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56화 (56/120)

강단 있는 공작 부인의 말이었기에 더욱 절절했다.

엘레노어는 감히 뭔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자신을 사지로 넘겨도 자식을 지키기 위한 어머니의 결정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말을 따른다고 해도 그 애는 절대 자유롭게 되진 못할 거야.”

차마 소리 내어 긍정하진 못했지만, 엘레노어도 동감했다.

언제든 자신의 자아를 빼앗을 수 있는 상대와 맺어지는 건 얼마나 잔인한가.

공작 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 아들이 의지를 잃은 꼭두각시인형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허공을 응시하던 보라색 눈동자가 서서히 돌아와 엘레노어를 보았다.

“아들의 하나 남은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지켜 주는 게 어머니가 할 일이 아닐까.”

어두웠다.

아마 체펠린이 올릴 보고를 이미 눈치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틀 밤낮에 걸쳐 기사단 수백 명과 사병, 군견을 동원해 라 플로이 드를 샅샅이 뒤졌다.

그중 어디에서도 엘레노어 마리체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아직 기간이 짧으니 물도 음식도 먹지 않은 채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종탑 구석 서랍장에 웅크리 제보가 손쉽게 들어왔다.

돌아보면 너무 맹목적으로 무모하게 추진한 추적이었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도발적인 화법에 말려들어 버린 탓이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 역시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로 갔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이 황제를 이곳으로 유도한 후 엘레노어를 빼돌린 속내는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엘레노어를 잡는데 협조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일단 복귀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체펠린은 아주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어놓았다.

황제는 아마 당장 라인 오브 에이 브로트로 쳐들어가 엘레노어를 눈앞에 꿇리고 싶겠지만, 그것만은 반드시 말려야 했다.

겨우 여자 하나를 잡겠다고 제국의 금기를 어기며 공작령으로 돌진해 두 공작을 적으로 돌리는 건 대가가 너무 과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큰 반대급부가 따라올지도 모른다.

‘대체 그 여자는 무슨 마력을 품은 건가.’

하나의 공작령에 모인 에이브로트, 로우앤, 플로이드 가문의 가주.

거기다 아직 속을 읽을 순 없지만, 스카이 페이드라까지도 제법 깊이 얽혀 있었다.

무려 공작 네 명이 황제의 의지에 반해 가며 그녀의 주변에 있는 것이다.

“제국의 은혜를 입은 공작들이 감히 내 뒤에서 작당하다니……….”

황제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넘쳐흘렀다.

그는 이를 가는 소리를 내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체펠린은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황제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황궁으로 복귀한다.”

황제가 길게 이어진 침묵을 깬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에 모인 공작들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게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리안에게 통하는 연락을 철저히 차단해, 주술이나 매, 비둘기, 불꽃, 그 어느 것도 전해져선 안 돼. 주술사가 얼마나 필요해도 좋으니 즉시 소집해서 리안 주변에 워프 스톤을 차단하는 결계도 세우도록.”

황제의 명령에 체펠린은 고개를 조아려 대답했다.

“황궁에 도착하면 즉시 로사그란데로 가겠네.”

황녀 궁의 이름이 나오자 체펠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애에게 모든 걸 밝히겠다.”

결국, 그 말이 황제에게서 나왔다.

*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의 중앙 성.

정방형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곽은 절제된 미가 엿보였다.

그 우측 탑 한 방에서 성의 주인인 미나즈가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조용하니까 더 심란하네.”

연회의 밤으로부터 이틀째.

그녀의 말대로 공작령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대비 중이었으나 그간 비앙카스타를 데려다주고 떠난 스카이 외에는 별다른 방문객조차 없었다.

방 중앙 커다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클로드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조용해서 다행 아닙니까?”

“이건 폭풍 전의 고요함에 가깝잖아. 우리 선택을 잘못한 거 아닐까?”

“그런 건 당사자가 없는 데서 고민하십시오.”

클로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엘레노어가 말했다.

“뱉은 말은 무르기 없기에요.”

두 사람은 리안의 진실을 듣는 대가로 황제가 요구해도 플로이드 공작 부인과 엘레노어를 내주지 않겠다고 했다.

딱히 협력까지 요구하지 않았지만, 미나즈는 마치 자기 일처럼 몸이 달아 있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계실 건가요?

