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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67화 (67/120)

67화

체펠린은 아침 일찍 인가청의 제가 실로 향했다.

황제는 높이 쌓인 서류 더미 뒤에 피로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한 듯 눈빛이 멍해 보였다.

“인가청의 보르미아 가문 귀족들이 전원 철수했네.”

행정을 다루는 기관은 대부분 보르미아 가문 출신이거나 그 방계가 많았다.

요직에 있는 이들이 빠졌다면 제아무리 황제가 유능해도 일이 진척되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 리안이 올 텐데 이런 멍청한 서류 조각들에 붙들려 있다니.”

그 멍청한 서류 조각이 제국을 돌아가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어째서 황제는 제국 행정의 위기보다 리안을 더 신경 쓰고 있는 걸까.

부디 과로 때문에 예민해진 것이기를 바라며 체펠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속히 공작들이 일선에 복귀해야만 할 듯합니다.”

“동감하네. 당장 보르미아 공작을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지어야겠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일어서는 황제를 체펠린이 씁쓸하게 만류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황제가 이유를 묻는 듯한 시선을 띄었다. 체펠린 고개를 조아리며 느릿느릿 설명했다.

“칼라브리아 공작가를 제외한 네 개의 공작 가문이 일시에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공동 성명이라고?”

“라 플로이드, 라인 오브 에이브로 트, 보르미아 레지던스, 그리고 레기온 오브 로우앤이 황가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했습니다.”

“페르소나… 논 그라타라고?”

멍하던 황제의 눈빛이 변했다.

페르소나 논 그라다.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

국경 안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인물에게 쓰는 외교 용어였다.

제국의 황제로 살아온 그는 그러한 불명예스러운 호칭으로 불리리라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분노로 흐려졌다.

“감히 제국의 봉신이 황제인 나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했다는 건가?”

“원칙적으로 공작령은 제국에서 독립되어 완전히 공작에게 종속된 자치 지구입니다. 그들은 누구라도 출입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떠올린 건 아마도 외교관인 에이브로트 공작일 것이다.

그 안에는 인간 법전이나 다름없는 로우앤 공작이 함께 있으니 법률에 저촉되는지 검토 먼저 하고 실행에 옮긴 게 분명했다.

자신의 제국에서 동시에 네 명의 공작에게 거절당한 황제는 명예에 지대한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가 쾅 소리가 나도록 책상을 내리쳤다.

사방으로 서류들이 흩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성을 냈다.

“역사에 처단될 반역자 같으니! 그 깟 손바닥만 한 땅에 평생 틀어박혀 있겠다면 좋을 대로 하라고 해! 그 빌어먹을 공작들을 전부 공작령 밖으로 발도 못 붙이도록 만들어!”

감정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으나 제국의 황제로서는 최악의 명령이었다.

체펠린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제를 말렸다.

“공작과 공식적으로 갈라서면 안됩니다. 제국민들이 동요할 거고 외국에서 제국의 분열을 알게 되면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기회를 노려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쥐새끼들은 이참에 모두 짓밟아 버리면 된다. 내겐 칼라브리아공작이 있으니까!”

지친 상태에서 감정에 휩쓸린 황제는 이미 대외 관계나 정황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렸다.

“제국에 단 하나뿐인 제대로 된 공작을 황궁으로 입궐시켜라! 또한 페이드라 대공도 함께 오라고 해! 그 주제도 모르는 역도들을 당장 끄집어내 목을 치겠다!”

황제가 완전히 이성을 잃었으므로 더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을 듯했다.

체펠린은 참담한 심정이었으나 우선 그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황제와 함께 인가청을 떠났다.

*

제국 중부의 초원.

우거진 풀 사이로 난 척박하고 좁은 도로를 두 필의 말이 달리고 있었다.

팰리시티까지 이틀 거리.

