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51화 (51/120)

제51화

‘백작님을 만나게 해 준다고?’

리안이 떠난 토벌은 최소 2개월이상이 소요될 거라 들었다.

그를 따라 수도 밖으로 가기라도 하자는 건가?

무척 수상한 제안이었다.

엘레노어가 손을 뿌리치며 뒤로 물러나자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같이 가자.”

눈빛이 너무나 열렬해서 혹시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뭐 하는 겁니까? 상대가 난처하잖아요.”

경계하고 있던 엘레노어의 귀에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키가 크고 준수한 남자 귀족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기품이 넘쳐흘렀다.

“아,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

여자가 뒤늦게 생각난 듯 이마를 친 뒤 곧 시원스레 말했다.

“내 이름은 미나즈 에이브로트야.”

미나즈 에이브로트?

생각지 못한 거물의 이름에 엘레노어의 입술이 벌어졌다.

미나즈는 그녀의 놀란 표정이 만족스러운 듯 씩 웃었다.

“그리고 저쪽은 클로드 로우앤이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엘레노어의 눈이 점점 반짝였다.

미나즈는 사사건건 황녀를 방해하는 악역이었지만, 시원시원한 성격에 치사한 수법도, 망설임도 없어 매력적이었고 그녀와 늘 옥신각신하는 클로드 역시 엘레노어가 주인공만큼이나 좋아했던 등장인물이었다.

제국에 오고 나서는 둘이 모델로 나오는 작품을 집필한 적도 있었다.

“만나게 돼서 기쁘네요.”

황녀와 리안을 보고는 차마 좋아할 겨를도 없었지만, 이번엔 연예인을 만난 듯 들떴다.

미나즈는 엘레노어가 내민 손을 잡고 경쾌하게 흔들며 물었다.

“나를 아나 보군. 그럼 같이 갈 거지?”

“아, 그건….”

엘레노어는 슬쩍 시선을 난간 너머로 던졌다.

아래에서 도나테가 여전히 사방으로 엘레노어의 험담을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녀가 파티를 망치지 않도록 몰아 내야 했고, 또 앞의 두 사람을 믿어도 되는지도 확신이 가지 않았다.

미나즈가 황녀와 반목하긴 했지만, 지금 자신의 편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좀……….”

“백작님을 만나게 해 준다고요?”

“그래.”

“대체 어떻게요?”

노리는 사람이 많은 지금 리안을 따라가긴커녕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위험했다.

설명을 요구하자 미나즈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엘레노어를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품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내 엘레노어의 앞에 내보였다.

‘이게 뭐지?’

눈앞에서 반짝이는 건 벨벳 상자에 담긴 투명한 빛의 보석이었다.

엘레노어가 묻기 전에 미나즈가 입을 열었다.

“워프 스톤.”

미나즈가 나직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이걸 사용하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지. 아무리 멀어도 말이야.”

엘레노어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용할 생각을 하지 못한건 그것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제작 난이도와 희귀한 재료 때문에 수십 년에 하나 생산될까 말

“리안은 공식 토벌을 떠났으니 매시각 위치가 각 지역을 통해 수도로 보고되고 있어. 우린 그가 바젤 주둔지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아 왔지.”

미나즈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을 이용하면, 리안에게 이동할 수 있을 거야.”

“이런 엄청난 보물을 제게 준다고요?”

“그냥 주는 건 아냐. 조건이 있어.”

당연히 그렇겠지.

엘레노어는 신중한 표정으로 미나 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얘기가 긴데. 대충 간추리자면…

종속의 서약이라는 강력한 주술이 있거든?”

“네. 알고 있어요.”

“오, 정말? 그럼 그 서약을 하면 몸에 각인이 생긴다는 것도?”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나 즈는 한시름 덜었다는 듯 반색했다.

“사실은 리안이 그 서약을 했다는 의혹이 있거든. 우리는 그걸 확인하고 싶어.”

고위 귀족들은 모두 짐작하는 사실이라던 스카이의 말이 옳았던 모양이다.

거기까지 말하다가 미나즈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들의 뒤로 메이드가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자연스레 딴청을 부리다가 메이드가 사라지자 대화를 이어갔다.

“우린 리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어. 그가 오면 언제 종속의 서약이 활성화될지 모르거든.

그가 황제를 만나기 전에 확인해야만 해. 마음 같아서는 내가 가서 리안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는 역할을 맡고 싶지만..….”

“칼라브리아 백작이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클로드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미나즈는 그를 쏘아보며 육감적인 입술을 비죽였다.

“이건 단 하나밖에 없어. 성공할 그녀의 물음에 클로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원해서 끼워 준 건 아닙니다.”

“그에게 마킹 스톤을 부탁하러 갔는데 계획을 설명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하더라고.”

미나즈가 뺨을 긁적였다.

그 명석한 남자가 또 정황만으로 모든 걸 꿰뚫어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까 그런 말을 했구나.’

리안을 만나기 전에 새겨 두고 싶미나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동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반시간 남짓이야. 그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원래의 장소로 돌아오게 돼.”

“그럼 안전한 장소가 필요하겠군요.”

“그래. 그 드레스도 좀 갈아입어야 할 거고.”

