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손목이라니? 대체 누구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졌다.
겁이 많은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잘린 손목이라니.
그런 방면으로는 평범한 여자인 엘레노어는 볼 마음이 싹 가셨다.
꺼림칙해서 발걸음이 다소 느려졌지만, 스카이와 클로드는 오히려 걸음을 재촉해 다가갔다.
그들은 거리끼는 기색도 없이 안을 살폈다.
“정말 사람의 손목이군.”
“제길, 이런 소름 끼치는 선물을 보내다니. 끔찍해!””
미나즈가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누가 보낸 거야, 대체?”
“그걸 알려면 우선 누구의 손목인지부터 알아내야 할 거 같군요.”
법관인 클로드는 다소 면역이 있는지 침착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그보다 더욱 대담한 사람이 있었다.
“으악! 페이드라 공작!”
스카이가 상자로 손을 뻗자 미나즈가 질겁했다.
“단서를 찾으려면 살펴야겠지요.”
이때쯤 엘레노어도 상자 부근에 도착했다.
무척 껄끄러웠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서 보기로 했다.
그냥 기분 나쁘라고 보내온 게 아닐 테니 분명 뭔가 단서가 있을 터였다.
“읏.”
각오하고 봤지만, 역시 잘려서 창백한 손을 보는 건 무척 끔찍해서 절로 신음이 나왔다.
그나마 조금 부패하긴 했어도 피가 흐르거나 끔찍한 몰골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자 미나즈가 뒤에서 질색하는 소리를 냈다.
“남자… 손인 거 같군요.”
엘레노어의 말에 스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젊은 남자. 그리고 아마도 귀족인 것 같군.”
손바닥을 위쪽으로 한 채 놓인 손은 여자라기엔 컸지만, 제법 팽팽하고 미끈했다.
제국의 평민은 노동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 스카이의 말대로 손의 주인은 귀족일 것이다.
거기까지 알아냈어도 범위가 너무 넓었다. 현대처럼 지문을 감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손만 보고 신원을 식별하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또다시 단서가 발견되었다.
“손가락에 반지가 있군.”
스카이가 반쯤 접힌 중지 손가락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금색의 두툼한 반지가
“Y라고? 영? 율리스? 욘센? 요르프? 야첸?”
“요크? 예티? 문장의 모양이 틀린데.”
다들 알고 있는 Y로 시작하는 성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엘레노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뭔가를 떠올려 냈기 때문이었다.
“유… 니스.”
엘레노어의 입에서 새어 나온 단어에 미나즈가 눈을 반짝 떴다.
“유니스? 남부의 백작가였던가? 그러고 보니 문장의 모양이 비슷한 거 같은데.”
“남부 가장 끝자락인데. 그 가문의 누군가가 수도에 왔었습니까?”
클로드와 미나즈가 떠들어대는 말을 듣고 비앙카스타는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상자에 다가섰다.
“에이… 드리언?”
손목을 보는 순간 비앙카스타의 얼굴이 뭔가 직감한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남긴 비앙카스타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엘레노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스카이에게 물었다.
“어때요?”
“충격을 받아 기절했지만, 생체 징후에는 문제가 없어. 무리해서 깨우는 것보다는 이대로 재워 두는 게 나을 것 같군.”
기절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면 확실히 그러는 게 나을 것이다.
비앙카스타를 메이드에게 맡기고 집무실로 나오니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뒤늦게 합류한 블레인과 앉아 있었다.
“바이스 후작 영애는 괜찮습니까?”
“네. 잠들어 있어요.”
엘레노어가 대답하며 두 사람 맞은편에 앉자 공작 부인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그 손의 주인이 정말 유니스 가문의 귀족인 게 맞는 건가?”
“아마 맞을 거예요.”
“그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면 서로 친밀한 모양인데. 수도의 어린 공녀가 남부의 귀족과 어떻게 아는 사이가 됐지?”
엘레노어는 비앙카스타가 황녀의 탄생제에서 에이드리언 유니스와 체음 만났고, 귀향길에 올랐던 그가 실종됐으며 계속 그를 찾으려 했던 사실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얘기가 마무리될 때쯤 문이 열렸다.
“상자를 조사하다 이런 걸 발견했어.”
미나즈와 클로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서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비앙카스타가 쓰러지는 바람에 조사하지 못한 상자를 마저 살핀 모양이었다.
“그게 뭐죠?”
미나즈는 대답 대신 읽어 보라는 듯 편지를 엘레노어에게 건넸다.
흔히 볼 수 있는 종이에 인장도 붙어 있지 않은 봉투였다.
열어서 내용물을 꺼낸 엘레노어는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서 읽었다.
[내가 그의 주인입니다.
나와 그는 깊이 연결되어 있어요.
내 명예를 더럽히면 나는 차마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지요.
나보다 먼저 그와 접선하면 나는 그 즉시 죽어 버릴 겁니다.
그냥 협박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죽어서라도 반드시 그를 데려가겠습니다.
오늘 해가 질 때까지 당신이 내게 도착하지 않으면 손목의 주인은 죽습니다.]
낭독을 끝낸 엘레노어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서약의 주인이 황제가 아니라 황녀였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많은 생각에 잠긴 것 같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목소리를 낸 건 이번에도 엘레노어였다.
“에이드리언 유니스가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나요?”
손목을 자세히 살폈던 스카이가 질문을 받았다.
“절단면이 썩 깨끗하지 않고 출혈을 심하게 한 것 같더군. 잘린 지꽤 시간이 지나 확실하진 않지만, 시체가 된 뒤 잘랐다면 혈액이 응고 됐을 테니 산 채로 잘렸을 가능성이 있어.”