수도를 떠난 첫날에는 가끔 상단이나 여행자에 마주치기도 했지만, 오늘은 간간이 야생 짐승의 기척만이 느껴질 뿐 단 하나의 통행인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토록 외진 길을 주파하는 데도 스카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으나 그런 그의 뒤에서 제니트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정말 이리로 가면 칼라브리아 백작과 마주칠 수 있습니까?”

말 위에서 흔들리며 소리 높여 묻자 스카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불안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라도 설명해 주십시오!”

말을 곁에 붙이자 스카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내가 엘레노어에게 감시를 붙여 둔 것은 알고 있겠지.”

제니트는 본인이 그 감시인이었던 적도 있었으므로 물론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스카이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리안에게로 향했어. 나는 그걸 따르고 있는 거야.”

“남작 부인에게 붙은 감시가 무슨 수로 칼라브리아 백작에게 간 겁니까?”

“비하인드 나이츠를 따라갔으니까.”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던 제니트가 드디어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비하인드 나이츠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정예 집단이라 해도 전원이 좁은 황궁 지하로 잠입하는 건 무리야. 그래서 엘레노어를 황녀에게 넘기면 따르지 못한 인원들이 리안에게 복귀할 거라 예상했지.”

넓은 초원으로 갑작스레 사라진 리안 하나를 추적하긴 어렵지만, 많은 인원이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면 미행이 어렵진 않다.

제니트가 비로소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대로 적중했습니까?”

스카이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추적하고 계신 겁니까? 제 눈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렇겠지. 흔적 같은 건 처음부터 남기지 않았으니까.”

비하인드 나이츠 같은 정예 기사단을 따라가는 것만도 고역인데 흔적을 남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스카이는 팔을 들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 주었다.

“이게 나를 인도하고 있어.”

반지 중앙에서 빛나는 스트링 스톤을 보고 제니트가 완전히 전말을 파악했다.

잠시 대화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스카이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붉은실.

밀정에게 가벼운 진실의 서약을 걸게 한 후 나타난 선을 이용 중이었다.

“멈춰서 조금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피크닉 가는 거라 생각하나?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계속 타박받아도 제니트는 끈질겼다.

“수도에서 치료했다고 해도 응급조치에 불과합니다. 팰리시티를 떠나기 전 황녀에게 사람을 보내서 시간도 벌었으니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카이의 상처가 벌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듯했다.

아무리 황녀에게 전갈을 보냈다 한들 시간적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스카이는 말의 속도를 줄였다.

부하의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왔군.”

지평선 너머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이쪽은 지금에야 눈치챘지만, 저쪽은 시야에 잡히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완전히 멈춰 서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곧 정갈한 대열의 기사단이 석양을 받으며 웅장한 자태를 선명히 드러냈다.

스카이의 시선은 중앙 맨 앞을 달리고 있는 남자에게 꽂혔다.

후드를 뒤집어썼는데도 리안 칼라 브리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우리를 보고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속도를 줄이지 않는 기사단을 보고 제니트가 불안한 듯 물었다.

스카이는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기사단은 놀라운 속도로 제동을 걸어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췄다.

“오랜만입니다, 칼라브리아 백작.”

스카이가 커다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리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지요.”

“나는 몹시 바쁩니다만.”

고요한 평원은 리안의 딱딱하고 낮은 목소리를 선명하게 전달했다.

미래의 대공이라 하나 현재 신분이 백작이면서도 공작인 스카이에게 조금도 존대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스카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미소마저 지으며 다시 권했다.

“들어도 손해 볼 건 없을 겁니다.

당신이 가장 듣고 싶어 할 이야기를 가지고 왔으니.”

리안은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곧 말을 움직였다.

“우선 설명이 좀 필요할 거 같군요.”

그가 다가오자 스카이는 곧장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가감 없이 전했다.

리안은 내내 무표정했으나 마지막 부근에서 대리석 같은 이마를 찌푸렸다.

