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던 엘레노어는 순간 움찔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함께 서 있던 블레인이 물었다.
“왜요? 뭐가 있습니까?”
“아뇨. 잠깐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안 좋은 일이 일어난 듯한 꺼림칙한 느낌.
이유 없이 소름이 돋았지만, 엘레노어는 고개를 휘휘 저어 물리쳤다.
그리고 쟁반을 놓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걱정스레 물었다.
“좀 괜찮나요?”
물음에 누워 있던 에이드리언이 힘없이 눈을 떴다.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소매를 걷고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곧 잘린 손목의 절단면이 드러났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에이드리언은 자산의 끔찍한 상처 부위에 고약을 바르는 엘레노어에게 사과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통증은 괜찮으세요?”
“네. 이젠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베아트릭스가 만든 고약은 효과가 좋았다.
이미 잘린 손을 다시 붙일 수는 없었지만, 절단된 데다 방치돼서 굶기 시작한 상처임에도 금방 통증이 사라지고 아물었다.
엘레노어는 이제 막 소년을 벗어난 나이에 큰 부상을 입고, 기약 없는 긴 시간 지하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에이드리언이 안타까웠다.
“빨리 나가서 편히 치료받아야 할 텐데요.”
엘레노어의 걱정스러운 말에 블레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있으면 제국 기사단에서 나를 찾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과연 이런 곳까지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자작님은 왜 따라오셨어요. 괜히 함께 고생하고 있잖아요.”
“바깥에서 당신의 생사도 모른 채 발만 구르는 게 편할 거 같진 않습니다만.”
“제가 백작님 곁에서 사라지길 바란 거 아니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테라스로 따라와했던 말을 떠올리며 묻자 블레인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야 처음엔 도저히 리안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만…….”
그는 말을 흐리더니 힐긋 엘레노어를 보았다.
그러고는 입속에서 우물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내가 그 녀석보다 여자 보는 눈이 없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는 중입니다.”
“굳이 자괴감 느낄 필요 없어요.
어차피 그 외에도 많이 부족하잖아요.”
“…그걸 위로라고 하는 겁니까?”
“전 객관적인 사람일 뿐이에요.”
다짜고짜 일방적으로 추궁을 받았는데 이 정도는 갚아 줘도 되겠지.
쿡쿡 웃다가 블레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갈색 눈에 조금 쑥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그것을 본 엘레노어가 미간을 푹찌푸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그건 내가 물어볼 질문 아닙니까?”
블레인의 항의에 엘레노어가 새침하게 말했다.
“왜 부끄러워하세요. 반하지 마세요. 요즘 인기 너무 많아서 곤란하니까.”
“지금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전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했죠?”
인기가 지나치게 많아서 곤란하다 못해 지하 감옥에까지 갇힌 마당이니 반박 불가능한 사실이었다.
두 사람의 투닥거림은 에이드리언이 콜록거리는 소리에 끝났다.
“아뇨, 두 분을 보고 웃다가 기침이 나왔을 뿐입니다.”
엘레노어가 황급히 물을 따라 주자 에이드리언이 손을 내저었다.
“이곳에 있다 보니 감각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었는데… 웃으니 좋군요.”
에이드리언은 혼잣말처럼 말하고는 곧 멍하니 시선을 벽으로 가져갔다.
어딘지 아련한 모습에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세요?”
“많지요.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에이드리언은 머쓱한 표정으로 마지막 말을 삼켜 버렸다.
쓱스러운 기색에 엘레노어와 블레인의 눈매가 은근해졌다.
“애인이 있으시군요.”
“아뇨, 아직 전혀 그런 게 아닙니다.”
화들짝 놀라 멀쩡한 한쪽 팔을 저으며 부정하던 에이드리언의 표정은 이내 씁쓸해졌다.
“뭐, 이제 진행될 일도 없을 거고요. 이런 몸이 되었으니까…….”
그렇지 않다고 해 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대는 바이스 후작 영애인가.’
황녀가 그를 납치할 이유가 달리 없다는 것과 비앙카스타의 반응을 보면 둘이 아마 서로 좋아하는 사이거나 그 비슷한 것일 터였다.
비앙카스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입에 발린 희망을 줄 수는 없었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엘레노어는 무심코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황급히 올렸다.
에이드리언은 그녀가 잘린 팔 부근을 본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운이 나쁘게도 하필 에이드리언의 얼굴은 엘레노어 쪽을 향한 상태였다.
“조금 피로하군요. 한숨 자도 괜찮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에이드리언의 요청에 엘레노어와 블레인은 다소 황망하게 일어섰다.
“아프거나 불편하면 바로 바깥에 있을 테니 언제든 말해 주세요.”
말을 남긴 뒤 두 사람은 철창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꺾어 넓은 홀로 나오자 블레인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오니까 살 것 같군요.”
상황이 안정되고 나서 둘러본 지하감옥은 침침하긴 해도 생각보다 쾌적했다.
벽마다 불을 피울 수 있도록 등불이 걸려 있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방이나 화장실도 있었다.
물론 깨끗하지도 않고 푹신한 침대 같은 것도 없었지만, 침상 정도는 있어 어느 정도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철창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베아트릭스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베아트릭스에게 말해서 철창 안을 좀 더 보완할 수 있을까요?”
블레인이 엘레노어에게 물었다.
사실 지금 누리는 약간의 혜택은 모두 엘레노어가 베아트릭스와 협상한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다.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방 주변을 제외한 곳은 자유롭게 이용하게 해 주었으며 엘레노어와 정해진 시간에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인인 남자들이나 원래 열악한 생활을 견디다 상경한 엘레노어에게는 지하 생활이 그리 고되진 않았다.
