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엘레노어는 연회장 2층 복도의 가장 안쪽에 선 채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너무 겉돌지 않으면서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선택한 장소였으나 그녀를 일부러 찾아오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 공작가로부터 며느리로 인정받은 건가요?”
“그저 공작 부인의 연회를 봐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질문 공세에 엘레노어는 한결같은 답변을 내어놓았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의 반복이었다.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으나 뺨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으며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엘레노어는 어느 순간 느껴진 낯익은 향기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모았다.
앞을 보니 보통 얼굴이 있어야 할부근에 크라바트를 맨 단단한 가슴이 있었다.
시선을 올린 엘레노어는 움찔했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제국 최대의 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스카이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내려 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수려했으나 오늘은 분위기가 무척 달랐다.
“그 차림은 뭐예요?”
엘레노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스카이는 늘 입고 있는 페이드라 공국의 복식 대신 제국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잘 어울리지?”
당당한 말투가 얄미워서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 잘 어울렸다.
잘 정돈된 제국의 복식이 이런 자유분방한 남자에게 딱 걸맞을 줄이야.
반듯한 제복에 항상 길게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묶어 옆으로 내리자 평소의 음험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특유의 색기는 금욕적인 복장에 대비되어 더욱 야릇하게 발산되었다.
“아무래도 제국에 오래 머물게 될 거 같아서 말이야.”
“곧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누구와 함께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는지 잊었나?”
스카이가 씩 웃자 멍한 얼굴로 조각 케이크를 들고 오던 메이드가 쟁반을 떨어뜨렸다.
약간 소란이 일어났으나 스카이는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엘레노어의 찡그린 미간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놓고 인상을 찌푸릴 건 없잖아.”
“…초대장을 보낸 기억이 없습니다.
만?”
“그렇게 냉정하게 굴면 곤란한데.”
스카이가 부채를 쥔 엘레노어의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내 마음이 담긴 값진 선물을 받았으니까.”
부채 아래에서 스카이가 엘레노어의 손에 끼워 준 마킹 스톤을 만지작거렸다.
속사정을 모르는 주변에서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더 소란을 일으킬 수 없어 엘레노어는 스카이와 함께 테라스로 나왔다.
“한동안은 두문불출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일을 벌이다니.”
스카이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일부러 보란 듯이 외부로 과정을 노출하고, 떠들썩하게 진행한 건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이 부근은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므로 대대적으로 공사하면 소문이 반드시 퍼져 나가게 되어 있었다.
입소문을 내고 파티에 대한 기대를 부추기는 것만큼 흥행에 도움이 되는 건 없었다.
이 파티가 플로이드 공작가의 위신에 걸맞아야 한다는 주문이었으므로 엘레노어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굳이 그런 걸 설명하지 않아도 스카이는 알고 있을 게 뻔했다.
엘레노어는 입을 다문 채 테라스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간 연락이 없었던 걸 보면 아직 칼라브리아 백작의 멋진 몸을 샅샅이 감상하진 않은 모양이군?”
스카이의 질문에 엘레노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오늘 유독 쌀쌀맞은 건 스카이를 보면 자꾸 억지로 묻어 둔 리안에 대한 걱정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백작님은 돌아오지 않았는걸요.”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았고?”
“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얘기를 함부로 누구에게 물어보겠어요.”
몇 번이고 공작 부인에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이 이미 안다면 몰라도 리안이 오지 않으면 확실해 지지 않는 문제 때문에 그녀를 미리 걱정시키기 싫어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할 말 안 할 말도 가려서 하고, 점점 마음에 드는데.”
테라스에 기댄 채 그녀를 내려다보던 스카이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황금 폭죽들로 바깥이 환해 역광이 드리워져 있었으나 또렷한 윤곽에 흐르는 빛은 유려했다.
엘레노어는 고개를 기울이며 새침하게 답했다.
“그렇게 가볍게 다가올수록 관심이 달갑지 않군요.”
“난 제법 진지하다고. 못 믿겠어?”
스카이의 눈빛은 이제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열기를 띠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단둘이 있는 장소에서 야릇한 대화로 흘러가는 건 곤란했다.
“진지하고 명예를 아는 귀족 신사께서 제게 묶였다는 얘기를 굳이 누설하실 줄은 몰랐네요.”
엘레노어는 슬쩍 분위기를 가볍게 바꾸려 시도했다.
“캔터베리 자작이 전했나 보군?”
“그래요. 전 이제 결박 취미의 요부라 오해받고 있어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당연히 농담으로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진지하게 의심하다니.
뭐 나 말고 뭐 또 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엘레노어는 순간 뜨끔했다.
재빨리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지만, 귀신같은 스카이의 바다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설마, 칼라브리아 백작이?”
떠보는 듯한 시선을 회피했으나 이미 늦었다.
곧 스카이의 커다란 웃음이 테라스에 울려 퍼졌다.
“하하.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여자야.”
스카이의 나른하게 뜨고 있는 눈매가 부드럽게 휘자 늘 서려 있는 위험한 색기가 사라지고 밝은 소년처럼 보였다.
“이제 그만하고 연회장으로 돌아가세요. 안 그래도 심란하니까요.”
“나를 보면 심란한가?”
스카이가 눈썹을 올리는 어조가 야릇해서 엘레노어는 딱딱하게 답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거든요?”
“어떤 쪽으로든 당신의 심기를 흔들어 놓는 남자가 흔치 않았을 거 같은데.”
그의 말은 미리 대본이라도 짜 온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받아치려 그에게로 고개를 돌린 순간.
엘레노어는 흠칫했다. 스카이의 얼굴이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키스해도 되나?”
너무나도 느닷없는 말에 엘레노어의 입이 벌어졌다.