“당신이 엘레노어를 황녀에게 넘긴 원흉이라는 사실을 자백하러 여기까지 온 겁니까?”

“내 이야기가 그렇게 들렸습니까?”

스카이가 미소를 짓자 리안의 표정은 반대로 더욱 안 좋아졌다.

“그냥 저택에 숨겨 두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완전히 구해 내기 위해 과감히 시도한 겁니다.”

“그리고 실패했지요.”

리안이 코끝을 들며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이 엘레노어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저택 밖으로 나가게 하지 않았다면 햇볕도 들지 않는 지하에서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게 나의 잘못이라 한들 당신에게 미안할 일은 없겠지요.”

스카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과 엘레노어는 현재로써 딱히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요.”

리안이 붉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옆에서 제니트가 왜 그러냐는 눈으로 스카이를 보았다.

필요 없는 도발이었지만, 감정이라고는 없는 것 같던 남자가 말 한마디에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는 게 재미있었다.

“나는 죽게 되더라도 그녀가 너머에 있을지 모르는 문을 닫고 돌아오진 않을 겁니다.”

마수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스카이를 비난하는 투였다.

금방이라도 대화를 끝내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으므로 스카이가 다시 당근을 던졌다.

“뭐, 내가 저지른 실수는 직접 만회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당신이 종속의 각인이 새겨진 부위를 제거하고 24시간 동안 황녀가 죽음의 명령을 내리지 못하도록 시선을 끌겠습니다.”

파격적인 제안임이 분명했다.

제니트마저 경악한 표정을 지었으나 리안의 보라색 눈동자에는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엘레노어가 내 잘못으로 지하에서 죽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리안은 딱히 그럴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당신에게 손해가 될 제안은 아닐 텐데요. 어차피 당신은 지하로 가서 엘레노어를 구할 게 아닙니까?”

잠시 생각하던 리안이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당신이 뭘 하든 난 들어갈 테니까.”

“그 들어가는 시기를 오늘로부터 일주일 정도 후로 늦춰 주십시오.”

스카이의 요구를 리안이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상대로 팰리시티에 도착하자마자 황궁으로 직행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스카이는 미리 준비한 대로 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그사이 엘레노어는 무사할 겁니다. 내가 책임지고 황녀가 지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둘 테니까.”

“당신의 그 계획이라는 게 늘 성공하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만.”

직접적인 비난에도 스카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어차피 당신도 종속의 서약에서 벗어날 뾰족한 수가 없을 겁니다.

엘레노어를 구해 내자마자 자신의 손으로 베어 버리거나 혹은 그녀의 눈앞에서 그냥 죽고 싶은 겁니까?”

공격을 돌려주자 리안의 뚜렷한 눈매가 움찔했다.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북말을 던졌다.

“딱 일주일입니다.”

바라던 대답이 나오자 스카이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 이상은 절대 못 기다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면 충분하니까.”

그렇게 합의를 마치자 리안은 한 치도 지체하지 않고 돌아섰다.

가는 길이 같건만 동행할 생각이 없는 듯 그는 곧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사라져 버렸다.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제니트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맡아 주겠다는데 무척 뻣뻣한 태도군요.”

제니트는 자신의 주군이 하대받은 것이 무척 불쾌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스카이는 리안의 싸늘한 태도가 싫기는커녕 흐뭇하기까지 했다.

그 고고하고 냉정한 남자의 안중에 의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불만을 가질 것 없어. 그저 질투하고 있을 뿐이니까.”

“질투… 말입니까?”

스카이는 설명 대신 말의 머리를 팰리시티 방향으로 돌렸다.

“바로 수도로 돌아가지.”

“목적을 이루었으니 조금 쉬었다가셔도 되지 않습니까?”

“팰리시티에 가면 푹 쉴 테니 잔소리는 그쯤 해 둬.”

수도로 가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스카이는 두뇌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종일 달려온 평원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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