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리안은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지금… 뭐라고?”
귀를 의심하는 그에게 엘레노어가 다시 한번 확실하게 확인해 주었다.
“옷을 벗고 몸을 보여 주세요.”
그 말은 리안을 이해시키기는커녕 더욱 혼란에 빠뜨린 듯했다.
“어,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 내가 옷을 벗어 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은 상상도, 아니 물론 굉장히 많이 상상했지만, 그러니까…..”
엘레노어는 리안이 황망하게 말하는 사이 막사 안에 놓인 책상으로 다가갔다.
업무 중이었던 듯 보고서가 흩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대충 휙 옆으로 밀어 버리고 리안의 팔목을 끌고 와 앉혔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아무래도 스스로 벗어 주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그냥 직접 손을 쓰기로 했다.
엘레노어는 한밤중인데도 정갈하게 매여 있는 크라바트를 푼 뒤 리안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담했지만, 차츰 리안의 단단한 근육과 피부가 드러나자 심장이 뛰고 손끝도 차츰 떨렸다.
반면 상의 단추를 전부 다 풀 무렵 리안은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워프 스톤이라면 이러기에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것 같지만……….”
작게 중얼거린 뒤 리안은 엘레노어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엘레노어는 그대로 책상에 눕히려는 리안의 팔을 막으며 황급히 소리쳤다.
“잠깐만요, 백작님.”
리안은 왜 멈추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게 아니에요.”
“뭐가 아닌 겁니까?”
“어, 야한 걸 하러 온 게 아니라…….”
엘레노어는 얼굴을 붉히며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백작님의 몸을 살피고 싶어요.”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정말 이상하다.
이래서야 무슨 기괴한 성벽이 있는 변태처럼 보이겠지.
리안은 몹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셔츠를 벗으면 되는 겁니까?”
엘레노어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으로 아래까지 벗어야 한다는 의사는 전해진 듯했다.
“불빛을 조금 흐리게 할까요?”
“…그다지 위안이 될 것 같진 않습니다만.”
리안은 그렇게 말했지만, 밝은 불빛 아래서 몸을 살피는 것보다는 조금 덜 민망할 듯했다.
어차피 각인은 빛을 낼 것이므로 엘레노어는 등불로 다가가 심지를 낮췄다.
돌아선 등 뒤로 리안이 외투를 의자에 걸쳐 놓는 소리가 들렸다.
엘레노어는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지만, 사방이 조용해서 모든 소리가 귓전을 뒤흔들었다.
커프스단추를 푸는 소리. 셔츠를 벗어 책상에 올려놓는 소리.
그리고….
‘이 소리는….’
가죽의 마찰음은 벨트를 푸는 소리인 게 분명했다.
양 뺨이 뜨거워졌다. 태연하려고 해도 안정이 되지 않았다.
신경을 돌리며 엘레노어는 아주 오랜만에 고향의 애국가를 떠올렸다.
1절을 다 부르고 어쩌면 바깥에서도 안의 동향을 살피느라 일부러 소리를 낮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다 됐습니다.”
리안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심호흡했지만, 돌아서자마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가 잘 단련된 몸을 온통 드러낸 채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시작해도 괜찮습니다.”
기분 탓인지 리안의 목소리가 야릇하게 들렸다.
엘레노어는 과감히 눈을 내리려다 멈췄다.
“죄송한데 좀 다른 곳을 바라봐 주세요.”
리안의 반쯤 뜬 눈빛이 뜨거워 부담스러웠다.
“그거도 이유가 있는 부탁입니까?”
“아뇨. 좀 쑥스러워서…….”
“…그건 제가 할 말 아닙니까?”
리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지만, 엘레노어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가 눈을 돌리자 엘레노어는 곧장 리안의 팔을 잡은 뒤 고개를 내렸다.
완전히 나체가 되긴 좀 그랬는지 속옷은 입은 채였다.
안도한 건지 아쉬운 건지 묘한 감정을 느끼며 엘레노어는 리안의 피부를 꼼꼼하게 살폈다.
‘없고… 없고, 여기도 없고.’
단단한 가슴. 잘 잡힌 복근과 잘단련된 허벅지, 발끝을 살폈다.
그 후에는 뒤를 돌게 해서 아름다운 모양의 등 근육과 그 아래까지 봤지만, 어디에서도 각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제 다 봤는데. 이러면…….’
이제 남은 곳이라곤 속옷으로 가려진 부위뿐이었다.
엘레노어가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리안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제… 끝났습니까?”
“아, 아뇨.”
엘레노어는 말끝을 흘렸다.
리안이 그녀의 표정을 보고 쑥스러운 듯 볼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더 벗는 데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했을 때 바깥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역시 바깥에서 다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엘레노어는 요구하는 대신 입술을 오므리며 눈알을 굴렸다.
“대신 서둘러서 보고 내게 시간을 좀 남겨 줘요.”
리안이 엘레노어 쪽으로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리안의 목소리에도 열기가 가득했다.
몸을 살필 때부터 이 접촉으로 그가 얼마나 고조되었는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엘레노어 역시 쳐다만 보는 것이 아쉬웠으므로 저도 모르게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요?”
“이제… 10분 정도.”
“음.”
리안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워프 스톤은 하나뿐입니까?”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안이 입술을 깨물며 뭐라 낮게 중얼거렸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대략 ‘적어도 세 개는 있어야 하는데.’ 라고 말한 것 같았다.
