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부인, 차라도 드시며 기분을 푸시지요.”
크레니아가 플로이드 공작 부인 앞에 다과상을 내려놓았다.
오전의 티타임은 공작 부인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예외인 듯했다.
아무 말 없이 표정이 어두운 공작부인을 보고도 크레니아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서운하실 수도 있지만, 골치 아픈 일이 사라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엘레노어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던 크레니아는
“슬슬 북방으로 돌아가심이 어떠십니까? 이번에는 저도 따라가 심란하신 공작 부인을 곁에서 보좌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여자에게 보좌직을 빼앗길 뻔했더니 위기감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녀는 모두가 선망하는 팰리시티생활을 청산하고 황량한 북방까지 따라갈 정도로 대단한 충성심을 뽐내고 싶었다.
그러나 공작 부인은 그런 크레니아의 비장한 각오에 일언반구도 없이 화제를 돌렸다.
“방문객을 맞이해야겠다. 교섭을 위해 황실 근위대 녀석을 하나 불러 오게.”
명령을 들은 크레니아가 의무감에 찬 얼굴로 조심스럽게 고했다.
“현재 공작 부인께서는 황제 폐하의 칙명으로 연금 상태입니다. 외부 인의 방문은 엄격히 제한되고 있습니다만.”
“외부인을 만나려는 게 아니야.”
공작 부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남편을 만나겠다.”
그러자 불만스럽던 크레니아의 얼굴이 확 펴졌다.
두 공작이 사이를 회복하는 건 그녀의 오랜 염원이었다.
“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크레니아가 방을 떠나고 나서야 공작 부인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찻잔을 들었다.
그렇게 한 모금 들이켰을 때쯤 또다른 방문객이 그녀의 거실을 찾았다.
“공작 부인.”
들어선 이는 미나즈와 클로드였다.
“무슨 일입니까?”
“매가 필요합니다. 지금 부르실 수 있으십니까?”
미나즈가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근처에 있을 테니 부를 수는 있네만.”
공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클로 드는 미심쩍은 얼굴로 창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뿐 매는커녕 참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깥에 연락을 취하는데 쓰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미나즈의 대답에 공작 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이렇게 종일 고심하면서 매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유감이지만, 불가능하네.”
“어째서지요? 북방에서는 악천후에도 매를 통해 교신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정해진 장소로 날아가게 하는 건가능하지만, 이동 중인 사람에게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네. 자주 다니던 구역이라면 그 안에서 찾아내게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리안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 매가 찾는 것보다 먼저 수도로 도착할 거야.”
공작 부인의 말에 미나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정해진 곳으로 날아가게 할 테니까요.”
“정해진 곳으로? 어디를 말하는 건가?”
미나즈는 대체 언제 준비해 둔 건지 품에서 두툼한 편지 봉투를 하나 꺼냈다.
“아서 보르미아 공작에게 이 편지를 보내 주십시오.”
공작 부인은 봉투를 받아들고 좀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대답했다.
“맡겨 두게.”
“잘 부탁합니다.
미나즈와 클로드는 거실을 떠났다.
복도로 나오자 공작 부인이 매를 부르는 휘파람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그걸 잠시 듣고 있던 클로드가 물었다.
“확률이 낮아도 일단 모든 수단을 동원해 칼라브리아 백작에게 연락을 시도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우리가 시도하지 않아도 닿을 거라니까.”
왜 그렇게 확신하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클로드에게 미나즈가 불쑥 물었다.
“생각해 봐. 엘레노어 마리체는 죽었을까?”
노골적 물음에 클로드가 조금 멈칫하더니 다소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보는 게 타당하겠지요.”
“그래. 그리고 그녀가 떠나고 나서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에 황제의 압박이 더 강해졌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클로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엘레노어가 사라져서 압박이 약해질 이유는 있어도 강해질 이유는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미나즈가 슬쩍 힌트를 주었다.
