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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59화 (59/120)

제59화

뻣뻣한 표정을 짓고 있던 좌중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멍청한 소리야? 말도 안돼!”

“절대로 가면 안 됩니다!”

미나즈와 블레인이 가장 격렬하게 반박했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 역시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그건 바보짓이야. 그대가 간다고 해서 그 청년이 풀려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네.”

“그래. 일단은 에이드리언을 찾아서 구출하는 방법을 찾아봐야 해.”

“이미 에이드리언 이야기를 듣고 나서 황녀가 납치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수도를 수색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어요. 해가 지기 전에 찾아내는 건 무리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엘레노어는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하지만 거기로 가 봐야 리안을 묶어 놓는 족쇄가 될 뿐이지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의 목숨만 버리게 될 뿐입니다.”

“그럼 지금 가지 않는다면 제가 살수 있나요?”

엘레노어의 반문에 말리던 블레인 이 멈칫했다.

“황녀는 이미 저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현실적으로 백작님이 서약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죠.”

각인을 잘라 해제하더라도 시전자가 24시간 동안 죽음의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황녀를 죽일 수도 없고, 잡아서 가두어도 의지만으로 죽일 수 있는 이상 해제할 도리가 없었다.

리안이 돌아와 종속의 서약이 활성화된다면 그의 검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

이 모든 사람은 리안을 위해 모인 면면들뿐.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파멸로 가기 전에 자신이 사라지는 게 그나마 가장 피해를 줄일 가능성이 크다는 건 모두 알고 있을 터였다.

순교자인 척할 생각은 없지만, 여기서 숨죽이고 있어 봤자 내일 또다른 손목을 받게 될 뿐이에요. 시간을 끌면 혼자 죽겠지만, 지금 가면 에이드리언은 살릴 수도 있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곁에 있던 공작 부인은 묵묵히 엘레노어의 손을 꼭 쥐었다.

분명 살 수 있을 테니 기다려 보자는 입바른 위로 따위보다 훨씬 위로됐다.

“부딪쳐야 그나마 돌파구가 생길 가능성이라도 있어요. 나는 황궁으로 가 보겠어요.”

미나즈가 착잡한 심경이 묻어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우린 연금된 상태라고. 어떻게 가려고?”

“아마 페이드라 공작님과 함께 가면 막지 않을 거예요.”

스카이에게 물건을 전하게 했으니 아마 근위대에 언질이 있었을 것이다.

떠나기 전 엘레노어는 무거운 좌중을 향해 당부했다.

“내가 거기로 가면 황녀의 경계도 조금은 풀릴 거예요. 운신의 폭이 넓어지면 꼭 칼라브리아 백작님을 살려 주세요.”

“당신이 부탁하는 거보다 훨씬 많은 걸 할 거야.”

엘레노어는 까칠한 미나즈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나를 황궁으로 데려다주세요.”

스카이는 딱딱한 얼굴을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나가는 도중 엘레노어는 문득 벽에 비친 거울을 보았다.

그녀의 목에는 여전히 리안이 준 화려한 보석 목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두고 가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그냥 가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풀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

한참을 달려 마차가 팰리시티로 접어들었다.

동부의 거대한 성문을 지날 때까지 줄곧 말이 없던 엘레노어는 멀리 황궁의 첨탑이 보이기 시작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이런 우울한 길의 동행은 누구라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스카이는 창밖으로 돌리고 있던 바다색 눈을 엘레노어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턱을 괸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선택만 하는군.”

“그런가요?”

“그래. 이런 상황이 되면 깔끔하게 도망칠 줄 알았는데.”

그는 눈썹을 슥 올리더니 불쑥 물었다.

“당신이 칼라브리아 백작과 수도를 뒤집어 놓은 날 밤, 그에게 안겼나?”

정확히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지만, 굳이 말을 길게 늘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카이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교제 신청 전에 잠자리로 끌어들이는 남자는 믿지 않는다고 해 놓고.”

엘레노어는 그의 말에 픽 웃었다.

“억울한 건 이해하지만, 타박은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날을 위해 아껴주시죠?”

“내가 당신을 구하면… 그땐 나와 함께 페이드라 공국으로 갈 건가?”

스카이의 물음을 엘레노어는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스카이가 다시 확인해 주었다.

“내가 당신의 목숨을 살리면 나와 떠나겠냐고 물었어.”

“대체 나를 어떻게 구하겠다는 거예요?”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지.”

그냥 던져 보는 말이 아닌 눈빛이었다.

엘레노어는 반가워하는 대신 샐쭉하게 말했다.

“방법이 있는데 함께 떠나지 않으면 죽게 놔두겠다는 건가요?”

“정말 꼼짝 못 하게 만드는군.”

스카이는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뒤 이내 설명했다.

“여기서 당신이 대외적으로 죽은 거로 해 두지. 그리고 나와 함께 제국 밖으로 도망치면 황녀가 굳이 당신을 추적하려 애쓰진 않을 거야.”

아무래도 스카이가 순순히 데려다 주겠다고 한 건 이런 공작을 꾸미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엘레노어는 고개를 저었다.

“평생 숨어 살 생각은 없어요. 도망칠 바에 맞서겠어요.”

