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66화 (66/120)

길게 숨을 내쉬며 그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배가 두 개로 쪼개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으나 어쨌든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곧 하늘이 빙글 돌았다.

돌바닥에서 며칠 만에 처음 일어나서 앉은 데다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빈혈이 일어난 것이다.

몸을 돌벽에 기댄 채 잠시 기다리자 어지러움은 다소 가라앉았다.

그러나 온몸이 말할 수 없이 뻐근하고 욱신댔다.

뻣뻣한 목을 조금 움직이자 잔뜩 거칠어진 머리카락이 까슬한 뺨 위로 드리워졌다.

거슬려서 그것을 손가락으로 치우고 있을 때였다.

“공작님.”

입구를 가려 둔 나무판을 치우며 제니트가 들어섰다.

바깥의 상황을 살피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좀 괜찮으십니까?”

“당장 죽진 않을 것 같군.”

스카이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을 구해 왔습니다. 일단 목을 축이시지요.”

제니트가 물을 건네며 스카이를 부축했다.

두 사람은 현재 지하 감옥 안의버려진 창고에서 은신 중이었다.

엘레노어를 구하러 침투했다가 정체 모를 마수에 마주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간신히 도망쳐 나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하 셋은 사망했고, 스카이는 큰 부상을 입었다.

제니트가 상대적으로 양호했으나 그 역시 무사하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모두의 시선을 피해 지하 통로를 빠져나가기란 어려웠으므로 일단 숨어서 회복을 도모하기로 했다.

“바깥 상황은 어떻지?”

“좋지는 않습니다.”

스카이의 질문에 제니트가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황녀가 페이드라 공작님을 찾기 시작한 것 같다고 합니다.”

이미 이곳에 머문 지가 벌써 3일 째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까지는 스카이도 예상한 바였다.

“슬슬 여길 떠나야겠군.”

스카이의 말에 제니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대로 앉지도 못하시지 않습니까. 나가는 건 무리입니다.”

“그래도 나가는 수밖에 없어. 시간을 끌수록 위험해질 뿐이야.”

아직 통증은 끔찍할 정도로 심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력을 회복했다.

움직일 수 있다면 바로 나가야만 했다.

“그렇군요… 바로 돌아가서 상처를 의사에게 보여야 하겠지요.”

제니트가 중얼거린 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잘 계획을 짜면 별궁으로 몰래 숨어드는 게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아니. 별궁으로는 갈 수 없어. 거긴 시선이 너무 많으니까.”

가뜩이나 흔들리고 있을 황녀에게서 의심을 사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별궁에서 치료를 받다 보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부상의 존재를 숨기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황궁 밖으로 나가 응급조치를 하고 부상 부위를 가린 뒤 적당한 부재의 이유를 마련해 돌아와야만 했다.

그런 사실을 설명하자 제니트가 다시 대안을 내어놓았다.

“그럼 우선 제국 공작들이 모여 있는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로 숨어들어 가서 건강을 회복하면 어떻겠습니까.”

“거긴 현재 제국 경비가 가장 삼엄한 곳이지. 게다가 공작들이 결코 환영하지 않을 거야.”

미나즈는 그에게 호의적이었고 공작 부인은 별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그를 벌레 보듯 하는 로우앤 공작이 함께 있다.

게다가 아무리 황제가 가로막고 있어도 그런 거물들이 바깥소식을 전혀 모를 리 없었다.

비밀 커넥션이 있을 거고, 그를 통해 스카이가 황녀에게 엘레노어 마리체를 넘기고 환심을 샀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부상을 이어 약해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건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달리 계획이 있으십니까?”

“…합류하는 수밖에 없겠지.”

“합류라면………?”

제니트는 묻는 도중 답을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칼라브리아 백작에게 가는 겁니까?”

“그래.”

스카이는 다소 짜증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크메르시아를 손쉽게 토벌하고 복귀 중인 리안 칼라브리아라면 마수를 돌파할 가능성이 커.”

“하지만 그는 종속의 서약에 걸려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에게 내가 필요한 거야.”

스카이의 대답에 제니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리안에게 걸린 종속의 서약을 해제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럴 터였다.

하지만 스카이는 제대로 설명할 몸상태가 아니었다.

“황궁 밖으로 나가 은밀히 치료하고 곧장 도성을 떠나겠다.”

스카이는 제국 뒷세계의 인맥이 넓었다.

팰리시티를 당당히 활보할 수는 없어도 의사 정도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적당히 약재만 구하면 직접 치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니트의 표정은 심각했다.

“우리가 제국 토벌대에 붙여 둔 감시인들은 이미 리안을 놓쳤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리안이 원정을 떠날 때 제국 기사단에 밀정을 심어 두었으나 리안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따로 떨어져 나온 탓에 추적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와 가장 먼저 접선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데, 우린 지금 그가 이 넓은 제국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체 어떻게 만나시려는 겁니까?”

“그 부분은 준비해 둔 바가 있으니 그대로 따르면 돼.”

스카이가 설명을 일축해 버리자 제 니트가 입슬을 꾹 깨물었다.

“공작님께서는 여전히 그녀를 구하실 생각입니까?”

“모든 일은 내가 끝났다고 말할 때까진 계속 진행되는 거야.”

스카이는 딱 잘라서 명령했다.

“해가 지면 바로 결행할 테니 내게 종속된 기사들에게 접촉해 준비해 둬.”

제니트는 납득하지 못하는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스카이를 거역하진 않았다.

그가 밖으로 나가 버리자 스카이는 세우고 있던 몸을 벽에 기댔다.

자못 냉정한 척했지만, 그는 불같은 분노와 자기혐오에 휩싸여 있었다.

잘못된 계획 탓에 수하를 잃고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 오만했다.

