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여기구나.’
지하에 맞춘 듯한 거대하고 음침한 문을 보자마자 바로 여기라는 직감이 왔다.
“정말 따라가실 건가요?”
황녀가 블레인을 향해 물었다.
블레인은 잔뜩 굳은 얼굴이었으나 물러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님의 선택이니까요. 부디 저를 원망하지 마시기를.”
돌려보낼 생각도 없으면서.
엘레노어는 속으로 불평했다.
“들어가세요.”
황녀의 조용한 재촉에 엘레노어와 블레인은 안으로 들어갔다.
“웃!”
한 걸음 내딛기가 무섭게 블레인에게서 단말마가 터졌다.
“자작님!”
엘레노어는 곧장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이미 정신을 잃은 후였다.
뒤를 돌아보니 황녀가 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둘이 얘기 좀 하자고.”
황녀가 급격히 짧아진 말투로 말했다.
아무리 블레인이 앞장선 기사들만 경계하고 있었다고 해도 단련된 그를 한 번에 기절시킨 걸 보면 황녀도 제법 무술을 익힌 모양이었다.
“안으로 옮겨.”
황녀의 명령에 뒤따르고 있던 눈빛이 멍한 기사들 몇몇이 블레인을 들어 안으로 옮겼다.
엘레노어는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탁한 공기에 불빛도 무척 어두웠으나 뜻밖에도 향초가 피워져 있어 악취는 풍기지 않았다.
그러나 엘레노어의 눈빛은 어두워졌다.
침침한 공기 속에 희미하게 피 냄새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찾아온 주제에 잔뜩 굳었군.”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엘레노어를 내려 보았다.
“다행이라 생각해. 당신을 죽이지는 않는 게 낫다는 이유가 떠올랐거든.”
아까 했던 말의 반복이었다.
‘정말 죽이지는 않을 모양이군.”
그러나 어차피 이런 지하 감옥에 가둘 거면서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말투가 불쾌했다.
황녀는 거만하게 엘레노어를 내려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무사히 내버려 둘 이유는 없으니까.”
황녀가 눈짓하자 뒤에 서 있던 기사 둘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장검 대신 단도를 뽑아 들었다.
잘 벼려진 칼날이 흐릿한 불빛을 모아 번쩍 빛났다.
“다시는 골칫거리가 되지 못하게 그 얼굴에 줄을 그어 주지.”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엘레노어는 황녀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빤히 바라볼 수 있나 보자고.”
황녀는 엘레노어의 눈빛이 맘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올리더니 곧 뒤로 물러났다.
“눈부터 도려내.”
기사들이 다가오자 엘레노어는 한 발짝 물러섰다.
뒤를 가로막은 단단한 철문은 묵직하고 벽이 두꺼워 도망은커녕 바깥으로 비명조차 전달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내부는 제법 넓었으나 숨거나 도망칠 곳은 전혀 없었다.
손에는 무기도 없었지만, 설령 있다 해도 네 명의 기사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엘레노어는 속수무책으로 기사들에게 둘러싸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나이츠,
다른 무엇에도 끼어들지 않지만, 신변에 위험이 있으면 나타나기로 정해진 최강의 호위.
그들이 엘레노어가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실낱같은 희망 중 하나였다.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정말 이런 숨을 곳도 없는 지하까지 기척도 없이 따라오다니.
그 많은 인원 중 모습을 드러낸건 겨우 두 명뿐이었지만, 대단했다.
엘레노어가 놀란 만큼 황녀도 뜻하지 않은 기사들의 등장에 경악한 듯했다.
“…비하인드 나이츠?”
갑옷을 보고 정체를 깨달은 황녀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장 비켜서! 내게 거역하면 당신들의 주인이 죽는다는 것도 몰라?”
황녀가 찢어지는 소리를 냈으나 기사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서약이 활성화되지 않은 한 당신이 죽지 않으면 백작님도 죽지 않아.”
“내게 무슨 짓을 하기만 해 봐! 전부 그 사람에게 그대로 돌아갈 테니까!”
당신을 내보내지만 않으면 돌아갈리가 없지.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엘레노어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눈앞의 적은 기사와 황녀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엘레노어는 황녀가 이곳에 숨겨 둔괴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마녀 베아트릭스.’
감옥의 비밀 때문이었다.
이 안에 있는 이상 황녀의 말을 거역하면 고통스러워지므로 위기에 처하면 황녀를 도울 것이다.
현재 그녀와 맞서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엘레노어는 일단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이곳에 머물 테니 괜한 소요를 일으키지 말고 그냥 돌아가.”
“감히 내게 명령하지 마!”
황녀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엘레노어가 입을 다물자 그대로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어차피 받아들일 거야.’
그냥 내버려 두기도 싫겠지만, 엘레노어의 신변에 위협을 가하다 위기에 처하는 건 더 싫을 것이다.
예상대로 그녀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 전부 저 안으로 들어가.”
황녀가 가리키는 곳은 벽 사이에 난 철창살 너머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서 서로를 묶어.
결박된 걸 확인하면 떠나지.”
“묶자마자 다시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엘레노어가 외치자 황녀는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안으로 들어갈 테니 저 문을 잠그는 자물쇠의 열쇠를 내놔.”
“뭐라고?”
“우리가 열쇠를 가지고 안에 들어가 서로를 묶지. 그러면 당신도 우리에게 손 못 대고 우리도 안에서 나오지 못할 테니 공평하잖아.”
빨리 그녀를 내보내고 싶어 엘레노어가 절충안을 내어놓았다.