“하? 된다고 할 거라 생각하세요?”
“시도는 해 볼 수 있잖아.”
스카이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보통 남자가 하면 서툰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텐데 그에게는 끔찍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곧 칼라브리아 백작을 만나게 될테니까. 나를 새겨 둬야지.”
속삭이는 목소리가 녹아들 듯 귀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의 야릇한 말보다 ‘칼라 브리아 백작’이란 단어가 귀에 더욱 걸렸다.
리안이 정말 서약을 했을까.
그가 너무 마음에 걸려 일에 미친듯이 몰두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카이는 곧이라고 말했으나 리안과의 재회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얼굴이군.”
스카이는 작게 중얼거린 뒤 눈을 내려뜬 엘레노어의 뺨을 살짝 쓸었다.
“오늘은 아마 힘든 날이 될 거야.”
“이미 그런걸요.”
엘레노어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스카이가 픽 웃었다.
“벌써 지치면 안 돼.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두 여인이 꿍꿍이가 있는 듯하니까.”
강한 여인?
공작 부인과 황녀가 곧장 떠올랐다.
“무슨 꿍꿍이죠?”
“나도 잘은 몰라. 그저 동향이 그렇다는 것뿐이니까.”
스카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바깥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와 장면을 깨뜨렸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또렷한 음성과 환호에 엘레노어는 긴장하고 스카이는 눈썹을 조금 들었다.
“가 봐야겠군.”
엘레노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이가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더니 휙 엘레노어의 팔목을 잡아챘다.
곧 그의 붉은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려 한동안 테라스에 있던 엘레노어는 연결된 다른 문을 이용해 스카이와 다른 방향으로 슬그머니 나왔다.
사람이 많지 않은 2층 복도 후미진 곳에 홀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이 있었다.
그리로 다가간 엘레노어는 황제 일행이 정원을 지나 저택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황제가 공작 부인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있었으나 엘레노어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꽂혀 있었다.
‘황녀.’
연한 스카이블루 드레스를 입은 황녀는 언제나처럼 여리고 또 순수한 소녀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하기 전까진 그녀에게 이입해서 기쁘고 슬프고 함께 웃고 함께 울었던 적도 있었는데.
엘레노어는 건조한 시선으로 아래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연회의 주인공인 그대에게 내가 댄스를 청해야 할까.”
황제의 목소리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실내에 또렷이 울려 퍼졌다.
예를 올린 공작 부인은 몸을 똑바로 세운 뒤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어조 대신 풍부한 성량으로 답했다.
“오늘 밤의 연회는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서툰 제 춤으로 시작하기 보다는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젊은이에게 맡기는 게 좋겠지요.”
공작 부인의 시선이 황녀 아일린과 그 뒤에 선 스카이에게로 향했다.
“어떤가, 페이드라 공작?”
연회에 참석한 모든 여인의 얼굴에 동경과 부러움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홀 중앙으로 나아가자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곧 플로어로 사람들이 합류해 연회장은 물결치는 화사한 드레스의 향연이 되었다.
엘레노어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황제가 슬며시 공작 부인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내 홀 안으로 통하는 복도로 사라졌다.
‘비밀 회담?’
공작 부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는 거지?
궁금했으나 감히 공작 부인과 황제의 회담에 다가갈 방법은 없었다.
엘레노어는 나중을 기약하고 다시 플로어로 시선을 돌렸다.
‘황녀가 아무 속셈도 없이 오진 않았을 거야.’
비앙카에게 한 짓을 고려하면 또다시 목숨을 노릴지도 몰랐다.
저번 파티의 교훈을 통해 엘레노어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 생각이었으나 긴장은 늦출 수 없었다.
게다가 스카이의 경고를 생각하면..….
초조하게 황녀를 살피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긴 어떻게..…!”
가장 북적이는 부근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인물.
엘레노어의 시어머니 도나테 마리 체 남작 부인이었다.
‘마리체 영지에 벌써 알려진 건가?’
그곳은 무척 변방인 데다 엘레노어가 일부러 바깥소식이 잘 전해지지 않도록 고립시켜 두었다.
아무 개입 없이 스스로 알아서 벌써 수도까지
‘황녀가 데려온 건가?’
도나테가 범접하기 어려운 수도의 귀부인들 사이에서 여왕과 같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채 떠들어 대는 걸 보면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도나테의 입에서 쏟아지고 있을 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늘 그렇듯 엘레노어를 깎아내리고 말도 안 되는 거짓들로 음해하고 있을 것이다.
‘어딜 찌르면 효과적일지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네.’
엘레노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어쩌면 저렇게 악랄하게 사람의 약한 부분만을 파고드는 걸까.
황녀의 저열함에 짜증이 치밀었다.
파티의 전면에 나서기 싫었으나 무작정 도나테가 설치도록 놔둘 수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낯선 여인이 엘레노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녕?”
젊고 키가 크며 육감적인 외모의미인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 엘레노어 남작 부인.”
생글생글 웃는 태도는 짐짓 친근했으나 고급스러운 옷과 자연스러운 하대에서 높은 신분임이 느껴졌다.
“듣던 대로 아름답네. 기대대로라다행이야. 나, 그간 당신에게 꽤 흥미 있었거든.”
그녀는 엘레노어를 먹음직스러운 음식처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뭔가 부담스러워 몸을 빼려는데 여인의 긴 팔이 어깨에 은근하게 휘감겨 왔다.
“가자.”
“네?”
가자니 어디를?
다짜고짜 나온 말에 엘레노어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여인처럼 보였으므로 정중하게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누구… 시죠?”
“나를 따라와. 당신에게 꼭 보여줄 게 있으니까.”
윙크하는 미나즈의 섹시한 눈매가 어쩐지 위험하게 보였다.