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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63화 (63/120)

제63화

“공작님께서 이렇게 제국에 오래 계시니 참 좋군요.”

황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스카이에게 말했다.

곁에 앉아 있던 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정말입니다. 공국 일이 바쁘시겠지만, 이렇게 팰리시티에도 자주 들러 주세요.”

“진심 어린 환영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스카이가 미소 짓자 주변을 둘러싼여인들의 뺨이 샴페인에 취한 것처럼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모두 공작님을 좋아하니까 환영하는 거예요. 자주 오셔서 아일린의 곁에 머물러 주세요.”

“황녀 전하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라도 달려오겠습니다.”

그의 말에 황녀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별궁에서 황녀, 그리고 그녀가 부른 제국 귀족들과 저녁 만찬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런 자리는 질색이었으나 기꺼이 참석해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황녀의 체면을 한껏 살려 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끝날 무렵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우아한 태도로 자리를 벗어나 복도로 나온 스카이는 곧장 홀 옆의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제니트가 테라스 구석에 서 있다가 다가왔다.

“손에 넣었나?”

제니트가 품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 스카이에게 건넸다.

“양피지?”

“아주 오래된 자료뿐이었습니다.

구하자마자 우선 곧장 가져왔기 때문에……….”

제니트가 변명조로 말하는 사이 스카이는 양피지를 쭉 펼쳤다.

그가 구해오라 명한 것은 황궁 지하 비밀 통로의 구조도.

당연히 제국 극비 사항이었으므로 구하는 게 불가능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황녀가 그를 통해 지하의 기사들에게 종속의 서약을 남발하는 바람에 구멍이 생겼다.

“꽤 복잡하군.”

커다란 양피지가 무척 복잡한 구조의 지도로 빽빽이 메워져 있었다.

스카이는 그것을 한번 쭉 훑는 것 애초에 이런 만찬은 그저 황녀에게 제국의 향응에 매력을 느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열고 있을 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는군.’

스카이는 속으로 웃으며 황녀를 바라보았다.

순진한 얼굴에 가려진 상반된 인격.

그는 그런 사람이 싫지 않았으므로 해맑은 소녀라고 생각했을 때보다 오히려 그녀에게 관심이 생겼다.

엘레노어와 관련한 문제에서 모두가 황가와 공공연히 맞섰지만, 스카이는 다른 대응 방법을 떠올렸다.

‘대적하기에 너무 강대한 상대라면 내부로 침투해서 맞서는 게 정답이지.’

그가 지금까지 은근슬쩍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엘레노어를 공개적으로 품었지만, 원래부터 한량이라는 이미지를 쌓아 두었기에 그냥 화제의 인물과 놀아난 정도의 인상만 주고 넘길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한발 물러서서 관망하는 척했다. 대 회합에서도 별다른 입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의 계획은 성공해 현재 황녀에게서 신임을 얻고 있었다.

‘이제 모든 건 시간문제로군.”

사실 스카이가 황녀에게 접근하기로 한 것은 그녀의 뒤에 누군가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곁에서 살핀 결과 황녀가 사악한 주술을 걸고 다니는 것을 황제는 전

‘섣불리 접근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녀 베아트릭스.

정확한 건 몰라도 황가에서 지하에 가두었을 정도면 무척 위험한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대비할 수 있었다.

스카이가 알아낸 허점은 그녀와 황녀의 사이가 편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황녀는 그녀가 부탁을 순순히 들어 주지 않고 까다롭게 군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다고 종속의 서약을 아무에게나 맡기면 곤란하지.’

종속의 서약을 알게 된 황녀는 자신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인형들을 잔뜩 원했다.

그걸 스카이는 베아트릭스 대신 자신에게 부탁하도록 슬며시 부추겼다.

‘그런 걸 공짜로 해 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종속의 서약은 시술자에게 반작용이 큰 부담스러운 주술.

그런 것을 하겠다고 나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황녀가 바라는 대로 기사들에게 종속의 서약을 걸었지만, 서약자가 복종해야 할 대상을 모두 ‘스카이 페이드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분간 황녀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황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이 자신에게 종속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철저히 믿고 있는 기사들은 이제 철저히 그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이제 엘레노어를 구할 수 있어..’

엘레노어 마리체는 정말로 위험을 무릅쓸 보람이 있는 여자였다.

대담하게 사지로 자진해서 가는가 싶더니 속내가 있을 줄이야.

그녀가 지하 감옥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정말 놀랐다.

‘더 감추고 있는 게 뭘지 정말 궁금하군.

그녀를 잃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구해야만 했다.

일이 잘 풀리고 있다 해도 여유를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꼬리를 밟히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또 감정 기복이 심한 황녀가 언제 기분이 바뀌어 엘레노어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다소 급하지만, 일을 서두르기로 했다.

‘오늘 밤이다.’

이미 엘레노어를 데리고 나와 숨겨 둘 장소는 수배해 두었다.

황녀는 엘레노어를 잡아 가두는 데 성공해 다소 방심 중이었고, 황제의 모든 신경은 귀환 중인 리안과 공작들이 마주치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내부의 감시가 허술한 이 틈을 타야만 했다.

어쨌든 리안이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만 했으니까.

“이렇게 웃어 본 건 오랜만이네요.

가까운 사람들과 한담을 나누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 거 같아요.”

황녀는 스카이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듯 즐거워 보였다.

‘가까운 사람’으로 칭해진 이들의 표정도 무척 밝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분명 연회는 날이 샐 때까지 흥청망청 이어질 것이다.