황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 곧 품에서 열쇠를 집어 던졌다.
엘레노어는 비하인드 나이츠와 함께 철창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뒤 열쇠를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밧줄로 서로를 묶기 시작했다.
“풀리지 않게 단단히 묶어!”
감시하에 모두 등 뒤로 손을 돌려 철저히 묶었다.
그사이 황녀의 기사들이 빈틈없이 블레인을 다른 철창에 묶어 가뒀다.
모든 게 끝나자 황녀가 물었다.
“여기에 들어온 건 그것들이 전부겠지?”
“그렇소.”
일라이가 엘레노어 대신 대답했으나 황녀가 싸늘하게 받아쳤다.
“너희들에게 묻지 않았어.”
곧 감옥 안쪽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온 건 저것들뿐이야.”
몹시 허스키해서 남녀를 분간하기 어려운 목소리였으나 엘레노어는 그게 베아트릭스임을 직감했다.
황녀는 대답에 만족한 듯 감옥으로 다가왔다.
“당장 얼굴을 찢기지 않은 거로 기뻐하라고, 이런 햇볕도 들지 않는 짐승 우리에 갇힌 채 묶여서 씻지도 못하고 배설을 반복하며 짐승도 안먹을 음식으로 연명하다 보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테니까.”
“사람을 많이 가둬 본 말투네.”
엘레노어는 무표정하게 황녀를 비꼬았다.
“내가 죽어도 백작님은 당신 것이 되진 않아.”
거만하던 황녀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래. 마음껏 건방지게 굴라고. 어차피 5일도 못 가 죽어 버릴 테니까.”
말을 뱉고 황녀는 그들을 절대 내보내지 말라고 소리친 뒤 감옥을 떠났다.
거대한 문이 닫히고 빗장이 끼워진 뒤 동굴을 울리는 걸음 소리가 사라졌다.
엘레노어는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예상대로 황녀는 감시인을 남겨두고 떠났다.
주변을 지키고 있는 이는 초점이 없는 기사 네 명이었다.
모두 묶여 있었으므로 그들은 테이블 주변에 앉은 채 쉬는 중이었다.
“저 정도면 적당하네요.”
엘레노어가 목소리를 내자 곁에 묶여 있던 일라이가 이쪽을 보았다.
“제가 드린 부탁은 완수하셨나요?”
일라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지만, 그게 엘레노어에게 준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소 여유를 찾은 얼굴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포로로 잡혔을 때를 대비한 탈출 훈련은 군인에게 필수죠?”
언젠가 리안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일라이는 드물게 무뚝뚝한 입매를 올리더니 곧 팔을 들어 올렸다.
“우리 비하인드 나이츠의 비전이 죠.”
그렇게 꽁꽁 묶었던 밧줄이 어느새 풀려 있었다.
“뒤로 돌아주시죠.”
일라이가 엘레노어의 팔목 끈을 끊었을 때쯤 감시인들이 그들을 발견했다.
“뭐 하는 짓이야!”
그러나 그들이 다가오는 것보다 비하인드 나이츠의 다른 기사들이 자물쇠를 풀어 버리는 것이 더 빨랐다.
그들은 곧장 문밖으로 나가 감시인들과 맞붙었다.
무기도 없었으나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감시인들을 제압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대단하군요. 상대도 제국 기사단일 텐데.”
“자아를 잃은 무인 따위는 대단할 것도 없죠.”
일라이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대단하지 않을 리 없었다.
비하인드 나이츠에서도 가장 뛰어난 기사들의 힘을 실감하니 무겁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일단 이 남자들을 묶어 가두고 캔터베리 자작님을 깨우죠.”
“그럽시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을 찾아야 해요.”
황녀를 만나자마자 묻고 싶었으나 에이드리언을 언급하면 괜히 인질이 있다고 상기시키는 결과가 나올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일라이는 에이드리언을 찾기 시작하고 다른 하나가 블레인을 창살 너머로 쿡쿡 찔러 깨웠다.
그 사이 엘레노어는 지하 동굴의 깊숙한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당신 거기 있죠?”
온통 철창과 우리뿐인 지하에 비단 커튼이 드리워진 곳이 있었다.
그곳이 분명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베아트릭스.”
이번엔 이름을 불러 보았다.
안쪽에서 쥐가 찍찍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곧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를 어떻게 알고 있지?”
역시 그녀로군.
엘레노어는 미소를 지었다.
비하인드 나이츠와 베아트릭스.
그 둘이 엘레노어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어서 대답해!”
엘레노어가 잠잠히 있자 베아트릭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 대신 엘레노어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에이드리언을 죽이고 손목을 상자에 넣었나요?”
“죽이지 않았어!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지만, 저기 처박아 뒀다고.”
베아트릭스가 바로 앞 컴컴한 우리 한구석을 가리켰다.
멀리서 미간을 찌푸린 채 이쪽을 보고 있던 일라이가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다가갔다.
“거기 있나요?”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우리 쪽으로 몸을 굽히자 베아트릭스가 다시 외쳤다.
“깨우지 마! 그 녀석 계속 울고 비명을 질러 대서 시끄럽단 말이야!”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엘레노어는 커튼 너머로 다가갔다.
“이쪽으로 오지 마! 오면 죽여 버리겠어!”
엘레노어는 그녀가 얼굴을 보이는 게 질색이란 걸 알고 있었다.
“베아트릭스.”
비단 커튼 바로 앞에서 멈춘 채 엘레노어가 나직이 말했다.
“나와 거래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