죽음이 임박했는데도 후궁에 숨어 스카이가 오기만 기다리는 삶은 싫었다.

엘레노어의 깔끔한 답에 스카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목숨을 버리려고 해. 일단 살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잖아.”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니까요.”

엘레노어의 말은 진심이었다.

분명 까딱하면 목숨을 잃을 위기인건 맞지만, 믿을 구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데려다주길 바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해 봐.”

스카이는 말해 보라는 듯 눈을 들었다.

“에이드리언이 지금 살아 있다면 어디 있을지 짚이는 곳이 있어요.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나도 아마 거기로 가게 될 거고요.”

엘레노어가 황녀궁에서 이어지는 지하의 제한 구역에 대해 설명하자 스카이의 눈이 커졌다.

“당신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제한 구역은 원작에서 황녀가 가진 유용한 무기 중 하나였다.

연금술 실험을 하기도 하고, 또 키워서는 안 되는 위험한 짐승을 기르다 해프닝이 일어나는 정도로 코믹하게 나왔지만, 사악한 마녀를 가두기도 했다.

성인 남자 하나를 자신의 주변에 흔적도 없이 감추려면 그곳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었으므로 엘레노어는 대강 얼버무렸다.

“오래된 자료에서 본 적이 있어요.”

스카이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리안에게 그 사실들을 전하길 바라나?”

“남은 위험은 그냥 내가 안고 가길 바랄 뿐이에요.”

엘레노어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을 무릅쓰게 하기도 싫고 어차피 황녀와 마주치면 그 즉시 종속될 것이 뻔한 리안이 황녀 궁 지하 감옥에 구하러 올 방법은 없었다.

“이제 빨리 황궁으로 가요. 제가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 주세요.”

창밖에 기울기 시작한 해를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은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묵묵히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겠어요.”

로사그란데 뒤편 마구간에서 엘레노어는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굳이 이 불편한 상황에 스카이를 끌어들여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스카이는 더 붙잡지 않았지만, 엘레노어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살아남아.”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닌데.

“반드시 내가 구해 줄 테니까.”

그의 눈은 무척 진지하고 또 열기로 넘쳤다.

굳이 비탄에 젖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살아남을게요.”

늘 무심하거나 심술궂은 바다색 눈동자에 짙은 걱정이 어려 있었다.

저런 눈도 할 줄 아는 남자였다니.

상당히 의외다.

엘레노어는 스카이의 손을 한 번 꼭 쥔 뒤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대로 로사그란데에 입성하나 했는데 도중에 또다시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는 일이 생겼다.

“엘레노어!”

무시무시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돌아보니 흑마에 탄 블레인이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작님. 여기는 왜 오셨어요?”

뭐 중요한 전달 사항이라도 있는 걸까.

의아해하는 사이 말에서 내린 블레인이 다짜고짜 말했다.

“나도 함께 가겠습니다.”

“네? 어디를요?”

“난 리안에게 당신을 부탁받았습니다. 이대로 보내면 다신 그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그는 결의에 찬 표정을 보고 엘레노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위험하니까 어서 돌아가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같이 들어갈 겁니다.”

엘레노어는 어떻게든 그를 돌려보내려 했으나 그럴 새가 없었다.

로사그란데로부터 시녀장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황녀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자마자 포박당해 무릎 꿇려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공손한 태도였다.

그 앞에서 옥신각신할 수도 없어 엘레노어는 블레인과 함께 시녀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드높은 천장과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밝은 홀을 지나서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안에서 기다리면 황녀 전하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시녀장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둘은 경계하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으나 고상하고 우아한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응접실로 맞아들이다니. 이상하군요.”

블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다소 긴장이 누그러진 기색이었으나 엘레노어는 방 한구석에 있는 책장을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보는 겁니까?”

블레인이 멍하니 묻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책장이 열리고 뻥 뚫린 공간이 나타났다.

“왔군요.”

엘레노어를 바라보는 황녀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검은 옷을 입은 기사 몇 명이 서 있었다.

모두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왠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눈빛이 묘하게 멍해 보였다.

‘종속의 서약을 했구나.’

리안도 저렇게 되는 걸까.

엘레노어는 소름 끼치는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는 황가의 명을 어겨 위신을 손상하고 풍기를 어지럽히는 등 제국에 반역하는 당신의 행위에 몹시 격노하고 계십니다.”

홀이 넓어서 황녀의 목소리는 메아리치 주변을 울렸다.

“발견하는 즉시 즉결 처형해도 상관없다는 명령을 내리셨지요.”

그간 지긋지긋하게 벼르고 있었을테니 곧장 칼을 휘두를 가능성도 있었다.

긴장한 엘레노어의 앞을 블레인이 가로막고 섰다.

“자작께서도 반역자에 동조하시는 겁니까?”

“죄가 있다면 공개 재판을 받게 해주십시오. 황가라도 명백하지 않은 죄로 제국의 귀족을 처형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오해가 있나 보네요.”

블레인의 말에 황녀는 연기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방긋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난 당신들을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자애로워 보였다.

차라리 같이 사생결단을 낼 수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여기까지 온 이상 선택권이 없었다.

엘레노어는 황녀를 따라 어두운 통로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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