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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53화 (53/120)

제53화

음악이 멈추자 황녀는 우아하게 댄스 상대에게 인사한 뒤 플로어를 벗어났다.

음료를 마시려 테이블에 다가가자 등을 돌린 채 서 있던 영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좀 분위기가 이상한 거 같아요.”

어린 영애는 걱정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분위기 변화에 예민한 사람들은 연회가 뭔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연회장은 사람들로 북적이며 여전히 성황이었으나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주인공인 공작 부인과 황제는 오래 전에 홀을 떠났고 주빈인 제국의 공작들도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듣기로는 저택 바깥에 아까부터 근위대가 사열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아까 황제 폐하께서는 저택의 서 문 방향으로 귀가하셨다는 말이 있던데요.”

“네? 하지만 황녀 전하는 좀 전까지…….”

떠들고 있던 여자가 홀을 돌아보다 흠칫했다.

바로 뒤에 서 있는 황녀를 발견하고 놀란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황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는 아마 필시 피곤하신 것이겠지요.”

“죄,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다른 뜻이 아니옵고..….”

귀족 처녀는 몸 둘 바를 모르며 사죄했다.

황녀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아뇨. 괜찮으니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들을 안심시키고 황녀는 음료를 집어 든 채 테이블을 떠났다.

평소라면 저렇게 눈치 없이 떠들다 발각된 영애들은 기억해 두었다가 사교계의 주류에 발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황녀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드디어 폐하께서 움직이는구나.’

그가 직접 나선 이상 그 짜증 나는 여자는 금방 잡혀 와 무릎을 꿇게 되겠지.

오랜만에 마음에서 웃음이 우러나왔다.

황녀는 입꼬리를 올린 채 홀을 둘러보았다.

‘내가 데려온 손님과 마주치지 않은 게 유감이지만.

엘레노어의 파티를 망치기 위해 멀리서 초빙한 손님.

도나테 마리체 남작 부인은 비록 엘레노어가 없어도 훌륭히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되먹지 않은 애가 대체 어디로 간 거냐는 거죠.”

입히고 있었다.

“그 애는 원래 돼지 먹이를 주고 성에 땔감을 납품하는 벌목꾼의 딸이었죠. 그런 걸 내 아들이 구제해 줬는데 전혀 감사할 줄도 몰랐어요.”

반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엘레노어의 과거가 저열한 묘사와 함께 퍼져 나갔다.

“내 아들이 옥에 갇혀 있는데도 한번 찾아가지도 않았죠. 누가 은인을 그렇게 대하나요? 자기 신분에 맞지 않는 겉멋만 잔뜩 들어서 다른 사람을 우습게 보기나 했죠.”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부군은 어떤 사람이었죠?”

“아, 내 아들은 모함에 빠진 가엾은 애였어요. 이런 불행이 일어난 것도 전부 그 애가 집안에 액운을 몰고 들어온 탓일 거예요.”

도나테에 의해 마리체 남작의 악행이 흘러나왔다.

상당히 미화해서 얘기했어도 그가 가엾은 남자였다는 건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레노어가 그런 남자의 부인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수면 위로 떠올라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알아서 잘하는 체스 말이로군.’

엘레노어가 가문을 이은 탓에 아무 작위도 없던 도나테는 남작 부인의 작위를 복원해 주겠다는 미끼를 냉큼 물었다.

이제 그 여자가 죽고, 저 짜증 날 정도로 천박한 부인을 수도에 머무르게 해 두면 알아서 엘레노어의 평판을 깎고 다닐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출신이 중요하다니까.’

처음부터 저런 환경에서 태어난 천한 신분이 문제였다.

태생부터 고귀한 이와의 격차가 이렇게 작은 자극만으로도 드러나게 되니까.

‘이제 백작님이 수도로 돌아오면 마음을 잡으시겠지.’

그 여자는 없고 그 여자의 추문만이 남아 있을 테니 리안도 정신이 돌아올 것이다.

황녀가 가볍게 연회를 좀 즐겨 보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어머? 저 사람 좀 봐요.”

“아? 저 영애, 혹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황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역시 여태 살아서 여기 있었군.’

행방을 감췄던 비앙카스타가 홀로 나오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데려갔을 거라 예상하긴 했으나 황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늘 어두운색에 작은 몸을 커버하려는 듯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드레스만 입고 다니던 비앙카스타는 온데간데없었다.

‘저 꼴은 대체 뭐야?’

항상 침침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새카만 머리카락을 반쯤 땋아 올려가녀린 두 어깨를 드러낸 비앙카스타는 홀 안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입고 있는 드레스는 소녀답게 수수한 재단이었으나 조명을 받아 찬란 근하게 말을 걸었다.

“오해가 좀 있었어요. 세간에 떠도는 소문은 전부 잘못된 거예요.”

달라진 모습이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 준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작긴 했지만,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또렷이 말하고 있었다.

