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부인은 깔끔하게 수긍했다.
“그럼 사람을 보내서라도 어떻게든 리안의 복귀를 멈춰야겠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분명 감시하고 있을 테니 전력이 약하면 가는 도중 황제에게 요격당할 거예요.”
“그럼 은밀히 요격당하지 않을 만큼 강한 세력을 보내면 되겠지.”
엘레노어의 지적에 공작 부인이 답했다.
그러나 블레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작가의 사병이나 기사단도 이동하지 말라는 분부였습니다. 칙명을 어기면 대놓고 요격할 명분을 주게 되니 하지 않느니만 못할 겁니다.”
“비하인드 나이츠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비하인드 나이츠는 리안의 개인 기사단으로 그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그가 내린 명령이 수도에 남아 엘레노어 남작 부인을 지키라는 거였으니 상충하는 명령은 듣지 않을 겁니다.”
쓸 수 있는 자원은 거의 봉쇄당한 셈이었다.
미나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외부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나…….”
지금으로써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나 블레인이 난색을 표했다.
“제가 제국 기사단 단장 대리라는 명분을 대고도 간신히 들어왔습니다. 공작까지 연금시킨 마당에 황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접선하려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단순히 접선만 해서도 안 된다.
리안에게 닿을 정도의 인력을 은밀히 파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 자리의 모두가 딱 한 사람을 떠올렸다.
“어쩌면 우리 모두 리안의 칼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미나즈가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늦은 밤.
황제는 로사그란데의 내궁으로 들어섰다.
“아일린.”
이름을 부르자 침대에 누워 있던 황녀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사랑스러운 장밋빛 뺨이 창백하고 눈가는 온통 붉어져 있었다.
항상 천사 같은 웃음이 떠올라 있던 얼굴에서 근래 미소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황제는 미어지는 마음으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곁에 앉았다.
“먼저 연회에서 돌아와 미안하구나.”
황녀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연회에서 페이드라 대공과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던데. 대공이 페이드라 공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지.”
들어오는 길에 시녀장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이었다.
스카이를 황녀의 상대로 염두에 둔 적도 없었으나 지금은 딸의 얼굴에 웃음을 찾아 줄 수 있는 상대라면 누구라도 좋을 것 같았다.
황녀는 다른 상대를 들먹였을 때처럼 질색하진 않았으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까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는 더 슬퍼요.”
눈물이 고이는 황녀를 보며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 네 마음이 그렇다면… 리안의 마음은 언제든 되돌릴 수 있단다.”
황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황제는 그녀의 뺨을 쓸며 다정한 어조로 종속의 서약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황녀의 눈빛에 생기를 돌아오게 했다.
“그럼 폐하께서 명령하면 백작님은 뭐든지 듣게 되는 건가요?”
“아니, 네가 직접 바라기만 하면 된단다.”
“제가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바로 서약의 주인이니까.”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황녀의 입가가 떨리기 시작했다.
“네가 바라면 그는 너의 것이야.”
확인한 듯 다시 말해 주자 황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곧 와락 황제의 품에 꼭 안겼다.
황제는 황녀의 마음이 여려 혼란스러워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품에 안긴 그녀는 아직도 작고, 어리고, 아버지가 필요한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그럼… 폐하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뭐라도 들어주마.”
황제는 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종속의 서약이라니.
그간 괜히 쉽게 올 수 있는 길을 돌아가며 리안을 빼앗길까 마음고생을 한 셈이다.
처음부터 알았다면 일이 이렇게 잘못 흐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안을 그냥 고분고분한 인형으로 만드는 건 재미없지만, 서약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용 가치가 너무나 충분했다.
‘이제 저쪽에서는 내게 손도 대지 못하게 된 거잖아.’
자신이 죽으면 리안도 죽는다.
황제는 플로이드 공작 부인에게 서 약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
이제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두 번 다시 이쪽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걸 이용해서 그 계집을 끌어낼 수 있겠지.’
리안이 돌아오기 전에 엘레노어를 없애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적당한 계획도 있었다.
이제 수족처럼 움직이며 그녀의 뜻을 잘 전해 줄 수하들만 있으면 충분했다.
황녀는 머리를 굴리며 드레스를 입고 몸을 단장했다.
마지막으로 구두끈을 예쁘게 묶었을 때쯤이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시녀장이 방으로 들어와 알렸다.
딱 맞는 등장에 황녀는 미소를 지으며 응접실로 나갔다.
“어서 오세요, 공작님.”
그간 부쩍 늙은 듯한 리안의 아버지 칼라브리아 공작이었다.
황녀의 인사에 그는 송구스럽다는 듯 몸을 굽혔다.
“그간 소원해서 죄송합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
리안의 반항. 그리고 공작 부인과 황제의 대립 때문인지 칼라브리아공작은 상당히 저자세였다.