“말은 해 보겠지만, 어쨌든 저분을 계속 저대로 놔둘 순 없어요. 진지하게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 말에는 서로 동의하는 바였으나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벽을 파고 나갈 수는 없으려나.”
“불가능할 겁니다.”
블레인의 중얼거림에 답한 것은 엘레노어가 아니었다.
일라이가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그늘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벽의 두께를 전체적으로 조사해 봤는데 지상까지는 무척 멉니다. 몇 년이 걸려도 맨손으로 여기 있는 사람들이 파내기는 무리일 겁니다.”
처음 들어올 때도 계단을 한참 내려왔으니 손으로 파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블레인이 다시 말했다.
“여기서 문 옆을 파서 복도로 나갈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는 일라이도 부정하지 않았다.
문이 두껍긴 하지만 여기엔 쇠붙이가 많았으므로 힘이 센 기사들 몇 명이 붙어서 파내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도 실행되지는 못했다.
“판다고 해도 여기서 나갈 수는 없어요.”
엘레노어의 말에 블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는 게 있거든요.”
“경비병 말입니까? 그런 건 나와 비하인드 나이츠가 어떻게든…….”
“아뇨. 그건 무리일 거예요.”
확신에 찬 말투로 딱 자르자 일라 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레노어는 그가 불만스러운 말을 뱉기 전에 빠르게 덧붙였다.
“바깥을 지키고 있는 건 마수예요.
특별한 준비가 되지 않으면 손도 대지 못할 거예요.”
“마수가 있다고요?”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들이 마수에 대해 물어볼 것을 예상했으나 전혀 다른 질문이 날아왔다.
“당신은 대체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겁니까?”
블레인은 마수보다 엘레노어에게 놀란 표정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한 사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 수상해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설명할 수도 없는 문제라 난처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엘레노어는 곤란한 질문을 본의 아니게 피할 수 있었다.
“읍.”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엘레노어는 입가를 짚었다.
“왜 그래요?”
“속이… 웁!”
엘레노어는 말을 하다말고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녀가 속을 비워 내고 나오자 블레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괜찮습니까?”
“아, 네. 뭔가를 잘못 먹었나 봐요.”
“오늘 내내 딱히 못 먹지 않았습니까?”
황녀가 베아트릭스를 신경 쓰는 듯 제공되는 음식은 썩 나쁘지 않았지만, 엘레노어는 거의 손도 못 대는 중이었다.
공기 탓인지 속이 좋지 않아서 자꾸 구역질이 치밀었다.
배도 묘하게 쿡쿡 찌르듯 아픈 것 같았다.
“정말 걱정이군요. 당신도 계속 여기 있다가는 큰일 나겠습니다.”
블레인은 아까 몰아붙이던 것도 잊은 듯 염려만 가득했다.
괜찮다고 말해 주려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역시 귀하게 자라신 귀족 처녀께서는 얼마 버티지 못하는군.”
베아트릭스가 킬킬거리며 비꼬는 목소리였다.
엘레노어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태엽 시계를 확인한 뒤 몸을 일으켰다.
“대화 시간이네요. 다녀올게요.”
그녀는 정해진 시간마다 베아트릭스와 이야기를 나눠야만 했다.
블레인은 우려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베아트릭스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으므로 만류하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구불구불한 홀을 지나 베아트릭스의 방으로 향했다.
커튼 너머로 들어가자 베아트릭스가 대뜸 말을 던졌다.
“별걸 다 알고 있더군.”
베아트릭스의 목소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하 감옥 내 어디서나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모두의 대화도 곁에서 들은 것처럼 전부 훤하게 꿰고 있었다.
“마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지?”
“당신에게 말한 모든 걸 알아낸 것과 같은 방법으로요.”
베아트릭스가 잔뜩 주름진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또 이렇게 제대로 된 대답은 하나도 안 하고 말장난만 할 건가?”
“이유 없이 그러는 건 아니에요.
어차피 당신이 모든 걸 알아도 마수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잖아요.”
엘레노어의 말에 베아트릭스가 입가를 오므리며 툴툴거렸다.
반박하지 못하는 거 보니 그녀 역시 마수를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탈출을 시도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럼 없겠나?”
베아트릭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말대로 이 밖으로 나가면 시커먼 마수가 튀어나와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갈갈이 찢어 죽이려고 하지.
섣불리 나갔다가 이 몸조차 다시 돌아오는데 애먹었다고.”
분명 지하 감옥의 철문 밖은 그냥 통로일 뿐이다.
그러나 문에 주술이 걸려 있어 황가에서 허가의 인장을 받지 못한 이가 문을 열려고 할 때는 다른 곳으로 통했다.
암흑 속에 새카만 마수가 이를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홀.
그것이 바로 이 허술한 지하 감옥을 무결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대체 그 마수는 뭐야? 넌 그걸 돌파하는 방법을 알고 있나?”
베아트릭스의 질문에 엘레노어의 눈이 빛났다.
“알고 싶으면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줘요.”
상대에게 질문하려면 이쪽도 하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그것이 대화의 규칙이었다.
물론 질문에 답하기 싫으면 묻는 걸 포기함으로써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중요한 정보를 서로 아끼고 있었으므로 둘의 대화는 대부분 헛돌았다.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이 얻어 내야만 했다.
엘레노어는 그간 베아트릭스에게 꼭 대답을 듣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칼라브리아 백작님께 걸린 종속의 각인을 해제할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