베아트릭스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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