“엘레노어 마리체는 이곳에 혼자 있던 게 아니잖아.”
“그녀를 지키던 비하인드 나이츠가 떠났기 때문에?”
“그래, 그거야. 공작령 밖에서 대치하던 그들이 사라져서 더 강하게 나올 수 있는 거라고.”
그제야 클로드도 미나즈가 그리는 그림이 보인 듯했다.
“그들 중 일부라도 리안에게 합류해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할 거야. 매나 심복보다 더 믿음직스럽지 않겠어?”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최고의 기사는 최고의 추적자인 법이니 합류에 실패할 일은 없다.
이렇게 되면 황제의 방해에도 리안에게 연락이 닿지 못할 가능성은 사라진 셈이었다.
그러나 클로드는 이제 다른 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칼라브리아 백작이 보고를 받고 대체 어떻게 행동할는지.’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라 불안했다.
이 부분은 생각해도 소용없었으므로 클로드는 미나즈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편지의 내용은 뭐였습니까?”
“우리가 황녀로부터 에이드리언 유니스의 손목을 받았다는 이야기.”
“그게 굳이 매를 빌려 가면서 보르미아 공작님에게 알려야 할 소식입니까?”
“바보야. 에이드리언 유니스는 남부 귀족이잖아.”
미나즈는 당연한 것도 모르냐는 듯 핀잔을 주었다.
분명 보르미아 공작이 남부를 총괄하고 있지만, 제국은 다섯 개로 쪼개도 보통 국가보다 훨씬 넓었다.
당연히 남부에 소속된 귀족만 해도 수천 명을 훨씬 상회했다.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인가?’
이제 막 공작이 돼서 인맥도 경험도 부족한 클로드는 그런 쪽 상식이 부족했다.
그러나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나즈에게 묻느니 인명록을 뒤적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했지. 비보를 전하는 것보다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겠다.
고.”
그가 잠잠히 있자 미나즈가 눈을 빛냈다.
“생각대로 되면 황제는 상당히 골치가 아파질 거야.”
보통 이런 말을 할 때는 회심의미소를 짓는 미나즈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클로드는 아무래도 엘레노어가 마음에 걸리나 보다고 생각했다.
“뭐 하는 거야?”
어깨를 두드리자 미나즈가 인상을 팍 구겼다.
“키 좀 컸다고 어른 된 척하지 마라.”
툭 자르고 휙 가 버리는 그녀를 보고 클로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
미나즈가 죽은 사람을 그리듯 하늘을 바라보며 엘레노어를 회상하고 있을 즈음, 엘레노어 마리체는 살아있었다.
심지어 침울하거나 의기소침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륙 역사에 이름을 남긴 흉악한 마녀와 마주 앉아 협상 중이었다.
“할 수 있는 거 다 알아요. 빨리 치료해 줘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야 당신이 잘랐으니까요.”
커튼 너머 어두운 곳에서 들려오는 베아트릭스의 목소리는 어지간히 담이 센 사람들이라도 주눅이 들 정도로 음산했으나 엘레노어는 당당하게 받아쳤다.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무서워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배짱이 생겼기 때문이다.
“문을 열어 준다면 말한다고 했을 텐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베아트릭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엘레노어의 뒤에는 철창과 안에 누워 있는 에이드리언, 그리고 그를 돌보는 블레인이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문을 열어 주긴 했으나 에이드리언은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는지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았다.
“상처를 치료해 주면 말해 줄게요.”
“뻔한 수작을 부리는군.”
엘레노어가 조건을 확 올리자 베아트릭스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
“이런 식으로 계속 요구하겠지만 이제 됐다. 뭐 어디 책에서라도 본 거겠지. 관심 없어.”
그건 맞는 추측이었다.
물론 베아트릭스가 생각하는 책은 절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녀가 그대로 등을 돌리면 곤란했다.
