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제국 기사단의 부관 미셸은 행렬의 후위에서 전위로 말을 달렸다.
그는 전체의 상태를 살피고 오는 차였다.
평소에도 최장 제국의 최정예라는 칭호에 걸맞게 단련하고 있었으나 현재 리안의 다소 무리한 행군으로 인해 모두 지친 상태였다.
그건 각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여서 피로한 기색이 만연했다.
‘귀환을 이렇게 서두를 이유는 없을 텐데.’
결과가 나쁜 원정도 아니었으므로 조금 속도를 늦춰 달라고 청할 예정이었다.
리안은 언제나처럼 선두에서 모두를 이끌며 달리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의 시선이 정면이 아닌 하늘에 못 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워낙 승마술이 좋아 앞을 보지 않고도 달리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미셸은 좀 걱정스러웠다.
엘레노어 마리체라 주장하는 여인 이 왔다 간 후로 리안은 내내 멍했기 때문이다.
미셸은 말을 달려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단장님.”
리안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향한 곳을 보았으나 평범한 하늘일 뿐이었다.
“뭘 살피고 계신 겁니까?”
그의 질문에 리안이 혼잣말처럼 답했다.
“데네브가 떠 있군.”
“네?”
데네브는 1년 중 하루만 뜨는 별.
오늘 보일 이유가 없었다.
놀라서 급히 하늘을 보았으나 찬연히 빛나는 데네브는 보이지 않았다.
“제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색이 붉어.”
그런데 리안은 한술 더 떴다.
연일 이어지는 강행군 때문에 헛것이 보이는 걸까?
당황하고 있는데 리안이 또다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어.”
그건 이쪽이 할 말이었다.
“기사단의 복귀를 맡기겠다. 지금의 속도를 유지하며 수도로 복귀하도록.”
“네? 단장님께서는 어디 가십니까?”
“용무가 있어 먼저 복귀하겠다.”
이미 최대 속도로 행군 중인데 먼저 복귀하다니.
그러나 반문할 새도 없이 리안은 그대로 휙 달려 나가 버렸다.
‘속도를 누르고 있던 거였나.’
미셸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멀어지는 리안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
황녀는 단단한 스툴 위에 선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황궁으로 재단사를 불러 새 옷을 맞추고 있었다.
오늘은 한동안 중지됐던 다과회도 베풀 생각이었다.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어..’
건방진 계집도 잡아넣었고
‘기억하기도 전부터 서약으로 묶였다니. 그야말로 운명이잖아.’
황녀는 무척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서약의 존재는 최근 알게 된 것 중 가장 유용했다.
‘이제 쓸모없는 부하 때문에 고생할 일도 없겠지.’
그런 게 있다는 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비앙카스타에게도 종속의 서약을 걸었을 것이다.
편리함을 깨달았으므로 황녀는 베아트릭스를 시켜 종속의 서약을 여기저기에 걸었다.
우선 지하의 기사들로 시작해서 시녀, 그리고 이용 중인 귀족들까지.
‘왜 폐하께서는 이렇게 편리한 걸 금지하고 계시는 거야.’
어차피 충성을 맹세할 거라면 종속의 서약을 하면 되는 게 아닌가.
황녀는 자신이 황위를 잇게 되면 전면적으로 허용할 거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통치도 탄탄대로일 것이다.
“드레스 잘 부탁해요, 볼로냐 후작부인.”
재단을 마친 황녀는 로사그란데를 나섰다.
그녀는 새로 생긴 충성스러운 심복을 만나러 갈 참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도 선선했다.
지나는 길에 마주친 화풀이로 초토화됐던 장미 정원은 다시 원래대로 아름답게 돌아와 있었다.
향긋한 장미향을 만끽하며 걸어 황녀가 도착한 곳은 별궁이었다.
그녀는 가장 중앙에 있는 커다란 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그녀가 만나러 온 인물은 정원 앞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페이드라 공작님.”
햇빛을 받으며 기다란 안락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스카이가 고개를 들었다.
“제 선물을 무사히 전해 주셔서 고맙다고 전하러 왔어요.”
“별말씀을.”
스카이는 매력적으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대로 편하게 계셔도 돼요. 감사하러 온 거니까요.”
