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황제는 칼라브리아 백작 저 정면 현관 위의 높은 발코니에 선 채 아래를 내려 보았다.
아직 저택 안에서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울타리 너머 광장은 술렁이고 있었다.
민간에서 보기 어려운 황실 근위대의 대열이 황금색 갑옷을 찬연히 빛내며 이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황실 근위대는 최정예이자 전투의 선봉에 서는 제국 기사단보다 평가가 다소 낮았으나 상징성이 있었다.
그에 대적하는 것은 곧 황가에 대한 반역을 뜻했다.
만일 공작 부인의 기사가 공공연히 막아서면 그때는 천하의 플로이드공작 가문이 반역자로 규정 지어지는 것이다.
“폐하. 곧 근위대의 진입 준비가 완료됩니다.”
보고하는 체펠린의 목소리에 긴장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제국의 역사가 바뀔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황제는 무표정했다.
그간 이미 최대한 기회를 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준비되는 대로 저택 수색을 시작하게.”
황제가 담담하게 명령을 내렸을 때였다.
그가 서 있는 방 앞에서 실랑이 소리가 울리더니 곧 문이 열렸다.
“폐하!”
공작 부인이었다.
“이제 와 내게 볼일이라도 생겼나?”
황제는 무관심한 어조로 싸늘하게 말했다.
“많은 귀족을 불러 모은 곳입니다.
공연한 소란으로 폐하의 위신에 흠이 가지 않도록 먼저 전하고자 왔습니다.”
소통을 거부하던 쪽이 상황이 불리해지자 애달아 찾아온 모습이 볼만 했다.
황제는 굳이 들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 돌아보지조차 않았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 마리체는 지금 이 저택에 없습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게 얄팍한 거짓을 고하는 건가?”
“감히 폐하께 거짓을 고하지는 않습니다.”
“근위대가 수색하면 사실인지 아닌지 알게 되겠지. 충성스러운 제국 귀족이 근위대의 진입을 막지는 않을 테니까.”
일부러 비꼬듯 말하자 공작 부인의 보라색 눈이 조금 흔들렸다.
“폐하의 소중한 시간만 낭비하실 겁니다.”
여전히 꼿꼿한 말투에 황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돌아보니 공작 부인의 눈은 해 볼테면 해보라는 듯 도발적이었다.
‘천박한 상업으로 커졌다지만, 제국의 비호가 없으면 한낱 장사치일 것을.’
금의 힘이 엄청나다고 하나 플로이 드 공작가의 사병 규모는 대단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연회를 발칵 뒤집어 힘을 보여 주고 싶었으나 당당한 태도를 볼 때 저택을 떠났다는 말은 정말인 듯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공작 부인이 말대로 모여든 귀족이 너무 많았다.
엘레노어를 발견하지 못하면 명분 없이 건드린 게 되니 불리할 터였다.
“어디로 갔나.”
황제의 질문에 공작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레노어를 보호하러 어딘가로 보냈다면 갈 곳은 하나뿐이었다.
“공작령이로군.”
공작 부인의 표정이 움찔했다.
황제는 바로 돌아서 체펠린에게 말했다.
“근위대의 진입을 멈춰라. 곧장 라플로이드로 가겠다.”
황제의 명령에 체펠린은 사색이 된 채 고개를 조아렸다.
그대로 방을 떠나려 하자 공작 부인이 앞을 막아섰다.
“황실 근위대가 이 저택에 진입하는 것을 막는다면 제가 폐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공작 부인의 온통 창백해진 얼굴에서 보라색 눈과 그 주변에만 붉은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라 플로이드에 근위대가 진입한다면 폐하께서 저를 저버리시는 겁니다.”
그녀의 말은 조용했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그대의 공작령은 설마 황가의 출입도 금하는가?”
“제국에 충성하는 공작이자 황가의 봉신으로서 폐하의 방문은 영광일따름입니다.”
이제야 조금 말이 통하는가.
자치 구역이라 해도 제국 역사상 어느 공작령도 황제에게 축객령을 내린 예는 없었다.
황제가 턱을 치켜드는 순간 공작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하나 플로이드 가문 소속이 아닌 어떤 기사단도 제 공작령에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라 플로이드에 황실 근위대의 진입을 불허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방 안의 공기에 파문이 일었다.
이제 정원에 나와 즐기고 있던 이들도 심상치 않은 흐름을 감지한 듯 발코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는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은 채 공작 부인을 응시했다.
“내가 플로이드 공작가의 충성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반역의 죄를 지은 엘레노어 마리체가 그대의 공작령에 없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해.”
라 플로이드 공작령은 성채뿐만 아니라 산, 호수, 수많은 오두막을 포함한 하나의 영지였다.
황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혼자서 사람 하나를 찾는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
황제의 말은 근위대를 들여보내란 압력이었다.
“내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대부분 떠들썩한 연회에 휩쓸려 있었지만, 황제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어도 이 대담은 메이드건 호위병이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모든 대화가 퍼져 나갈 게 분명했다.
“라 플로이드는 플로이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을 긍지이자 명예입니다. 그 누구도 현 플로이드 공작이자 가주인 나 크리스티 플로이드의 허락 없이 라플로이드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공작 부인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소리 높여 선언했다.
바깥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는 불꽃이 그녀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 그 결의가 돋보이고 있었다.
공개적인 불복에 황제는 동요하지 않았다.
공작 부인의 말에서 파고들 여지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기사단도 진입시키지 않겠다.
는 그대의 발언은 비하인드 나이츠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겠지.”
조금 텀이 있었으나 공작 부인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내 아들의 기사단이라 하나 비하인드 나이츠는 칼라브리아의 맥을 이어받은 곳. 그들의 진입 또한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이것으로 자승자박이었다.