미나즈는 엘레노어의 기다란 옷자락을 바라본 뒤 말했다.

“이제 꾸물거리지 말고 가자. 장소자를 꼭 쥐었다.

*

샨카른 호텔의 응접실.

드넓은 방 안에는 황제와 플로이드공작 부인,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체펠린이 있었다.

세 사람뿐이어도 파티 음식은 저택의 다른 모든 홀처럼 거대한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황제는 그 앞에 서 있었으나 시선은 연회가 한창인 창밖에 꽂혀 있었다.

“정말 그대답지 않군.”

황제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중얼거렸다.

“천박하게 번쩍이는 장식과 마구 날뛰는 어린애들을 불러 모은 연회라니. 게다가 노골적으로 재산을 뽐내는 듯한 대 저택. 이 모든 게 그 대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네.”

황제의 얼굴에서 홀에서 보였던 친근한 표정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유감을 넘어 경멸까지 섞인 말투로 내뱉었다.

“이게 모두 그 채신없는 과부를 곁에 둔 탓일 거야.”

거기까지 말한 뒤 황제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방 중앙에 서 있던 공작 부인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 여자를 내게 넘기게.”

황제는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했다.

그의 뜻은 그저 입 밖에 내어 말하기만 하면 이루어졌다.

말 한마디에 수 없는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그의 말을 거역하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이들 중 하나였다.

“넘길 수 없습니다.

“정말 과부를 며느리로 들일 셈인가?”

“리안이 제게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으니까요.”

이를 악문 황제의 물음을 공작 부인은 간접적으로 받았다.

“내가 리안의 원망을 받아 주지.

나한테 넘기고 모두 내 탓으로 한 뒤 그대는 모르는 척해.”

황제가 공작 부인에게 다가서며 거친 어조로 말했다.

“저 여자는 하찮디 하찮고 그대 입장에서도 거슬리는 존재가 아닌가.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네.”

눌러 놓은 감정이 새어 나와 말을 마쳤을 때는 어깨가 들썩였다.

황제는 그 상태로 잠시 기다렸으나 공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결국,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이렇게 나오는 이상 더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이 있네.”

황제는 직접 설명하는 대신 뒤에서 있는 체펠린에게 고갯짓했다.

그리고 그가 침착한 어조로 종속의 서약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이 공작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띄는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공작 부인의 표정이 조금 창백해진 것은 명확했다.

‘어미로서 모르는 게 나을 것을.’

이건 모두 그녀가 공연히 버틴 탓이었다.

아들을 끔찍이 여기는 그녀가 충격을 받았다 해도 동정의 여지는 없었다.

“자, 이제 알게 됐으니 선택하게.”

황제는 가차 없이 공작 부인을 재촉했다.

방구석을 응시하고 있던 공작 부인 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폐하의 말씀은 제 아들을 폐인으로 만들기 싫으면 황녀 전하와 결혼하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무뚝뚝하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져 있었다.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황제는 코끝을 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굳이 그런 조건을 덧붙이지 않아도, 내 딸이 리안의 상대로 부족하진 않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제 아들을 폐인으로 만들 수 있는 상대지요.”

“아일린이 그럴 리가 없지.”

황제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과 공작 부인의 문제는 정치와 힘겨루기로 해결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만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일린은 모두에게 사랑만 받아야 했다.

“그대 역시 그 애가 칼라브리아 백작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을 텐데, 그리고 타고난 품성이 얼마나 천사 같은지도.”

공작 부인은 그 말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속눈썹을 길게 드리우며 나직이 말했다.

“저는 리안이 주술에 동의했을 거라고 믿기 어렵습니다만.”

“분명 의지가 강한 청년으로 자랐지만, 어렸던 때는 있었지. 부모가 하는 말을 잘 들었던 시절도 있었을 거고.”

공작 부인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칼라브리아 공작과 이야기를 나눠보겠나?”

“그 남자의 말을 제가 신뢰할 것 같습니까?”

무겁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동자에 강한 분노가 떠올랐다.

“저는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고집스러운 말에 황제가 혀를 찼다.

“어리석군.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황제는 핏발이 오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속에서부터 끓어오른 열변을 토했다.

“잘 모르나 본데 그대가 멍청한 선택을 하면 그대의 아들은 수도에 돌아오자마자 내게 종속되어 영혼 없는 허수아비가 될 거야. 어차피 내 뜻을 이룰 텐데 뭐 때문에 시간을 끌며 버티는 거지? 인제 와서 뜻을 바꾸기에 체면이 살지 않아서인가?”

공작 부인은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젠 황제도 그녀의 말에 흥미가 사라졌다.

좋게 갈 기회는 이미 끝난 것이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공작부인과 리안에게 이제 누가 진정한 황제인지를 알려 주어야만 했다.

“체펠린.”

“네, 폐하.”

강을 지난 이상 이제 거리낄 것도 없었다.

“엘레노어 마리체를 반역자로 선포하고 내게 끌고 와. 저항하거나 반항하는 이는 모두 사살해도 좋네.”

임계를 넘은 황제의 명령이 방 안에 무겁게 울렸다.

“이제 연회는 끝났어. 공작 부인.”

황제는 굳어 버린 플로이드 공작부인에게 말한 뒤 방을 떠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