그게 황녀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백작님이 토벌을 떠난 데다가 반란 때문에 정말 큰 곤란을 겪고 계시죠.
다 알고 있으니 염려치 마세요.”
칼라브리아 공작에게 자리를 권한 후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황녀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전 공작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황녀 전하의 부탁이라면 마땅히 들어드려야겠지요.”
칼라브리아 공작은 내용도 듣지 않고 흔쾌히 말했다.
황녀는 조심스러움을 가장해 좀 망설이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 들었어요. 저와 칼라브리아 백작님이 맺은 서약에 대해서요.”
그러자 칼라브리아 공작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황녀는 노린 대로 당황한 척하며 손을 내저었다.
“저는 그걸 이용할 생각이 없어요.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백작님의 마음을 얻고 싶으니까요. 종속이라니. 그런 잔인한 짓은 절대로…….”
겁먹은 것처럼 말을 흐리자 공작이 다소 안도하는 게 눈에 보였다.
“리안이 분명 머지않아 황녀 전하의 갸륵한 마음을 알 것입니다.”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해 주시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황녀는 기다린 속눈썹을 드리우며 시선을 내렸다.
쓸쓸한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 나왔다.
“하나하나 모두 그 여자의 편으로 돌아서고 있잖아요. 저는 공작님마저도 제게 등을 돌리실까 봐 너무나 두려워요.”
“그럴 리가….”
공작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쩔쩔매며 황녀를 달랬다.
“제 충성은 황녀 전하께서 리안을 생각하는 마음에 뒤지지 않습니다.
절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걸 알아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혹시 공작님께서 제게.…….”
황녀가 말을 하려다 말고 머뭇거리 듯 멈췄다.
“아니, 이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네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편하게 해 보십시오.”
“아뇨. 제가 안심하자고 공작님께 부담을 지워 드릴 수는……….”
“전 황녀 전하께서 안심하실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걸려들었다.
황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쭈뼛쭈뼛 말했다.
“공작님이 혹시… 제게 확실한 방법으로 신뢰를 보여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일부러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던졌다.
“백작님과 마찬가지로 제게 종속의 서약을 하는 거예요.”
칼라브리아 공작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칼라브리아 백작님을 서약시킨 것은 폐하에 대한 공작님의 숭고한 충정의 발로라고 생각해요. 거기까지하셨다면 공작님께서는 황가를 완전히 믿고 계신 것이겠지요.”
“물론 황가를 믿습니다. 저는 그런 것이 없어도 완벽히 황가에 종속된….”
“서약을 하면 우린 정말 깊이 연결되는 거잖아요. 마치 가족이나 마찬가지가 될 거예요.”
황가와 가족이나 마찬가지란 말에 공작은 순간 눈을 빛냈다.
그러나 아직 판단력은 남아 있는 듯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나 그런 건 아무래도…….”
“아들에게도 하게 하셨잖아요. 좋은 거니까 하신 거 아닌가요?”
아픈 곳을 찌르자 공작은 더욱 당황했다.
황녀는 생긴 틈을 철저히 파고들어 공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공작님께 서약의 힘을 사용할 리가 없잖아요.
다만 확실히 한다면 저는 깊은 충정에 정말 감격할 거예요.”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칼라브리아 공작은 점점 사색이 되어 갔다.
“저를 믿으신다면 제게 신뢰의 증거를 보여 주세요.”
공작의 눈빛은 언젠가 보았던 덫에 걸린 여우와 똑 닮아 있었다.
*
하늘은 푸르고 정원에 핀 장미가 선명하게 흐드러진 아름다운 오후였다.
엘레노어는 공작 부인과 함께 성곽앞 정자에 나와 있었다.
날씨가 좋기도 했지만, 안에서 마냥 소식을 기다리기엔 마음이 심란 했기 때문이다.
둘은 나란히 정원 의자에 앉은 채 종일 하염없이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기다릴 때 흔히 그렇듯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않는 책을 내려놓고 엘레노어는 공작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말해 보게.”
말은 꺼냈는데 물어도 되는 걸까.
엘레노어는 그냥 과감히 지르기로 했다.
“대체 왜 공작님과 결혼하셨나요?”
칼라브리아 공작의 목적은 분명해 보이는데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왜 그걸 받아들였는지 의아했다.
공작은 정략결혼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지만, 공작 부인은 그럴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질문을 받은 공작 부인이 한쪽 눈썹을 조금 올렸다.
“그런 질문을 받는 건 처음이군.”
감히 누구도 묻지 못했을 것이다.
반응이 어떨지 조마조마했으나 다행히도 공작 부인은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외모 때문일까.”
“네?”
“뭐, 지금은 그래도 젊었을 땐 잘생겼었거든.”
외모 때문이었나.
이토록 근엄한 공작 부인이 얼빠였다니.