그게 스카이도 차라리 나았다.

이미 도면을 구했고, 감시인들은 모두 그에게 종속된 상태였으므로 시간이 걸릴 게 없었다.

연회 중 잠시 자리를 떠서 빠르게 엘레노어를 구해 내보낸 뒤 태연하게 연회에 참석하면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황녀는 결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실크처럼 목 넘김이 부드러운 페이드라의 샴페인입니다. 잔에 따르면 보석의 파편이 떠 있는 것 같아 ‘엘 주얼’이라 부르죠.”

스카이가 황금빛의 아름다운 샴페인을 따라 나눠 주자 열기는 더욱 강해졌다.

“아, 정말 빛깔이 너무 아름다워요.”

기뻐하는 황녀에게 샴페인을 몇 잔씩 연거푸 권한 뒤 스카이는 또 뭔가를 준비하는 척 홀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테라스로 나와 거추장스러운 제국의 연회복을 벗고 운신하기 편한 새카만 복장으로 변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바로 진입한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제니트와 심복세 명을 이끌고 스카이는 곧장 미로 정원으로 달렸다.

지하 통로의 입구는 여기저기 있었기에 위치만 알면 어디서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며칠간 종속된 기사들을 통해 지하의 감시인들이 어떤 순서로 교대하는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이동한 그들은 돌벽 담쟁이 아래에 숨겨진 입구를 찾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곰팡이 냄새가 나는 축축한 계단을 내려가 그들은 거침없이 불빛도 흐릿한 지하를 달렸다.

도면대로 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는 지하 감옥의 입구를 발견했다.

“정확히 기사들이 묘사한 그대로군.”

스카이가 중얼거리자 제니트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을 열면 음산하고 널찍한 지하 감옥이 있고, 그 안에 기나긴 삶을 살아온 마녀와 엘레노어가 있을 터였다.

“기사를 불러.”

스카이의 명령에 제니트가 일정한 리듬으로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말 대신 정해 둔 신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발소리가 울리더니 종속된 기사 하나가 나타났다.

“문을 열어.”

기사는 어쩐지 무척 꺼림칙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무척 문을 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직 황녀에게 충성심이 남아 있는 건가?’

이상한 일이었다.

깊은 수련 끝에 언제든 평정을 잃지 않는 그가 반응을 보인 것이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스카이는 즉시 문으로 다가가 안을 보았다.

곧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거대한, 너무나도 거대한 눈동자가 있었다.

그 심연과도 같은 새카만 괴물에 마주친 스카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계산 미스로군.”

스카이의 얼굴이 드물게 창백히 물들었다.

*

일라이와 함께 비하인드 나이츠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헤르혼은 지평선 끝에서 나타난 하얀 점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마치 섬광처럼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그가 지난 몇 년 간 수도 없이 바라봐서 익숙한 것이었다.

‘어째서 혼자 오고 계시는 거지?’

귀에 익은 발굽의 울림과 특유의 승마술.

제국 기사단과 함께 있어야 할 리안임이 분명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마주쳐서 다행이었다.

넓은 제국을 이동할 때 이용할 경로까지 세세하게 지정해 둔 비하인 드 나이츠의 지침 덕에 엇갈리지 않은 것이다.

“전원 정지. 단장님과 합류한다.”

헤르혼의 짧은 명령에 비하인드 나이츠는 일사분란하게 멈춰 섰다.

그리고 그들이 대열을 채 정비하기도 전에 하얀 섬광이 앞에 멈춰 섰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리안이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내리며 물었다.

얼마나 밤낮없이 달려왔는지 온통 흙먼지투성이였지만, 섬세한 윤곽의 얼굴과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는 여전히 유려했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리안은 보고를 재촉하듯 턱 끝을 치켜들었다.

“마리체 남작 부인이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순간 리안의 보라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지하 감옥이라니? 누구의?”

“황궁 지하 통로에 있는 감옥입니다.”

리안은 제국의 보안을 책임지는 기사단장이었으므로 당연히 황궁 지하통로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의 대리석 같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곁을 지키라고 했을 텐데.”

리안이 드물게 격한 어조로 질책했다.

헤르혼은 고개를 조아리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백작님께서 떠났을 때 그녀는 호위를 받아들이는 대신 단 한 가지 명령에 따라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게 뭐지?”

“고립된 상태로 몰살당할 우려가 있을 땐 최소한의 병력을 놔두고 전 원이 떠나 백작님께 최대한 빨리 알릴 것입니다.”

리안이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무척 화가 났지만, 인장을 쥔 이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 나무라지 못하는 듯했다.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그에게 헤르혼이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뭐지?”

“남작 부인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엘레노어에게서 온 것이란 말에 리안은 곧장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한달음에 읽은 뒤 모두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장 수도로 복귀한다.”

말고삐를 쥐는 리안에게 헤르혼이 확인하듯 물었다.

“목적지는 백작 저입니까?”

리안은 잠시 텀을 둔 뒤 나직이 대답했다.

“전원 황궁으로 간다.”

비하인드 나이츠는 이번 원정과 상관없었으므로 황궁에 진입할 권리가 없었다.

리안의 속뜻을 깨달은 헤르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레노어를 구출한다.”

헤르혼은 험상궂은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리안 칼라브리아는 비하인드 나이 츠의 혼.

그들은 모두 리안이 죽음을 명하더라도 따르기로 결심한 이들뿐이었다.

한적한 제국의 대로에 세계 최강기사단의 발굽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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