그러나 연애의 여왕으로서 밀고 당기기에 능한 엘레노어는 어장에 걸린 물고기를 놓치지 않았다.
“당신은 제국 변방의 포모아 출신이죠? 세 자매 중에 막내로 태어났고요.”
순간 공기가 확 변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베아트릭스의 목소리가 어둡게 깔렸다.
제국의 어느 책에도 나와 있지 않고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모두 예전에 죽었을 테니까.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다.
“밀라트릭스라는 언니가 있지요.”
그 말을 하자마자 어두운 커튼 틈에서 마른 가지처럼 앙상한 손이 쑥뻗어 나왔다.
그것은 저항할 새도 없이 엘레노어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좀 떨어져 있었다고 해도 비하인드나이츠가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였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말하지 않으면 당장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베아트릭스가 엘레노어를 벽에 누르고 한 손으로 목을 누르며 으르렁거렸다.
늙어 바스러질 듯한 손인데 아귀힘이 대단했다. 정말 쉽게 목이 비틀어질지도 몰랐다.
강한 힘에 헐떡이며 엘레노어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나를… 죽이면, 당신은, 후, 마지막으로 당신을 아는 사람을 잃게 될… 걸요.”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는 거지? 어디서 주워 삼긴 구전을 지껄인다고 해서……….”
“미, 밀라트릭스는… 아직 살아 있어요.”
그 말에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러나 가뜩이나 찌르는 것 같던 살기가 이제는 놀랍게도 시각적으로 형상화되었다.
베아트릭스에게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밀라트릭스가 살아… 있다고?”
“당신도 느낄 텐데요.”
엘레노어는 쿨럭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베아트릭스가 힘을 봉인 당하며 황가에 잡힌 것은 혈육인 밀라트릭스의 피를 이용한 주술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방법으로 힘 대부분을 잃었으나 그러고도 너무나 강해서 밀라트릭스의 몸을 숙주로 저주를 걸어서 붙잡은 것이다.
밀라트릭스는 숙주로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살아 있었으나 소설 내의 사건으로 인해 사망해 버리고 결국 지하에 갇혀 있던 베아트릭스에게 힘이 돌아가 풀려나게 된다.
금단의 주술을 사용했기에 역사서에도 적힌 적도 없는 이야기.
사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었다.
면 그 누구도 몰랐을 뒷사정이었다.
“알고 있잖아요? 그녀가 죽었다면 당신의 힘이 전부 돌아왔어야 한다는 거.”
베아트릭스가 아주 목을 놓아 버리는 바람에 엘레노어는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네가 아는 것은… 어디까지지?”
“아마 당신이 알고 싶은 건 거의 알 거예요.”
잠깐 목을 잡힌 것만으로 목이 이미 쉬어 버렸다.
엘레노어는 고개를 들어 베아트릭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주고, 내가 여기서 나가게 도와줘요.”
주름진 베아트릭스의 투명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그러면 내가 밀라트릭스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줄게요.”
엘레노어는 입꼬리를 올렸다.
*
아서 보르미아 공작은 손가락에 끼운 인장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앞의 거대한 책상 위에는 수많은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여러 장의 서류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그 가공할 업무 능력은 아직 여전했다.
유능하긴 하지만, 많은 이와 분담후 주요 현안만 처리하는 미나즈, 클로드와 다르게 노 공작은 여전히 제국의 행정의 최종 결정권자이면서도 일선에서 활발하게 일하고 있었다.
그는 수십 년째 이어진 제국 행정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런 그의 앞에는 드물게 한 장의 서류만이 펼쳐져 있었다.
“보르미아 공작 전하. 부르셨습니까.”
수하가 들어와 보르미아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평소라면 기나긴 업무지시와 검토할 서류 더미를 넘겨줄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 보르미아의 공작은 단지 한 장의 종이를 넘겼을 뿐이었다.
“이 안의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모든 행정 승인을 멈추게.”
늘 고요하고 인자한 보르미아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