“그럼 서둘러야겠군요.”
리안은 엘레노어의 팔을 잡아끌고 막사의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를 벽 쪽에 세운 뒤 속삭였다.
“나도 쑥스러우니까.”
리안이 한 발 더 다가서자 향긋한 체향과 함께 탄력 있는 피부가 느껴졌다.
그는 엘레노어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보라색 눈을 곱게 휘었다.
“일단 다 벗을 때까지는 내 눈만 보는 겁니다.”
엘레노어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에는 나를 이렇게 만든 걸 책임져야 할 겁니다.”
밀착한 몸으로 그의 흥분이 여실히 느껴졌다.
리안이 한쪽 팔로 그녀의 목덜미를 안았다.
그리고 그의 다른 한쪽 팔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손가락이 닿는 소리.
사라락 스치는 끈의 마찰 소리에 긴장되는 한편 이것이 빨리 끝나기를 기대했다.
‘이대로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미 휘말려 버린 이상 제대로 감정에 마주해야 한다.
엘레노어는 갈망하는 시선으로 리안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리안이 입술을 깨문 뒤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보였다.
“아, 잠깐.”
엘레노어는 멍한 목소리로 리안을 멈췄다.
그리고 손가락을 내밀어 리안의 입술 사이로 살짝 밀어 넣었다.
사고가 마비되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입술의 감촉도 이유를 묻는 듯한 리안의 시선도 느낄수 없었다.
엘레노어의 두 눈은 충격으로 크게 뜨였다.
입술이 떨리고 눈가가 붉어지며 빠르게 눈물이 고였다.
“왜 그래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엘레노어는 걱정스레 묻는 리안의 입을 바라보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의 아름다운 입술 사이.
촉촉한 혀 위에 종속의 붉은 각인 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늦은 밤.
마차가 팰리시티의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바퀴에서 요란한 소리가 날 정도로 빨랐으나 마차가 고급이어서인지 내부는 그럭저럭 평온했다.
비앙카스타는 고개를 숙인 채 무척 초조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쳐다보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잠깐만 보자.’
마음을 정하고 슬쩍 눈을 들었다.
동승인은 다행히 창틀에 팔을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소 여유가 생긴 비앙카스타의 시선이 홀린 듯 그의 얼굴에 꽂혔다.
‘진짜 잘생겼다.
깎아놓은 듯한 콧날 아래로 남자치고 볼륨 있는 입술이 하나의 작품처럼 유려한 옆선을 그리고 있었다.
스카이 페이드라와 단둘이 마차를 타게 되다니.
시선을 떼려 해도 자꾸 가 버려서 비앙카스타는 어느 순간부터는 넋을 놓고 보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가 도심 성문을 지나 팰리시티외곽에 접어들었을 때쯤 스카이가 고개를 돌렸다.
바다색 눈동자에 마주친 비앙카스타는 순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네? 아, 아뇨. 전혀.”
계속 쳐다보고 있던 걸 들킨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었지만, 남자를 대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비앙카스타는 무척 당황해 버렸다.
“그, 그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 하려고……….”
황녀가 각인을 만지면서 하려던 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가 분명했다.
침묵의 서약이 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벙어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끔찍했다.
스카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비앙카스타는 수화도, 문자도, 몸짓도, 그 어느 것도 상대에게 전하지 못하고 백치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구한 것보다 더한 은인은 담백하게 감사를 사양했다.
다시 마차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디로 가는지 아직도 말해 주실 수 없나요.”
스카이는 황녀를 페이드라 대공에게 보낸 뒤 곧 돌아오더니 비앙카스타에게 다짜고짜 뒤를 따르라 요구했다. 행선지를 물어도 나중에 대답하겠다는 말뿐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엘레노어를 몇 번 찾아올 정도로 사이가 가깝고 또 연회장에서 도움도 받았으므로 비앙카스타는 순순히 말을 듣기로 했다.
“엘레노어가 있을 만한 곳으로 갑니다.”
계속 고개를 젓던 스카이가 드디어 대답해 주었다.
비앙카스타는 한층 안심한 얼굴이 되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네요. 아까부터 남작 부인 이 어디에 계신지 걱정하고 있었어요.”
“지금쯤이면 공작령에 있을 겁니다.”
페이드라 가문은 제국에서 분리된 공국이라 따로 공작령이 없었다.
비앙카스타가 머리를 굴린 뒤 다시 물었다.
“라 플로이드에 계신 거군요.”
“아뇨. 그래서는 곤란하겠지요.”
“네?”
“지금쯤 황실 근위대가 그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테니까요.”
스카이의 말에 비앙카스타는 화들짝 놀랐다.
“황실 근위대가 공작령을 뒤진다고요? 세상에 그럴 수가…….”
“이제 슬슬 말도 안 되는 일에 익숙해질 때가 됐습니다.”
설명이 필요했지만, 스카이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의 말대로 최근 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부 말도 안 되는 것들뿐이었다.
“그럼 대체 어느 공작령에 계시다는 거죠?”
“음. 중앙은 도움이 안 되고 북부는 잡혔고 서쪽은 멀고 남쪽은 가장 느리니 아마도 동쪽입니다.”
비앙카스타는 멍청이가 된 기분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스카이가 조금 더 설명해 주었다.
“엘레노어는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에 있을 겁니다.”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
세계의 조정자이자 제국 동쪽의 지배자 에이브로트의 공작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