황녀는 발랄하게 웃으며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은 모두 잘 풀렸습니까?”
“네. 어느 정도는.”
황녀는 입술을 귀엽게 비죽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중에 비하인드 나이츠가 나타나는 바람에 큰일 날 뻔했지만요.”
“이런, 괜찮으십니까?”
스카이가 유감스러운 얼굴을 짓더니 사과했다.
“그들이 있을 가능성을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제 불찰입니다.”
“그들이 주변에 있다는 거 알고 계셨어요.”
“가능성은 있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최정예가 아니면 지하까지 추적이 불가능하고 엘레노어 마리체에게 직접 손대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엘레노어를 해치려 했을 때 나타났기에 황녀는 뜨끔했다.
“뭐 어쨌든 그들은 지금 지하 감옥에 무사히 갇혀 있어요. 절대 탈출하지 못할 테니 우선은 이거로 해결이죠.”
“모든 게 바랐던 대로 이루어졌으니 잘됐습니다.”
“모두 공작님 덕이지요.”
황녀는 꾸민 듯한 태도로 감사를 표했다.
공작 부인의 연회.
스카이 페이드라가 페이드라 대공을 핑계 대며 불러냈을 때에는 비앙카스타를 보호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제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믿지 않고 지나치려 했으나 스카이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황녀가 연회의 선물에 섞어둔 에이드리언의 손목이었다.
엘레노어를 협박하고 분위기를 망치려고 다른 사람을 시켜 놓아둔 것이다.
황녀는 자신과 상관없는 상자라고 모른 척 잡아뗐다.
‘익명으로 낭비하긴 아까운 선물이군요. 이걸 이용해 엘레노어 마리체를 당신에게 데려다 드리죠.’
당시에는 그냥 돌아섰으나 황제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스카이가 다시 찾아와서 제안했다.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그는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성공시켰다.
‘그 여자를 바로 죽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말이야.’
엘레노어 마리체를 살려서 지하에 가두라는 스카이의 조언은 무척 거슬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가 사라졌다는 말이 나돌면 황녀 전하를 깎아내리는 무리들이 득세할 겁니다. 그들에게 황녀 전하가 결백하다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엘레노어를 설령 정말 죽이지 않았다고 한들 누가 믿을까.
이미 몇 번이고 부딪친 데다가 공작 부인의 파티에서 적개심을 살짝 내비치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스카이는 너무나도 쉽게 해법을 내어놓았다.
‘진실의 서약’자신이 한 말이 진실임을 맹세하고 거는 주술.
주술 중 가장 간단하지만, 신뢰성이 높아 널리 쓰이는 서약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주술을 걸고 ‘엘레노어 마리체를 죽이지 않았다고 선 언하면 되는 것이다.
진실로 판명 나면 미심쩍어 하는 사람들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받는 순수하고 천사 같은 자신의 이미지를 지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칼라브리아 백작도 당신의 결백을 알면 마음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황녀를 가장 흔들리게 한 말이었다.
종속의 서약은 편리하지만, 활성화하고 나면 영혼도 감정도 없이 무미해지는 데다 눈이 멍해져 아는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여전히 활성화하지 않고 사랑에 빠지게 하고 싶다는 희망은 버릴 수 없었다.
리안은 고분고분한 것보다 냉정한 지금이 멋지니까.
“엘레노어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은 잊지 마십시오.”
스카이가 다시 강조하자 황녀의 미간이 조금 움찔했다.
“네. 물론이죠. 저도 사람을 해치고 싶지는 않은걸요.”
뭐 해치지 않아도 지하 감옥에 가둬 두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옥사해도 직접 죽인 게 아니니 진실의 서약에는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황녀는 곧 베아트릭스를 시켜 엘레노어의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릴 작정이었다.
‘기억을 지우면 퇴행이 일어나서 백치처럼 된다고 하지.’
그러면 그 건방진 눈빛은 싹 사라져 버리겠지.
쓸데없는 말도 못 하고 고분고분해 지면 페이드라 공작에게 하사할까.
어차피 그 예쁘장한 얼굴 외엔 아무것도 없는 여자니까.
황녀는 일방적으로 결론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공작님의 말을 따를 테니 언제든 조언해 주세요.”
“황송한 말씀이군요. 영광입니다.”
