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남 …인.”
뿌연 의식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으나 몸을 흔드는 손길은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 떴네. 다행이다. 괜찮아?”
여자치고 낮은 목소리에 또렷한 발미나즈 에이브로트가 그녀를 내려 보며 묻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니 기억에 남아 있는 침실의 침대 속이었다.
“깨워서 미안해. 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꼼짝도 없어서 뭔가 잘못된 줄 알았거든.”
워프 스톤을 사용해도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고 들었다.
30분 만에 돌아왔는데 바로 깨어나지 않았다는 건 기절했다는 뜻이었다.
“워프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었나 봐. 물 마실래?”
“아뇨. 괜찮아요.”
엘레노어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분명 속이 메슥거리고 모든 게 최악이었지만, 이 기회를 만들기 위해 그들이 협력해 준 걸 생각하면 엄살이나 부리고 있을 순 없었다.
“답은 알았어?”
“네.”
고개를 끄덕인 뒤 엘레노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답을 드리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응? 뭔데?”
“칼라브리아 백작이 종속의 서약을 했다면, 혹은 하지 않았다면 두 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미나즈의 눈이 가늘어지고 곁에 서 있던 클로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제 와서 신경 쓰는 거야? 그런건 한 번뿐인 기회를 양보받아 다녀오기 전에 물었어야지.”
“백작님을 만났던 게 두 분의 덕인건 알지만, 제가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습니다.”
두 공작의 미간이 동시에 좁아졌다.
“지금 여기가 내 저택 한복판이고 당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거 알지?”
“네. 그렇겠지요.”
엘레노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서 나간다고 안전한 것도 아닌데.
생명의 위협도 이쯤 되니 익숙해져서 그냥 일상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놓고 배를 째자 미나즈가 눈썹을 올린 채 혼잣말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난 외교관으로서 속셈을 털어놓는 걸 좋아하지 않아. 애초에 ‘속내를 털어놓는다.‘라는 건 변죽 좋게 상대에게 맞추는 척 부리는 협잡이라고 생각하거든.”
계속 웃고 있던 미나즈는 표정을 바꾸니 다른 사람처럼 냉정했다.
코끝을 치켜든 채 조용조용 말하는 모습에서 세계를 조율하는 외교관의 관록이 풍겼다.
“서로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야.
우리의 기분이나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것도 싫고, 애초에 시간 낭비잖아. 지금은 진심이라 해도 사정이란 건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도 있는 거고 말이야. 우리의 말을 믿을 수 있겠어?”
마지막 것은 질문이라기보다 자문처럼 들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결과를 말하라고 다그칠 필요는 없겠지요. 어차피 우리보다 먼저 알아야 할 분이 있으니까.”
“음. 그렇네. 일단 그분을 만나 보고 말할지 말지 결정하면 되겠지.”
두 사람이 뭔지 모를 합의를 이루자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누구죠?”
“플로이드 공작 부인. 지금 이 위에 와 계셔.”
“공작 부인께서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엘레노어에게 클로드가 설명했다.
“이번 일은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우리에게 직접 부탁한 겁니다.”
“그래. 우린 애초에 워프 스톤을 구하기가 어려워.”
그 말을 듣자 엘레노어는 조금 의문이 풀렸다.
그냥 타인일 뿐인데 리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될 일에 영지 하나를 호가하는 보물을 써 가며 서두르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공작 부인에게도 답을 아끼려는 건 아니겠지?”
엘레노어는
“아뇨. 만나 보겠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엘레노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군.”
엘레노어와 마주 앉자 공작 부인이 가장 처음 건넨 말이었다.
사실 그랬다.
공작 부인이 왜 여기 있는 건지, 연회는 어떻게 된 건지, 리안의 서 약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수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러나 엘레노어는 차분히 그것들을 삼켰다.
자신이 그랬던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공작 부인은 초조할 테니까.
“공작 부인께서도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시겠지요.”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픽 웃더니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지금 보니 테이블에는 와인 잔과 병이 놓여 있었다.
“각인은 찾았나?”
거의 평소와 같은 억양이었으나 마지막 발음이 조금 떨렸다.
엘레노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플로이드 부인은 와인을 조금 들이켰다.