산 채로 팔을 자르다니.
에이드리언의 고초를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다면 천만다행이었다.
클로드가 격한 목소리로 분노를 토해 냈다.
“귀족의 손목을 잘라 선물하다니.
아무리 황녀 전하라도 도가 넘은 악행입니다. 호법청에 제소하면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황녀가 보냈다는 증거가 있어야 그렇겠지.”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냉철한 말투로 클로드의 말을 잘랐다.
“조사하면 분명 어딘가에선 꼬리가 밟힐 겁니다. 주술이 걸린 상자를 황궁으로 운반해 귀빈의 별궁에 은밀히 가져다 두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상대는 황제 폐하의 딸이라네. 설령 그녀가 상자를 들고 정문으로 들어가 빈손으로 나오는 걸 목격당했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범인이라고 지목할 수는 없어.”
미나즈도 언쟁에 참여했다.
“행적을 볼 때 황녀는 자신이 이용한 이들은 대부분 세뇌하거나 주술을 걸었을 거야. 증언을 얻어 내기도 어렵고 설령 힘들게 유죄를 증명한다 해도 큰 벌을 받지도 않겠지.
몇 달 근신을 당하게 하려고 법으로 몰아세우면 후환만 클 뿐이야.”
법관인 클로드는 무척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으나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황녀는 명예를 더럽히면 죽겠다고 했어요. 그러면 칼라브리 아 백작님도 죽게 될 거예요.”
엘레노어가 편지의 내용을 지적하자 다시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리안과 서약으로 묶인 이상 이쪽에서는 황녀에게 손을 댈 수 없게 되었다.
반면 황녀는 그 사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일단 당장 어떻게 할지 정해야만해. 시한은 일몰 때니까.”
미나즈가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해는 중천을 넘었으므로 때에 맞춰 황궁으로 가려면 곧 출발해야만 했다.
자세한 계획을 세우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발신인이 누구인지 안 쓰여 있는데 몰라서 못 갔다고 변명할 수 없을까요.”
블레인이 임기응변을 내놓자 스카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런 협박을 한 쪽이라면 그런 사정을 봐주진 않을 겁니다. 일단 유니스를 죽이고 ‘네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 라고 하겠지요.”
“인질을 죽이고 나면 협상의 여지가 사라지는데 섣불리 손을 대겠습니까?”
“에이드리언을 죽여도 인질 따윈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중 누구라도 적당히 연결된 사람 중 하나만 납치하면 되니까.”
풍부한 스카이의 억양이 섬뜩하게 울렸다.
“부모, 먼 친척, 고용인, 친구… 여기 있는 분들 모두가 발이 꽤 넓겠죠. 그리 친밀하지 않은 사이라고 하더라도 하나씩 잡혀가 죽기 시작하면 모르는 척 이 안에서 버티기가 꽤 힘들 겁니다.”
모두의 표정이 굳었지만, 막상 말을 하는 스카이는 태연했다.
그런 그를 불만스레 바라보던 클로 드가 비꼬는 말을 내뱉었다.
“역시 협박범의 심리를 잘 아시는군, 그래.”
“칭찬 감사합니다.”
스카이는 미소까지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았다.
미나즈가 다시 쏘아붙이려는 클로 드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신경전은 그만두고 해결 방법이나 생각해.”
“무슨 방법을 떠올리는 리안의 서 약을 해제하지 않는 한 탁상공론일 뿐입니다. 우선 리안을 자유롭게 해야만 해요.”
“그건 맞지만, 문제는 어떻게 하냐는 거야.”
공작 부인의 말에 열변을 토하던 블레인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서약 부위를 자르거나 봉인해서 해제하는 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리안에게 어떻게든 접선해서…….”
“접선하기도 어렵고, 만일 그렇게 되면 황녀가 죽겠다고 했네.”
“그건 그냥 협박이지 진심은 아닐 겁니다. 설마 황녀 전하가 그런 거로 죽겠어요?”
“단순한 협박은 아닐 겁니다.”
스카이가 공작 부인을 대신해서 블레인의 말을 반박했다.
“황녀는 이상할 정도로 백작에게, 집착하는 데다 무척 예민한 소녀입니다. 한때의 감정에 치우쳐 저지르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블레인과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두 분은 칼라브리아 백작을 잘 알고 있죠. 종속의 서약에 걸렸다는 걸 알면 그가 어떻게 할 거 같습니까?”
공작 부인은 입술을 깨물고 블레인 이 나직하게 답했다.
“황가에 칼을 겨누겠죠.”
“그렇죠. 그의 반역은 위협적입니다. 황가에서는 무력을 써서라도 우리가 합류하는 걸 막을 겁니다.”
미나즈가 시선을 떨군 채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제길. 워프 스톤을 썼을 때 리안에게 말했어야만 했나.”
“백작은 서약에 대해 잘 모를 거고, 또 잘 연락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해도 혼란만 가중할 뿐입니다. 백작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정이니까 이쪽에서도 대응법을 찾아 내기 전에 엇갈릴 우려만 있죠.”
이후로 계속 열띤 토론이 이어졌지만, 이렇다 할 해법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없고,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니 당연했다.
생각에 잠긴 채 잠잠히 듣고만 있던 엘레노어는 시계를 보았다.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시간.
달리 방법은 없었다.
“제가 황궁으로 가겠어요.”
엘레노어의 조용한 목소리에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