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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65화 (65/120)

제65화

이미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지만, 베아트릭스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즉시 거절하는 대신 입가를 찡그렸다.

긍정적인 신호라고 보고 엘레노어는 눈을 빛냈다.

“그렇게 좋아하지 말라고.”

베아트릭스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마수에 대한 것이 어지간히 궁금한지 결국 입을 열었다.

“그건 못 해.”

“못 한다고요?”

그간 베아트릭스와의 문답에서 엘레노어는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그중 가장 귀에 쏙 들어온 것은 종속의 서약은 시전한 주술사보다 압도적으로 훨씬 강력한 주술사라면 해제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래. 그 주술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주술사가 건 거니까.”

“그건 당신이라면서요?”

베아트릭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90% 자기 자랑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고 얼마나 천재였고 얼마나 대단했는지 듣느라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는데 인제 와서 약한 척?

의문을 품던 엘레노어는 베아트릭스의 눈에 자신만만한 빛이 떠오른걸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칼라브리아 백작님에게 종속의 서약을 걸었군요.”

“그래. 세상 누구도 풀지 못할걸.

나는 그야말로 최강이니까.”

그녀는 자부심 서린 목소리로 으스댔다.

“뭐 잘됐지. 그놈은 왠지 위험한 냄새가 나서 싫단 말이야.”

베아트릭스의 혼잣말에 엘레노어는 살짝 뜨끔했다.

원작 상에서는 리안이 위기에 처한 황녀를 위해 폭주하는 베아트릭스를 아트릭스가 탁자를 내려쳤다.

“교환하기로 한 정보나 말해. 저 밖에 있는 마수는 뭐지?”

엘레노어는 곁에 놓인 양피지를 끌어다 깃펜으로 글자를 적었다.

[Eligos]

“엘리고스?”

베아트릭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들어본 적 없는 마수인데.”

“검은 갑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탄 마수예요. 대상의 시야를 차단하고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서 어둠 그 자체가 공격하는 듯한 느낌을 주죠.”

엘레노어의 말에 베아트릭스가 손을 딱 쳤다.

“맞아. 그 말대로야. 말의 울음소리도 들은 것 같군.”

베아트릭스는 저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고는 몸을 앞으로 획 내밀었다.

주름진 눈꺼풀 아래의 거의 백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럼 돌파 방법은 뭐지?”

“그걸 말해 주려면 더 중요한 정보가 필요하겠는데요.”

딱 부러지는 엘레노어의 말에 베아트릭스가 코를 찡그렸다.

“하지만 이제 당신에게 알고 싶은 중요한 정보는 딱히 없어요. 그러니까 대신 요구 사항을 들어줘요.”

“제길. 계산적인 계집이군.”

“이제 알았나요?”

엘레노어는 도도하게 대답한 뒤 요구했다.

“당신은 방 바깥의 소리나 움직임을 전부 파악할 수 있죠?”

“어디까지나 다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거리에 한계가 있어.”

“황녀가 지하로 들어왔을 때로 충분해요. 움직임을 제한하는 주술은 통하지 않아요. 강한 빛을 내서 안을 밝힌 뒤 아주 강력한 힘으로 한 순간에 제거해야 해요.”

주술로 신체 능력을 강화한다 해도 마수를 두 동강 낼만큼의 힘이 노파의 신체에서 발휘될 리가 없었다.

베아트릭스는 거기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지만, 엘레노어는 그녀가 탈출은 포기하지 않은 것 같다고 느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정해진 시간 내내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엘레노어는 팰리시티의 ‘샤이란의 뿔피리’라는 여관이 아직도 영업 중이냐 거나 요 근래 유행하는 샴페인 브랜드 같은 사소한 질문에 답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몇 가지 물품을 부탁한 뒤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

에오가이노스의 집무실에서 나오던 체펠린은 마침 황제를 찾아온 황녀와 마주쳤다.

그는 양팔 가득 양피지 두루마리를 끼운 채 그것들을 읽으며 걷느라 하마터면 그녀와 부딪칠 뻔했다.

“아,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체펠린의 사과를 받으며 황녀는 그가 떨어뜨린 양피지를 주워 주었다.

“폐하께서 또 바쁘신가 보군요.”

대신해서 제국 행정의 인가를 대행할 권리가 있었다.

그 권한은 제국의 시작부터 보르미아 공작가에 있었으므로 황제는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임명할 수도 없었다.

타인을 임명하는 순간 보르미아 공작를 봉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래서 황제는 현재 인가청에서 밤낮 없이 익숙지 않은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덩달아 황제의 업무를 봐야 하는 체펠린까지 고통받는 중

“정정하신 분이니 곧 쾌차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체펠린의 표정은 어두웠다.

보르미아 공작은 바로 전날까지 아무 문제도 없이 업무를 처리했다.

물론 갑작스러운 병환이 나타나도 이상할 것 없는 연배이긴 하지만, 그 격무를 소화할 정도로 아무 조짐이 없다가 와병은 이상했다.

‘미리미리 보르미아 공작의 후임을 정해 두셨어야 하는 것을.’