계산이 빗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스카이는 더욱 실패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을 이루고 말겠다.’

패배자의 몰골로 리안 칼라브리아를 찾아가는 건 그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차라리 황녀를 협박해서 마수를 돌파할 생각까지 했다.

실낱같은 성공 가능성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자신이 직접 엘레노어를 황궁으로 데려와 황녀에게 넘겼다.

무슨 수를 써서든 실패를 만회할 것이다.

스카이는 이를 악물며 팔로 눈을 덮은 채 자리에 누웠다.

지하 감옥의 구석방.

엘레노어와 블레인, 그리고 일라이가 동그랗게 앉아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어디에 있건 지하 감옥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손바닥을 보듯 아는 데도 굳이 구석방에 모인 것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 얘기들을 나눴어요.”

엘레노어는 베아트릭스와 나눈 이야기를 그들에게 소상히 전달했다.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일라이가 물었다.

“베아트릭스가 마수를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뇨. 지금으로써는 불가능할 거예요.”

“강력한 무력이라면… 그렇겠군요.”

일라이는 시선을 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 우리가 협력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엘레노어가 꺼낸 말에 일라이와 블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협력 말입니까?”

“베아트릭스가 마수의 시선을 빼앗으면 마수를 협공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굉장히 강력한 마수던데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우리 일행 중에는 환자도 있으니까요.”

“에이드리언이 위험하지 않도록 저도 앞에 나서서 시선을 분산할게요.”

“당신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어떻게 시킵니까?”

“이곳에 계속 갇혀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빨리 나가기 위해 땅굴을 팔 생각까지 하셨지 않나요?”

“그거야 위험 부담이 없는 방법이니까 고려한 겁니다. 마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기다리는 게 낫습니다.”

블레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 챈 엘레노어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곧 리안이 올 테니까요.”

일라이까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백작님은 여기 오면 안 돼요. 황궁에 왔다가 황녀와 마주치면 바로 종속된다고요.”

“비하인드 나이츠가 리안에게 접촉했을 테니 이제 서약에 대해 알았을 겁니다. 그럼 알아서 황녀와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해서 오겠지요.”

“저희가 당신을 따라 로사그란데까지 침투했습니다. 단장님이시라면 아무 어려움 없이 누구도 모르게 들어올 수 있을 겁니다.”

두 사람 다 리안에 대한 신뢰가 굉장했다.

엘레노어도 그가 얼마나 굉장한 기사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패했을 때의 위험이 너무나 크다 보니 걱정스러웠다.

“백작님이 여기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지하에는 와 본 적도 없을 텐데요.”

“리안은 제국 기사단장으로서 기밀에 접근할 권한이 있습니다. 아마 지하 구조도 알고 있을 거고, 그 안에 뭐가 있는 지까지 파악해 뒀을 겁니다.”

“기사단장이 된지 얼마 안 됐잖아요. 케케묵은 자료까지 찾아 머리에 넣기엔 시간이 부족하지 않나요.”

“어렸을 때부터 소년 기사단장이었죠. 리안의 성격을 보면 밤을 새워서라도 했을 겁니다.”

솔직히 납득했지만, 엘레노어는 입장을 물리지 않았다.

“마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황녀의 시야에 들어가기만 하면 서약을 활성화할 수 있어요. 멀리서 연금술사의 도구들을 이용해서 보기만 해도 끝장이라고요.”

“우리 역시 그 위험성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럼 우리도 위험을 나눠서 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저 때문에 모두 위험해지는 건 죄송하지만..….”

“우리가 위험해지는 것이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블레인이 입을 좀 내밀었다.

“리안이 여기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피하려는 겁니다. 계속 얘기하지만, 당신이 위험해지면 리안에게 면목이 없단 말입니다.”

“단장님은 당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 명했습니다. 저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라이까지 그렇게 말하자 더 할말이 없었다.

침울하게 입을 다문 엘레노어를 위로하듯 블레인이 말을 건넸다.

“당신이 살아 있는 이상 리안은 무슨 일이든 감수하고 구하러 올 거라 고요. 알고 있잖아요?”

싫을 만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문제인 거고.

“다른 좋은 계획이 떠오를지 모르니 일단 그 생각은 지우고 좀 쉬어요.”

블레인의 권유에 엘레노어는 홀로 머물고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몸이 피곤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기력이 없어 엘레노어는 그대로 침상에 누웠다.

삐걱대는 침상 위에서 리안이 준 목걸이를 만지작대고 있으려니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살아 있다면 그 녀석은 무조건 찾아온다니, 하핫. 그래서 황녀가 널 그렇게 잡아먹으려고 드는군.]

베아트릭스였다.

능력을 사용해 방금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그럴 거라 예상했으므로 엘레노어는 그냥 잠잠히 있었다.

[그럼 백작이 오는 게 싫다면 죽으면 되잖아?]

신경을 긁으려는 듯한 말투.

그러나 엘레노어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리안이 와서 종속되면 어차피 죽을 목숨, 그냥 먼저 가는 게 속 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왜냐면 리안은 정말 올 테니까.

그가 왔을 때 이미 죽어 버린 시체를 보고 허탈함에 젖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서약만 없었어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엘레노어는 뭔가를 떠올렸다.

‘베아트릭스가 백작님께 주술을 걸었을 땐 이미 힘이 약했던 시기일텐데.”

그녀는 수백 년 전에 힘을 잃고 봉인됐고 서약이 진행된 시점은 황녀가 태어난 후니 길어야 17년 전이다.

항상 늘어놓는 자랑에 따르면 그녀가 현재 쓸 수 있는 힘은 예전의 반도 안 되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힘을 되찾으면 백작님의 주술을 풀 수 있겠구나.’

엘레노어의 눈이 영민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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