“제 사교술에 고민이 많아 엘레노어 남작 부인께 개인적인 상담을 부탁했을 뿐이에요.”

“황녀 전하의 소꿉친구인 당신이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고요?”

“그래요.”

말하면서 비앙카스타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거기에 바이스 후작 부부가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볼 때 모종의 사유로 비앙카스타의 이야기에 맞추기로 한 모양이었다.

“남작 부인이 저를 꾸며 주고 덕택에 어느 정도 문제도 해결하고 나 자신도 변화시킬 수 있었어요.”

비앙카스타를 중심으로 짜증 나는 흐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말 다른 사람 같아요. 진짜 그분은 남다른 안목이 있으시다니까요.”

“통찰력도 굉장해서 이야기만 나누고 있어도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죠.”

평소 엘레노어를 좋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떠들어 댔다.

그들은 비앙카스타에게 드레스에 관해 묻고 남작 부인과 나눈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이런 분위기가 번져 나가기 전에 빨리 틀어막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비앙카스타와 황녀의 눈이 마주쳤다.

“저는 이렇게 달라진 내 모습이 황녀 전하께도 더욱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음침하고 모두가 싫어하는 친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목소리가 떨렸지만, 제법 도전적인 말투였다.

싸늘한 마음과 달리 황녀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이지, 비앙키!”

그녀는 반가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제치고 비앙카스타에게 다가갔다.

“난 정말 벅찬 기분으로 듣고 있었어. 항상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건 시끄럽고 짜증 난다며 파티가 끝날때마다 험담하던 비앙키가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물론 비앙카스타가 누군가를 험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성격이었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대로 떠들 수 있었다.

“절대 칼라브리아 백작님을 유혹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황녀 전하를 위해 거절하고 있으니까.”

비앙카스타의 폭탄 발언에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다.

일시적인 침묵이 흐른 뒤 어마어마한 질문이 비앙카스타에게 쏟아졌다.

“그게 정말이에요?

“우와, 엘레노아 남작 부인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아뇨. 제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백작님의 친구인 캔터베리 자작에게 물어봤어요.”

“꺄아! 자세히 얘기 좀 해 주세요!”

이런 이야기가 계속 길어져서는 곤란했다.

황녀는 황급히 비앙카스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팔짱을 꼈다.

“비앙키. 이제 더는 관심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잖아.”

“나는 지금 그런 게…….”

황녀는 그녀의 팔꿈치 안쪽으로 팔스카이 페이드라가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제 아버지께서 황녀 전하와 대화 하길 원하십니다.”

페이드라 대공이 왜?

하던 말을 마저 맺고 싶었으나 스카이 페이드라의 눈빛이 너무 명민하게 빛나고 있었다.

황녀는 하는 수 없이 비앙카스타에게서 물러섰다.

“먼저 떠나서 미안해요, 비앙카스타.”

뻣뻣이 굳은 그녀에게 사과하며 황녀는 귓가에 나직이 덧붙였다.

“대신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남작부인과 꼭 열어 봐요. 비앙카스타가 아주 좋아할 거예요.”

그 말을 남긴 뒤 황녀는 다정하게 손을 흔들며 연회장을 떠났다.

*

엘레노어는 쿵쿵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리안의 아름다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 떠올라 있던 의구심은 이내 기쁨으로 바뀌었다.

“엘레노어!”

리안이 밝은 얼굴로 한달음에 엘레노어에게 다가왔다.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은 늘 무표정하고 절대 웃는 일이 없는 리안을 보고 당황한 듯 술렁였지만, 리안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여긴 대체 어떻게 온 겁니까?”

“저 백작님께 꼭 드릴 말이 있어요.”

시간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도 없었다.

엘레노어가 말을 멈추고 신경 쓰이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자 리안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아, 그럼 내 숙소로…..”

“안 돼요. 급해요.”

이미 10분은 충분히 흘렀을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리안의 숙소까지 이동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 여기서 둘이 있고 싶어요.”

엘레노어는 간절하게 말한 뒤 이유를 묻지 말아 달란 표정을 지었다.

리안은 보라색 눈동자를 한번 깜빡이더니 곧 고개를 돌렸다.

“전부 밖으로 나가.”

짧은 명령에 부하들은 다소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우르르막사를 나갔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둘만 남자 사정을 물으려던 리안은 얼굴을 붉혔다.

엘레노어가 곧장 품으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리안의 드러난 흰얼굴과 목덜미, 그리고 손을 살폈다.

어느 곳도 티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각인은커녕 점조차도 없었다.

“엘레노어?”

리안이 당황한 목소리로 부르자 엘레노어가 빠르게 설명했다.

“저는 워프 스톤으로 왔어요. 이제 몇 분 남지 않았고, 가기 전에 꼭꼭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그냥…….”

엘레노어는 리안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요구했다.

“옷을 다 벗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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