씩 웃는 스카이의 얼굴은 매력적이었다.
고고한 태도도 좋지만, 이렇게 능글맞고 다정한 태도도 싫지는 않았다.
쓸모없는 녀석들과 달리 통찰력도 훌륭해서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되는 점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는 뛰어난 주술사인 데다 베아트릭스와 다르게 품위도 있었다.
‘이용 가치가 있으면 제국으로 불러 곁에 둬야지.’
인생의 사랑은 오직 리안 뿐이지만, 스카이도 함께 있으면 나쁘진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아일린을 잘 부탁드려요.”
두 남자와 함께 보내는 일상을 그리며 황녀는 미소 지었다.
*
“어떻게 됐지?”
집무실에 앉아 있던 미나즈는 들어서는 수하에게 기다렸다는 듯 질문했다.
“봉화를 올릴 수 있는 곳까지 막아두었습니다. 성채에 깃발을 올릴 수도 없고 종탑까지 사용하지 말라는 압력이 들어왔습니다.”
“제길. 아예 감금하는군!”
미나즈는 분통을 터뜨린 뒤 부하를 내보냈다.
함께 앉아 있던 클로드가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남작 부인을 보냈는데 오히려 연금 상태가 더 심해졌군요.”
“그래. 공작령에 이런 간섭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법적으로 황제는 ‘권고’할 수 있습니다.”
말이 권고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항명은 곧 전쟁뿐이니까.
외교 및 사법, 그리고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부까지 제국의 실권에 있어서는 단단히 휘어잡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전쟁으로 황제에게 맞서기엔 무력했다.
사병이나 기사단 규모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가 동원할 수 있는 상비군은 제국을 제외한 다섯 개 국가와 싸워도 우위에 있다고 할 정도로 막강했다.
재력이나 인맥 등을 이용해서 용병이나 외국군을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황제의 실정이 명확치 않은 지금 상황에서 힘 싸움 때문에 외세를 침투시키는 건 매국.
게다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힘의 균형이 맞진 않을 것이다.
“칼라브리아 공작은 황제의 편에 서겠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칼라브리아 공작과 황제가 결합하면 사실상 무력으로는 무적에 가깝다.
거기에 균열을 내고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오직 하나뿐일 것이다.
“칼라브리아 백작은 우리가 연금되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할 겁니다.
제국 기사단이 수도에 오면 황궁의 개선식에 바로 참가하는 게 의무이고 그렇게 되면 우린 끝장입니다.”
“리안에게 알리는 문제라면 별로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클로드가 물었지만, 미나즈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방안을 서성대며 중얼거렸다.
“계속 한발 뒤로 빼는 태도를 보였지만, 이미 그런 식으로는 늦었어.
그냥 투항하면 가만히 있었던 것보다 훨씬 못해.”
“그거야 그렇겠지요.”
“게다가 제국의 황제가 봉신에게 내린 권리를 침해했지. 공작의 긍지를 흙발로 짓밟은 황제는 순순히 섬기지 않을 거야.”
미나즈의 말에 클로드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들었다면 곧장 반역으로 몰려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발언이었다.
“어쩌려는 겁니까?”
“순순히 당하지 않도록 해야지. 자고로 외교관이란 얻을 게 있다면 한없이 다정하지만 빼앗아야만 할 때는 혹독한 법이니까.”
“하지만 우린 선수를 빼앗겨 여기에 꽁꽁 묶인 상태가 아닙니까?”
“밖으로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진 않아.”
그렇게 말하며 미나즈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는 발코니 바깥으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공작 부인은 아주 예전부터 어디든 항상 아끼는 매를 데리고 다니셨지.”
분명 공작 부인은 전통적인 매사냥을 즐기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클로드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공작 부인이 여기 오면서 새장을 챙겨 오진 않았을 거 같습니다만.”
“뭘 잘 모르네.”
미나즈가 다소 으스대는 태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북방의 매는 새장에 가두지 않아.
스스로의 먹이를 사냥하며 주인의 주변을 맴돌다 부름에 날아오지. 공작 부인이 여기 있으니 분명히 이 주변 어딘가를 날아다니고 있을 거야.”
하늘을 바라보는 미나즈의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가 어렸다.
“때로는 낡은 취미가 도움이 되는 법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