“네.”
나직하고 짧은 대답이었지만, 공작부인의 손이 멈칫해서 전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어디에?”
“혀에 있었습니다.”
“그렇군.”
말한 뒤 공작 부인은 다시 한번 되뇌듯 읊조렸다.
“혀인가.”
테이블을 응시하는 공작 부인의 얼굴은 무표정한데도 수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잠시 멍하게 있다가 공작 부인이 픽 웃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이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그렇네요.”
“뭐, 그래도 거기가 아닌 게 다행이려나.”
너무 충격을 받아서 허탈한 듯 공작 부인은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이번엔 엘레노어가 질문을 던졌다.
“저를 보내셨다는 건 칼라브리아백작님께서 공작 부인도 모르게 서 약했다는 뜻인가요?”
“난 리안을 낳고 곧장 북쪽 영지로 갔으니까. 함께 지낸 건 리안이 6세가 되어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북방에 머물던 시기뿐이지.”
6세면 충분히 서약을 마치고 갈수 있는 기간이었다.
민하다가 결국 리안이 돌아오기 전에 확인하는 게 낫겠다 생각했네.”
그러고 보니 최근 며칠간 공작 부인은 피곤하다며 보고도 사양하고 방에서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아들을 위해 워프스톤을 마련하고 계획을 짠 것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소식을 전해 송구스럽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이미 오늘 폐하께서 내게 직접 말했으니까.”
“폐하께서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혹시 이 방밖에 황제의 근위대가 나를 잡아가려고 대기 중인 것일까?
“그렇게… 하실 건가요?”
“글쎄. 선택의 여지가 내게 있는지도 모르겠군.”
모호한 대답이었으나 사실 답은 명확했다.
자신은 공작 부인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아니 오히려 눈에 거슬리는 여자일 뿐이다.
금방이라도 끌고 가라는 명령을 내릴까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자네는 계속 그렇게 리안에게서 도망 다닐 셈인가?”
공작 부인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도망이라.
엘레노어는 그 단어가 무척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저도 그런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자조적으로 웃으며 공작 부인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왜지? 두 사람의 신분과 입장 차이 때문에?”
“그게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세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당신은 모든 걸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하려 했다.
“중요하지.”
그러나 공작 부인은 간단히 수긍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
어느새 빈 와인 잔을 스스로 채우며 공작 부인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지체 높은 공작이랑 결혼했지만, 자기 볼일 외엔 안중도 없었어. 아이를 낳고 나서는 내가 7년간 정조대를 입고 다녔어도 몰랐을걸.”
잔을 비우는 속도가 더 빨라져 공작 부인은 새로운 와인을 열었다.
“그 사람은 오직 권력을 지키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내 말은, 대체 리안이 황녀와 결혼해서 좋은 게 뭐냐는 거야.”
술이 들어가서일까.
거침없는 공작 부인의 말에 엘레노어가 흠칫했다.
“내 아들은 황녀랑 결혼 안 해도 내가 술이 흐르는 연못도 파 주고 케이크로 저택도 지어 줄 수 있단 말이지. 필요하면 뒷마당에 삼천 미녀를 모아 하렘도 만들어 줄 수 있는데 뭐 하러 황가에 장가를 보내서 고통을 준단 말이야?”
공작 부인은 툴툴거리듯 말한 뒤 다시 와인 병을 들려 했다.
그러나 엘레노어가 먼저 병으로 손을 뻗었다. 공작 부인의 손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능숙하게 와인을 따라 주자 공작부인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반가운가?”
“그게 저를 인정한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리안에 대한 일로 마음이 꽉 차서 그 후의 일 따위는 막막할 뿐이었다.
엘레노어는 이상한 기대를 품은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어깨를 으쓱하며 딱 잘랐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네.”
공작 부인의 얼굴은 취기가 오른 것처럼 살짝 기울어 있었다.
“내 아들이 짊어져야 할 가혹한 운명이 너무 두려워. 뭔가를 결정하기가 어렵네.”
속에서 끊어 흐르는 듯한 목소리가방 안에 울렸다.
“그 애는 나의 전부야. 내가 지금 죽어 그 애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다면 당장 그러고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