먼저 움직이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미나즈의 채근을 받은 공작 부인은 직접 답하는 대신 엘레노어를 흘깃보았다.

“곧 소식이 있을 테니 좀 더 기다려 보죠.”

엘레노어의 말에 미나즈는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수긍했다.

‘제국의 공작이 내 말을 듣다니.’

신분제가 공고한 제국에서 철저하게 고위 귀족의 심기를 맞추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팔며 살아온 엘레노어에게는 무척 생소한 상황이었다.

이런 위상의 변화는 리안과 얽혔기 때문일까.

기쁘다기보다 부담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행히 엘레노어의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캔터베리 자작께서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의 입장 허가를 요청하셨습니다.”

저녁 무렵 블레인이 공작령을 방문했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공작들에게 새로운 바깥소식을 전달해 주었다.

“리안이 하크메르시아 토벌에 성공했고 현재 수도로 복귀 중이라 합니다.”

엘레노어는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종속의 서약에만 정신이 팔려 기껏 리안을 만나고도 채 나누지 못한 말들이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위험한 원정이 성공으로 끝났다는 말에 한시름 놓았다.

“지금 어디쯤이지?”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라 벌써 남부의 경계입니다.”

속도는 놀라웠지만, 제국의 넓이를 고려하면 아직도 수도에 도착하려면 일주일 이상 남아 있었다.

“이제 움직일 건가?”

미나즈가 테이블에 기댄 팔에 턱을 괸 채 물었다.

리안의 상황을 알았으니 해야 할 일은 확실했다.

“우선 리안과 접선하고, 그 애가 수도로 돌아오지 않도록 해야만해.”

줄곧 묵묵하던 공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뜻밖에도 블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미나즈가 물었다.

“왜 힘들지?”

“오전 중 황제 폐하의 칙명이 내려왔습니다. 제국 전체에 불온한 무리가 날뛰고 있으므로 공작들의 안전을 위해 황실 근위대가 호위한다고 하셨습니다.”

“호위?”

“그렇습니다. 반역자가 모두 잡힐때까지 제국의 공작들은 안전하게 황실 근위대가 지키는 저택에 머물라는 명이었습니다.”

그 말에 미나즈가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럼 저 불빛들이 황실 근위대가 몰려온 거란 뜻이야?”

“그렇습니다.”

미나즈와 클로드,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모두 동시에 헛웃음을 지었다.

말이 호위지 사실상 연금이었다.

“설마 그 공작이 숨어야 할 정도로 거대한 반란의 거두가 여기 있는 이 예쁜 아가씨라고 발표한 건 아니겠지?”

미나즈의 잔뜩 비꼬는 말에 블레인 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반란 주동자의 정부라고 지목했나?”

“그것도 아닙니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수배령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뭐? 정말?”

미나즈가 놀란 듯 묻자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받았다.

“어차피 이 안에 있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수배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거겠지요. 저를 대놓고 지목하면 기껏 가져다 붙인 이유가 웃음거리로 바뀔 테니까.”

좌중은 엘레노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우릴 이 안에 가둬 놓고 뭘 하려는 걸까요.”

“리안이 돌아오는 대로 서약을 활성화시키려는 거겠지.”

미나즈의 딱 부러지는 말에 방 안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우린 힘들게 구했지만, 황가라면 좀 더 수월하게 워프 스톤을 구할 수 있어. 어쩌면 오기 전에 이미 활성화시켰을지도 모르네.”

공작 부인은 여장부답게 냉정한 말투로 지적했다.

그것을 클로드가 반박했다.

“종속의 서약은 한 번 활성화시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바로 활성화시키기 전에 서약사실을 알려 주고 설득해 보지 않을까요?”

“리안은 그걸 알아도 타협하지 않을 테니 결과는 같을 거야.”

“종속의 서약을 활성화해도 겨우 30분 안에 칼라브리아 백작을 조종해서 수도로 돌아오게 한 뒤 마냥 기다리기는 불안할 겁니다.”

클로드와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레노어가 입을 열었다.

“제 생각도 같아요. 애초에 그렇게 할 거라면 우리를 이 공작령에 연금할 이유도 없겠죠.”

“그 말이 옳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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