엘레노어는 칼라브리아 공작을 먼 발치에서조차 본 적이 없었지만, 리안의 외모를 볼 때 미중년일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러면 연애결혼이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차라리 정략결혼이었다면 더 나았겠지만.”
공작 부인은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말했다.
“아닌 것을 진심이라 믿었던 게 패착이었지.”
자못 가볍게 말했지만, 씁쓸함이 묻어났다.
공작 부인도 감춰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듯 말을 조금 더 붙였다.
“서로 다른 것을 원하는 결혼 생활은 끔찍하기 짝이 없어. 내 아들에게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진 않군.”
삶에서 묻어난 깊은 회한이 담긴 말이 무겁게 느껴졌다.
생각에 잠긴 엘레노어에게 이번에는 공작 부인이 질문했다.
“그대는 왜 결혼했지?”
“제가 바란 게 아니었어요.”
“신분 때문인가.”
엘레노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
“자네의 신분은 아마도 평생 발목을 잡겠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공작 부인이 말하니 콕콕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 불만이 없어도 저렇게 높은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이 이쪽을 어떻게 보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공작 부인은 뜻밖의 말을 건넸다.
“그토록 어린데 그 짐을 이겨 내고 있다는 게 신기하군.”
공작 부인은 어쩐지 대견해 하는 듯한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묘한 기류.
엘레노어가 뭔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
저택 쪽에서 비앙카스타가 달려 나왔다.
“지금 공작령 입구에 손님이 도착하신 것 같대요.”
탑에 앉아 있던 미나즈와 클로드가 먼저 손님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와 준 건 다행인데 과연 무사히 들어올 수 있을까.
황실 근위대가 입장을 가로막고 있을지도 몰랐다.
“성문으로 가 보지.”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공작 부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럴 필요 없이 곧 성문을 통과하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큰 키에 새카만 머리.
변함없는 스카이 페이드라 공작이었다.
속은 알 수 없어도 의지할 수 있는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었기에 그를 보자 팽팽하던 마음이 다소 안도가 됐다.
“생각보다 간단히 들어왔네요. 황실 근위대와 실랑이 정도는 벌일 줄 알았는데.”
“황녀 전하가 보내는 물건을 가져왔다고 하니 쉽게 통과시켜 주던데.”
“그런 게 있어요?”
그냥 들어오기 위해 꾸며 낸 핑계인 줄 알았는데 스카이는 정말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내 별궁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어. 당신에게 전하라고 쓰여 있더군.”
상자는 좋은 나무를 쓴 것 같긴 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었다.
한 편에 [엘레노어 마리체 귀하]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빼고는.
“이걸 황녀가 내게..…?”
엘레노어가 중얼거리자 스카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사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럼 왜 황녀가 보낸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범상치 않은 물건이거든.”
스카이가 설명하듯 상자를 들어 올리더니 고리를 풀고 잡아당겼다.
평범한 나무 상자일 뿐인데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았다.
“보다시피 주술이 걸린 상자야.”
“주술이요?”
“전달의 서약이 걸려 있어. 특정인물만 진짜 선물을 볼 수 있는 거야.”
주술이 흔하지 않은 제국에서 그렇게까지 했다는 건 확실히 배후가 의심스러웠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독이 든 건 아니겠죠?”
“모르겠어. 조심하는 게 좋겠지.”
뭔지 몰라도 일단 내용물은 확인해 두는 게 좋을 터였다.
세 사람은 만전을 가하며 상자를 열 준비를 했다.
혹시 저주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스카이가 정원 한가운데 진을 그리고 그 위에 상자를 놓았다. 그러는 사이에 미나즈와 클로드, 그리고 비앙카스타도 정원으로 나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정을 알게 된 미나즈는 부하에게 기다란 장대를 가져오게 시켰다.
“그대로 열어. 아주 조심해서!”
천으로 입과 코를 막은 엘레노어가 멀리서 장대를 상자 고리에 걸어 당겼다.
그토록 힘을 줘도 꼼짝 않던 뚜껑이 쉽게 열렸다.
“동물을 풀어 가까이 가 보게 해.”
미나즈가 명령하자 곧 몇 마리의 동물들이 상자 부근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얼마를 기다려도 중독되는 기미는 없었다.
“괜찮은 것 같군. 가까이 가서 살펴보지.”
공작 부인은 남고 엘레노어와 스카이, 그리고 미나즈와 클로드가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미나즈는 많이 궁금했는지 혼자 뛰어서 가장 먼저 도착했다.
상자를 들여다 본 그녀는 곧 작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으앗! 이게 뭐야! 제길.
“뭔데 그럽니까?”
클로드가 질색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사, 사람의 손목이야.”
“손목이라고요?”
“그래. 잘려서 들어 있어.”
엘레노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