유능한 한 사람에게 많은 일을 몰아두면 얼마간은 무척 편하지만, 그 사람의 부재 시기에는 모든 일이 마비되고 만다.

그러나 미리 정해 두지 않은 황제의 근시안을 탓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황제가 즉위하기 전부터 묵묵하고 꾸준하게 자리를 지켜 왔기에 황제에게 있어서는 제국 시스템의 일부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차라리 정말 병환이라면 다행일텐데.’

만일 아픈 게 아니라 다른 공작들처럼 의도를 가지고 황제에게 어깃장을 놓는 거라면 큰일이었다. 반란이 아니어도 골치가 무척 아파진다.

제국 최고의 번영기라 불리는 현재는 보르미아 공작의 완벽한 행정 처리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오래가지 않도록 끝내야만 한다.’

긴 제국 역사상 공작들의 집단적인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전부 황제의 힘에 의해 명분과 구심점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이 모든 일의 구심점은 리안 칼라 브리아.

하나같이 명민한 제국의 공작들이 황녀에게 종속된 리안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할 리는 없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칼라브리아 백작에 달렸는가.

그가 돌아와 제정신인 상태에서 황제에게 충성하면 다시 평온한 제국으로 돌아올 텐데.

어쩌다 그 남자 하나에 황가가 이토록 휘둘리게 되었단 말인가.

원래부터 중요한 존재이긴 했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황제가 악수를 반복해서 두며 자신의 입지를 차례차례 좁혀 온 탓이 컸다.

체펠린이 속으로 탄식하고 있을 때였다.

“빨리 칼라브리아 백작님께서 돌아오면 좋겠어요.”

마음을 읽은 듯한 황녀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그분만 오시면 지금 폐하의 격무도 체펠린 백작님의 고생도 모두 잘 해결되겠죠?”

체펠린은 황녀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 무거운 기분에 잠겼다.

황제가 밝히겠다고 했으니 지금 그녀는 종속의 서약에 대해 알고 있을 터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웃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순진해서 도저히 어두운 면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지만, 낙관할 수만은 없겠지요.”

체펠린은 무척 신중하게 답변했다.

‘이젠 칼라브리아 백작을 종속시키는 것으로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진 않겠지.’

황제가 공작령을 침범한 데다 공작들을 강제로 연금까지 시켰다.

게다가 엘레노어 마리체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제국의 고위 귀족들을 자신의 곁에 모으고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로 보르미아공작과 어긋난 지금, 모든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현 상황은 공작들의 이해관계와 명예 그리고 체면까지 얽혀 있는 복잡한 정치판이 되어 버렸다.

과연 이 어린 소녀가 리안 칼라브리아라는 거대한 힘을 잘 조정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까.

체펠린은 무척 불안했지만, 황녀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전 잘 풀릴 것 같아요. 아일린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체펠린은 그녀의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최근 페이드라 공작 전하와 가깝게 지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체펠린의 말에 황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울리긴 하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어요. 그저 요즘 황궁 밖에 나가기가 꺼려져서…..”

화들짝 놀라 변명하는 황녀의 모습이 토끼 같았다.

“네. 황녀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안이 된다면 그것으로 좋지 않은가 해서….”

사실 체펠린은 슬슬 그녀가 페이드라 공작에게로 돌아섰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고 있었다.

원래라면 스카이 페이드라라는 이 질적인 존재는 황녀의 부마로 고려대상조차 아닐 것이다.

리안을 제쳐 놓더라도 클로드 로우앤이라는 젊고 빠질 데 없는 미혼공작이 있었고, 제국의 후작이라도 스카이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만 마음을 돌리면 이제는 황제도 허락할 것이다.

공작들과의 사이가 갈라지고 제국에 분열의 씨앗이 심기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게다가 그는 황녀에게 관심이 있는 거로 보이니까.’

스카이는 최근 눈에 띌 정도로 부쩍 황녀와 친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세간에는 그가 엘레노어 마리체를 꾀어내 황녀에게 바쳤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그녀가 모습을 감춘 데다 몇몇 황궁의 고용인들이 엘레노어 마리체를 봤다는 말까지 하고 있어서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황녀가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페이드라 공작님은 요즘만날 수 없는걸요.”

“바로 며칠 전에 연회를 함께하셨지 않습니까?”

“그날 이후로 쭉 부재중이시더군요.”

업무가 너무나 바빠 스카이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뭔가 이유를 미리 말씀하셨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샴페인을 너무 마셔서 연회 도중부터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스카이 페이드라가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체펠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무래도 빨리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신경 쓰이는 참이었어요.”

“네. 우선 함께 페이드라 대공 전하를 만나러 갑시다.”

두 사람은 의견을 맞춘 뒤 별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찾으려는 스카이 페이드라가 불과 300m 정도 거리에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

해 몇 번이고 악문 탓이었다.

스카이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배부근을 바라보았다.

벽 틈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옷가지를 찢어 매어놓은 복부가 비쳤다.

처음에 묻은 핏자국은 그대로였지만, 더 배어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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