비하인드 나이츠가 없이 플로이드기사단만으로는 황실 근위대를 막을 수 없었다.
“반역자를 색출하는 것은 황가의 위신에 무엇보다 중요하네. 나는 들어가서 그녀를 찾을 거야.”
황제는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의 군대가 공작령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오명을 쓰게 된 공작 부인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만일 라 플로이드에 엘레노어 마리체가 없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작 부인은 감정으로 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를 찾으면 저를 감히 황제께 거짓을 고해바친 반역자로 처벌하십시오.”
공작 부인의 기세에 공기조차 서늘해졌다.
그녀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하지만 찾지 못하면 내 허락을 받지 않고 감히 라 플로이드에 들어선 이는 모두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새파란 서슬에 황제는 조금 멈칫했다.
어떤 경우라도 절대 명분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라 플로이드에 그 여자가 없다고 맹세할 수 있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찾을 수 있다면 찾아보십시오.”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고 했고, 맹세는 거부했다.
시간을 천천히 들여서 찾으면 그녀는 반드시 라 플로이드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어떤 술수를 부려도 자신이 속한 장소를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라 플로이드로 향한다.”
황제의 악문 이 사이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반드시 그 계집을 잡아 돌아갈 것이다.”
*
[절대 실패해서는 안 돼.]
머릿속에 어지럽게 목소리가 울렸다.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 그 안에 무슨 수를 써서는 리안을 만나 각인을 확인해.]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엘레노어는 주술을 외웠고, 곧장 온몸을 집어삼키는 듯한 새하얀 빛에 휩싸였다.
놀라 바로 눈을 감아 버렸지만,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광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난기류를 만난 항공기처럼 흔들림이 계속되고 귀가 멍해졌다.
미칠 듯한 속도감에 멀미가 일어나려 할 무렵.
엘레노어는 간신히 빛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이동… 한 건가?’
온몸의 감각이 기묘하고 위화감 때문에 겁이 났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엘레노어는 용기를 내서 눈을 떴다.
‘여긴.….’
눈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 세워진 목책들과 높다란 망루.
그 사이사이를 밝힌 무쇠 횃불과 투석구, 그리고 막사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아늑하고 우아한 공작의 성은 흔적도 없었다.
‘제대로 온 모양이네.’
어딜 봐도 목적지였던 바젤의 주둔 지의 구석임이 분명했다.
엘레노어는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우선 사방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넓네.’
소도시인데도 주둔지는 수만의 군대가 머물 수 있을 만큼 넓고 컸다.
사실 작다고 해도 모든 막사를 뛰어다니며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리안이 이곳에 있는지 어떨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바로 눈앞에 있어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꾸물거릴 여유는 없었다.
‘어차피 붙잡히더라도 30분 안에 돌아가게 될 테니까……….’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최대한 빨리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엘레노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망루를 발견했다.
전시가 아니라 그런지 주둔지 가운데는 경계하지 않는 듯 비어 있었다.
‘저기로 가자.’
아이디어를 떠올린 엘레노어는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망루에 기어올라 숨을 최대한 들이쉰 뒤 배에 힘을 꾹 주었다.
“칼라브리아 백작니이이이이이이이 이임!”
엘레노어의 목소리가 야영지를 써렁쩌렁 울렸다.
훈련이 잘된 제국 기사단답게 삽시간에 사방에 불빛이 올라오고 기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침입자다! 잡아라!”
“어디야? 여자 목소리인데?”
“아니, 망루에 어떻게!”
야밤에 갑자기 주둔지를 돌파당한 기사와 병사들의 황망한 외침이 들렸다.
엘레노어는 고지의 이점을 살려 더욱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칼라브리아 백작님! 좀, 나와 보세요! 제가 왔어요! 백작님!”
3분 정도 난동을 부린 끝에 엘레노어는 기사들에게 잡혀 중앙 막사로 끌려왔다.
조금 기대했지만, 당연하게도 리안이 직접 불침번을 서진 않는 모양이었다.
당직 책임자인 기사가 끌려오는 엘레노어를 보고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하아.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곁에 앉아 있던 다른 기사들도 지친 목소리로 탄식했다.
“저녁 내내 시달린 것으로도 부족해서 주둔지까지 쳐들어오다니.”
“잘생긴 건 알지만, 얼굴 한번 보려고 목숨 거는 여자들이 왜 이리 많아!”
리안의 이름을 부르짖은 덕에 그를 한번 보려고 달려온 마을 여자로 여겨진 모양이었다.
체면은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크게 안도했다.
대화 내용을 볼 때 리안이 이곳에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어이, 아가씨. 고개를 좀 들어 보..”
다가온 기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뭐야. 왜 그래?”
그가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있자 다른 기사들도 다가와 엘레노어를 보고는 정확히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대, 대체 왜?”
그들은 멍하니 중얼거리다 곧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담당 기사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뒤 곧 설교를 시작했다.
“지체 높은 집안의 영애 같은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서 돌아가십시오.”
“전 칼라브리아 백작님을 꼭 만나야만 해요. 연락해 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백작님과 아는 사이라고요, 저는….”
기사들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엘레노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 이름은 엘레노어 마리체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기사들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당신이…?”
코웃음을 치던 담당 기사가 미간을 좁히며 엘레노어를 자세히 보았다.
제국 기사단원으로서 수도에서 왔기 때문에 팰리시티를 뒤흔든 스캔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이라고요. 이럴 시간이 없어요. 빨리 백작님을 ……….”
간청하던 엘레노어는 말을 멈췄다.
갑자기 그녀가 있는 막사 바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떤 직감에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바닥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엘레노어?”
익숙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